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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구상한 픽션입니다.
실제 역사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사랑이란 불완전한 존재.
사랑을 나누는 모든 사람들은 완전한 사랑, 그러니까 완벽한 사랑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사랑은 안타깝게도 완전하지 못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웠던 짧은 꿈에서 깨었을 때 너는 없었다.
불완전한 사랑을 겪었다면, 한 번쯤은 완전한 사랑을 기다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아직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돌아와 주길.
나의 첫 번째 사랑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묻혀가고 있었다.
Time 2 Love
01
대영제국, 황제 조지 2세.
잉글랜드 런던의 한적한 마을,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팔가(Falgar) 거리에는 매일 사람들이 북적였다. 거리에는 다닥하게 붙은 집들이 거리 양쪽에 세워져있었다. 그 앞쪽에는 잡다한 물건들이나 먹을거리들을 팔고 있었다. 부모를 따라 물건을 팔러 온 아이는 제 눈에 들어온 사람 하나를 붙잡았다. 꼬마 아이들은 자기네끼리 모여 뭐가 그리 즐거운지 꺄르르 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이 거리를 조금 벗어나면 호수 하나가 있고, 휑한 들판 하나가 보였다. 나무 몇 그루와 나무 벤 치 하나로 꾸며져 있는 곳이었다. 에메랄드빛의 호수가 햇살을 머금어 반짝였다. 호수 근처에는 새들이 모여들어 지저귀었다. 거리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작은 조각배 세척이 이 떠있는 호수 저편에는 저만치에 자리 잡은 으리한 건물들이 비쳐 보였다. 그 건물들 중 가장 눈에 띄는 블레넘(Blenheim) 궁전은 황실로 쓰이고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다른 귀족의 대저택들이 들어차있었다.
궁전 앞쪽에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중간에는 큰 석고상을 둘러싸며 물을 뿜어내는 분수대가 자리 잡았고, 주변에는 튤립들이 심어져 있었다. 갖가지 색으로 물든 꽃들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이 정원은 공주가 돌보고 있는 정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꽃을 좋아하여 산책을 핑계로 정원을 자주 들렀다. 궁전의 뒤쪽에는 승마를 즐기기 위한 큰 필드가 자리 잡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이른 오후가 되면 궁전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과 함께 티타임을 즐겼다. 꼬마 도련님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필드에 모여 게임을 하곤 했다. 하얀 말의 발바닥이 필드에 닿는 소리와, 말에 올라타 긴 막대기를 든 채 공을 치는 소리가 황실 안과 밖으로 퍼졌다. 저녁시간이 되면 디너파티가 열렸으며, 간혹 황제가 주최하는 무도회가 열리는 날은 반짝이는 드레스와 턱시도들을 입은 채 궁전을 메웠다.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가 있다면 지켜야 할 예절과 법이 존재할 터. 별 건 없다. 별게 없는 만큼 정말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뭐 그런 규칙이지만.
첫째, 황실에서는 무조건 예를 갖추어라.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므로 황제가 머무르는 궁전, 즉 황실이 존재한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주 가끔, 궁전 내에서 황제를 마주치게 된다면 무조건 큰 목소리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려야 한다. 백성들을 아끼는 황제였으나 예를 갖추는 것만큼은 중요시했기에 꼭 인사를 올려야 한다.
황실에는 기본적으로 왕실 사람들과 귀족,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머물렀다. 간혹 큰 공을 세우거나 나라의 발전에 보탬이 되었을 때에는 그 사람이 누구든, 계급이 어떻든 간에 황제의 허가로 황실 내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밤에는 가끔씩 거대한 파티가 열렸고 황실 사람들과 귀족들만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다. 궁전 내에는 왕족들과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 쓰이는 황실, 각 왕족들과 소수 귀족들의 방, 서재, 디너파티와 무도회를 즐기는 무도회장, 채플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귀족과 신하들을 불러 모아 나랏일에 관한 얘기들을 나누곤 했다.
둘째, 계급에 따라 행동하라.
계급은 크게 상류층 (Upper-class), 중상위층(Middle-class), 노동계층(Working-class) 이 세 가지로 나뉜다. 순서대로 엘리트(Elite), 미들(Middle), 워킹(Working)이라고 흔히들 구분한다.
엘리트(Elite)는 왕족과 귀족들만이 해당하는 클래스이다. 황제, 황비, 대공, 대공비, 태자, 공주가 황족의 계보를 이어나간다. 간혹 황제와 같은 혈류인 친척은 대공의 지위나 귀족의 지위 중 하나를 내주었다. 귀족은 공작, 후작, 백작, 남작, 자작, 후작, 기사 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귀족의 아들이나 딸이 태어났을 경우에도 엘리트 계층으로 분류한다.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은 말이나 행동을 할 때 품위를 지켜야 했고, 승마를 필수적으로 배웠다.
미들(Middle) 클래스는 흔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들로 제일 비중이 높은 계층이다. 미들 내에서도 경제상황에 따라 상위, 중위, 하위 층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궁전 내 시중을 들거나 잡다한 일을 하는 하인들은 미들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미들 내 하위계층보다도 낮은 마지막 계층이 워킹(Working)이다. 미들보다는 비중이 적은 계층이다. 대부분의 워킹 사람들은 궁전이나 귀족들의 저택의 하인으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맡아 했다.
가끔씩 황제나 황 족이 밖으로 행차하는 날이면 미들이나 워킹 사람들은 넙죽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Raise your head(고개를 들라)." 말이 나올 때까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는 자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라고 여겨 그 즉시 목에 칼을 갖다 대었다. 귀족들은 머리를 살짝 숙여 예를 표하면 되었다. 왕족이 아닌 귀족들에게는 허리를 45도로 굽히는 정도면 되었다. 예절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예절이니, 지키지 않는다면 목숨은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황제가 밖으로 행차하는 일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대가 무릎을 땅에 맞대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싫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칼이 목에 대어지고 나서야 늘어놓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과 맞바꾼 그 대가는 오로지 목숨으로 치루어야 할 것이야.
황제의 말이 곧, 법이니라.
Time
2
Love
회색빛의 연기를 뿜어내며 기관차가 철도 위를 지났다. 워킹 사람들은 밤을 꼬박 새 일을 했다. 여자들은 양털로 실을 뽑아 모직 옷감을 만들고, 남자들은 철과 석탄을 캐 그것들을 바탕으로 한 기계들을 만들었다. 만든 기계에 옷감을 넣어 옷을 대량으로 만들어냈으며, 잡다한 물건들을 생산해 내어 다른 나라에 수출하기 바빴다. 영국의 전성기라고도 불렸던, 경제 산업의 발판이 되었던 산업혁명이었다. 총명한데다 누구보다도 국민들을 아꼈던 황제 덕분에 많은 일을 했음에도 과로 같은 이유로 쓰러지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렇게 한창 산업혁명으로 떠들썩하던 영국은 주변 나라들보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행복이 있으면 불행도 있기 마련이다. 하루는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이었다. 모두가 잠든 사이, 황실에 누군가가 황실에 검은 그림자를 비췄다. 누군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 그림자가 왕실을 들렀다 간 후 지나치게 차갑고 적막한 공기가 큰 왕실 안을 맴돌았다는 것이다.
“밖에 누구 있니?”
“아무도 없어?"
항상 황제 다음으로 일어나던 공주가 오늘은 조금 더 일찍 눈을 떴다. 여덟살이면 잠이 많을 법도 한데, 제 아비를 닮아 부지런하여 매일 황제 다음으로 일찍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가 이상했다.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숨을 몰아쉬었고, 그 뒤로 숨을 몇 번 더 내뱉고는 땀에 젖은 채로 메이드를 불렀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꿈을 꾼 듯했다. 하지만 메이드의 대답 대신 큰 방 안에서 울리던 공주의 목소리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큰 방안을 가로질러 조심스럽게 열린 문과 동시에 그녀는 급히 제 손으로 얼굴 일부를 막았다. 작게 열려있던 문을 그대로 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한 명이었지만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금방이라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다리에 힘마저 풀려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아니, 그냥 일어나기 싫었다. 방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고, 보고 싶지 않았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발발거리며 궁전 안을 돌아다니며 아침인사를 하던 그녀였으나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을 겨우 올려 다시 문을 열었다. 어제만 해도 제 방에 있다 갔던, 저녁 인사까지 나누었던 하녀 하나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다. 입을 막은 채 급하게 복도 쪽으로 나와 1층의 로비를 내려다보았다. 로비 안쪽에서는 아침식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대리석이 깔린 복도 위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치맛자락이 자꾸 발에 차여 넘어질 것만 같아 위로 조금 올려 걸었다. 꾸밈없는 아이보리색의 드레스 끝자락에 배인 붉은색이 눈에 거슬렸다. 불길하다. 작은 보폭이었지만 최대한 발을 빨리 움직였다.
신이시여, 폐하를 지켜주소서.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일만이 아니길 바랐다. 양쪽 문고리를 잡아당기듯 열자 눈이 부실 정도로 장식된 가구들과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공주를 반겼다. 큰 침대 쪽을 눈에 담았다. 모서리 위쪽에는 붉은 커튼이 하나씩 모여 묶여져 있었다. …아버지.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며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공주가 그의 앞에 도착해 황제를 눈에 담았을 때에는 그 사이에서 싸늘하게 누워있는 제 아비만이 침실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제 방 앞에 쓰러져 있던 하녀와는 달리 핏자국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황제는 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장식품들 사이 미동조차 없는 황제는 영 이질적이었다. 아버지, 눈 좀 떠보세요…, 제발…. 황제의 손을 잡은 채 얼굴에 갖다 대자 눈물이 황제의 손을 타고 흘렀다.
그 시각,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내려오지 않자 메이드 하나가 계단을 올랐다. 얘! 시간이 몇 신데 아직 내려오지 않는 게야. 다른 아이로 바꾸던가 해야지 원…, 계단을 오르며 소리치던 메이드가 잠시 멈추자, 얼핏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계단을 뛰어 도착한 복도에는, 방금까지 타박을 주던 메이드가 쓰러져있었다. 바로 앞 작게 열린 황제의 방에는 침대 옆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공주가 보였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정확히 정국이 14살일 때의 일이었다. 평화로운 삶도 잠시, 황실만이 아닌 모든 국민들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침대와 조금 거리가 있는 테이블 위에는 깨끗하게 비워진 찻잔이 놓여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찻잔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로지 밤하늘을 비추던 달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궁전 내부에서 뛰어다니는 것은 품위와 격식이 떨어지는 행위라고 귀가 닳도록 배웠다. 그렇기에 복도에서 뛰어본 적이 없던 공주였으나 지금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황제의 침실과 가까운 황비의 침소부터 무작정 열어 황비를 깨웠다. 노크를 하는 것이 예의였으나 자잘한 예를 갖추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듯했다. 어머니, 일어나 보세요. 폐하가…, 말을 끝내 잇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있자, 울먹이는 공주에 눈을 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황비였다.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공주를 다독였고, 얼추 진정이 되어 훌쩍거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이내 말없이 황제의 침소로 향했다. 다시 그 처참한 풍경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마나 운건지 눈물도 더 나오지 않았다. 손으로 볼을 타고 흘렀던 눈물을 닦아내며 황비의 방을 나왔다. 바로 옆 대공의 방이 보였다. 노크를 하려 살짝 그려쥔 손을 올려도 봤지만 이내 손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대공의 방을 지나쳐 황태자의 방을 조용히 열었다.
"오빠, 일어나."
"……"
"…오빠?"
"…야, 울어?"
"……"
"왜, 또 무서운 꿈 꿨어?"
아침부터 저를 흔들어 깨우는 공주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려다 살짝 놀려줄까 싶어 계속 눈을 감고 있던 정국이었다. 아무리 불러 깨워도 미동이 없는 정국에 공주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조용히 정국을 부르는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원래라면 장난치지 말라며 정국을 더 세게 흔들어 깨웠을 공주였다. 그러나 평소와 이상하리만큼 다른 반응에 정국이 한쪽 눈을 옅게 떴고, 공주가 곧바로 그를 안아왔다. 갑자기 안겨오는 공주에 정국이 팔을 뻗어 등을 토닥였다.
"오빠도 죽은 줄 알았어."
"오빠가 왜 죽어, 뚝."
"오빠…, 폐하가 이상해. 내가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어."
정국의 미간이 좁혀졌다. 공주를 달래던 손이 멈추었다가 다시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사람마냥 겉보기엔 덤덤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정국의 눈동자에 살기가 서려있었음을, 공주는 눈치챘을 것이다.
1774년 5월 12일, 제 28대 황제 조지 2세 사망.
Time
2
Love
황실에서 한바탕 소동이 났을 때 즈음, 맑고도 둔탁한 종소리가 새벽을 메웠다. 급하게 알릴 일이 아니라면 굳이 치지 않는 종이었다. 두어 번 울리는 종소리에 정원 건너편에 있는 광장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장을 준비하던 사람들도 들고 있던 바구니와 보따리들을 내려놓은 채 광장으로 몰렸다. 소리에 예민한 탓에 잠을 뒤척이다 결국 이불에서 빠져나와 침대 밑쪽에 두었던 슬리퍼를 신었다. 저택에서도 구두를 신어야 했지만 발이 잘 붓는 나를 위해 지민이 몰래 준비해준 슬리퍼였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커튼을 천천히 열었다. 이른 새벽이라 아직 어둑한 배경 사이로, 흰말 몇 마리가 단상 옆쪽에서 멈춰 섰다. 훤칠한 키에 말끔한 얼굴을 한 남자가 말에서 내렸고, 그제서야 몇 명의 남자들이 말에서 내렸다. 지금의 왕을 이을 확률이 제일 높은 황태자인 건가. 황실에는 들를 일이 없다 보니 어느 분이 황태자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입은 차림을 보니 황태자와 얼추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종을 울려 전할 중대한 소식. 매일 기쁜 소식만 전해 들었으니 이번엔 나쁜 소식일 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제일 앞쪽 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도 좋은 소식은 아닌 모양의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슬픈 표정도 아닌 듯했지만. 팔가 거리와 궁전은 거리가 있던 터라 형태도 흐릿하게 보였다. 눈만 꿈뻑이며 에드워드라는 사람만 쳐다보고 있자 그 대신 뒤에 있던 남자가 마이크를 건네들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중대한 소식은 맞았다. 짧은 시간에 허공으로 흩어진 목소리에는 화도, 슬픔도 담겨있지 않았다. 가운데 있던 남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죽 훑어보더니 이내 말에 올라탔다. 이랴. 고삐를 살짝 잡아당기자 말이 방향을 틀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마이크를 건네 받았던 남자와 나머지 남자들도 말에 그 남자를 따랐다.
"오늘 새벽, 황제께서 승하하셨다. 오전 10시에 국장(國葬)을 거행할 예정이니 복장을 차려 채플에 모이도록."
술렁술렁. 바닥에 엎어져 있다 황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숨을 죽여 남자의 한마디를 들은 뒤 궁전으로 향하는 말들의 꽁무니를 보고 나서야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하나둘씩 제가 있던 거리 안의 자리를 찾아 돌아갔고, 평소보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채 장이 열렸다. 흐음, 콧소리를 한 번 내고는 금빛의 창문 틀을 톡톡 쳤다. 곧 문을 두 어번 노크하는 소리에 문을 조금 열었다. 언제 갈아입은 건지 블랙의 정장으로 빼입은 채 서있는 지민이었다. 양손에는 티포트와 찻잔을 올린 받침이 들려있었다. 혹여 내가 종소리에 깼을까 싶어 조심스레 노크를 한 듯했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지민의 눈을 마주쳤다. 얜 안 어울리는 색이 없단 말이지. 지민이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준 뒤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자 전해오는 폭신한 느낌이 좋았다. 지민이 나를 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았고, 테이블에 받침을 내려놓고는 테이블 옆에 멈춰 섰다. 그는 늘 그랬듯 오늘도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잘 잤어요?"
"잘 자는 중이었는데 깼어."
"…하하. 일어나계실 줄 알았어요. 종소리 듣고 깨신 거죠?"
"나 더 자면 안 되겠지?"
"당연히 안되죠. 이왕 일찍 깨신 거 티타임이라도 즐기시는 건 어떠세요?"
나름 애교라며 콧소리를 조금 섞어 물었지만 역시 애교는 나랑 맞지 않는 것 같다.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딱 잘라 대답하는 지민에 입술을 삐죽였다. 지민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티포트를 들어 차를 따랐다. 찻잔을 채운 뒤 설탕 한 조각을 넣어주었다. 씁쓸한 건 싫지만 설탕을 탄 홍차는 좋아하는 내 취향을 확실히 알고 있는 지민이었다.
"벅."
"왜요, 아가씨?"
"오늘 광장에 나오신 분 있었잖아. 그분이 황태자셔?"
"그 분은 황제 폐하의 동생분이세요. 대공께서 직접 나와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뒤에서 말씀 하셨던 분은 루이스 공작이시고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자 설탕이 다 녹았는지 지민이 티스푼을 빼고 찻잔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내밀어진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달달하면서 끝 맛은 씁쓸했다. 지민과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터온 상대였으니 찰스 백작보다도 편한 사람이 지민이었다. 낯선 환경을 편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말을 건네고, 도와준 것이 지민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차를 다시 들이키는데 문득 백작의 말이 떠올랐다. 어제 폐하를 뵈었는데, 건강하셨다고. 황제께서 나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 백작은 궁전에 들르는 일이 잦아 종종 황제의 소식을 나에게 알려주곤 했다. 저택에서 나오면 바로 궁전이 보일 만큼 거리는 가까웠지만 딱히 궁전에 들를 기회가 없었다. 매일마다 백작을 가운데 두고 전해졌던 나와 황제 사이의 소식은 어제가 마지막으로 끊기게 되었다. 성품이 좋으신 분이라고 들어왔고, 그렇게 느꼈었다. 그런 분께서 갑자기 승하하신 이유라면, 누군가의 미움을 샀다거나 아니면 정말 병 때문이거나.
“네가 끓여주는 홍차가 제일 맛있어.”
“설탕 때문에 맛있으신 거겠죠.”
“이건 또 어떻게 알았대.”
“제가 아가씨를 하루 이틀 뵙나요, 뭐.”
지민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벅은 지민의 이름이었다. 제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인 만큼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불러온 것이었다.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벨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지민은 단 한 번도 나를 그렇게 불러준 적이 없었다.
지민과 말을 나누다 보니 유리창 틈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햇살처럼 지민은 따스한 사람이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그런 지민을 보며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얻자 지민도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었다. 눈동자가 반짝였다. 황제가 죽으면 엘리트 사람들은 황실 근처에 자리 잡은 사원에서 황제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방에 들어와 반듯하게 서있는 지민을 보니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어왔다.
"오늘은 사원에 들른다고 하니 최대한 빨리 준비를 마쳐달라는 백작님의 말씀이세요. 드레스룸에 들렀다가 식사하러 내려오시면 되겠다, 그렇죠?"
밥 먹기 전에 드레스 입으면 불편한데. 지민에게 반박하려다 입을 앙 다물었다. 또 안 된다고 할 게 뻔하지 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습관적으로 책상 위에 올려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들었다 놓아두는 액자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검은 눈을 가진 여자와 파란 눈망울의 남자 사이에는 막대사탕을 들고 서있는 내가 있었다. 금빛의 머리를 늘어뜨린 채 조그만 얼굴 안에는 바다색의 눈망울과 깊은 쌍커풀, 오똑한 코에 붉은 입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도 그들이 보고 싶다고, 똑같이 되뇌었다. 좋은 환경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좋았으나, 이 환경에 적응되고 있는 내가 미웠다.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릴까봐 무서웠다. 내 생각을 읽은 지민이 조용히 방을 나가주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룸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메이드 하나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잘 잤냐고 물으며 늘 그랬듯 팔을 올렸다. 드레스룸에 들어가면 매일 다른 드레스를 입혀주었는데, 오늘도 역시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드레스였다. 무늬조차 없는 밋밋한.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있자 드레스를 입혀주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흘간은 이 드레스를 입으셔야 해요! 황제 폐하께 갖추는 예의이기도 하고요.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화장대로 나를 이끌었다. 내 옆을 요리조리 옮겨가며 분을 바르고, 립글로즈를 발라주었다. 그러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화장대 서랍을 뒤지는 그녀였고, 오팔이 박힌 머리장식 하나를 찾아내 머리칼에 꽂아주었다. 평소에 신지 않던 낮은 굽의 구두까지 신고 나서야 겨우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라가 한창 발전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맞이한 황제의 죽음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었기에 더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그 검은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미스테리였다.
Time
2
Love
황실 근처에 세워진 사원은 곧 황제께서 잠드실 곳이었다. 대리석과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져 있어 황실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사원에는 엘리트 사람들만 들여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엘리트를 제외한 사람들은 광장 근처의 작은 채플에 들러 기도를 해야만 했다. 사원 내의 국장(國葬)을 치르는 룸에는 차분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황비를 비롯해 대공과 황태자, 공주가 차분한 블랙 슈트와 꾸밈이 없는 드레스를 입은 채 제일 앞자리를 지켰다. 그 뒤쪽으로는 윤기를 포함한 귀족들이 서있었다. 지민은 들어올 수 없어 국장이 끝날 때쯤 나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 나와 백작은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맨 뒷줄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조용하고 장엄한 분위기에서 식이 진행되었고, 국장이 끝나자마자 백작은 같이 못갈 것 같다며 지민과 저택에 먼저 가있으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인 뒤 숨이 막히는 느낌에 룸을 빠져나왔다. 또각또각. 내 구두 소리가 넓은 사원에 울렸다. 평소에 주구장창 신던 높은 구두가 아니어서 조금 더 빨리 사원을 나올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에 노란빛의 머리칼이 약하게 날렸다. 맑은 공기가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꾸며져 있지 않은 들판은 이때까지 본 정원 중 가장 넓었다. 발이 편하니 걷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조금 걷다 보니 지민이 말을 타고 온 건지 금방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을 보자마자 지민을 향해 뛰었고, 나를 본 지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가씨, 뛰면 다치세요!"
"에이, 내가 뭔 다섯 살짜리 애도 아니고,"
"아가씨!"
다치겠냐…. 중심을 잃어 밑으로 내려가는 몸에 강제로 끝말이 삼켜졌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지민이 했던 말이 씨가 된 듯했다. 무릎 밑이 따끔거리는 게 풀에 쓸린 듯했다. 지민이 말에서 내려 나에게 달려왔다. 드레스 자락을 조금 올리는데 다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당연히 지민이겠거니와 하며 고개를 든 곳에는 검은 슈트를 차려 입은 남자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지민은 내 앞에 서있는 이 남자를 보고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밀어진 손을 잡았고, 그 남자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집사 기다린 거예요?"
"어…, 네. 아버지께서는 회의가 있다고 하셔서요.”
"에드워드 진이에요. 그쪽은?"
"대공을 뵙네요. 앤더 가문의 벨이에요.”
“…혹시,”
“네?”
“아…, 아니에요. 저도 회의가 있어서 이만. 조만간 다시 봐요. 상처 꼭 치료하고요.”
말을 하다 끊질 않나, 조만간 다시 보자고 하질 않나. 지민 쪽을 지나치는 석진에 지민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보니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드렸네. 석진의 형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생각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Time
2
Love
-태자가 엄연히 황실에 있는 것을 보고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시는겝니까!
“대공 또한 황제 폐하의 동생이시니 그 뒤에 찬찬히 생각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바꿀 때가 오면 또 바꾸어주어야 하는 것이 황제의 자리이지요. 황태자께서는 아직까지 어리숙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열아홉이면 노는 것이 좋을 때이기도 하고요."
-대공을 황제로 임명한다라…."
"저하께서는 폐하를 닮아 영리하십니다. 허나 그러시던 분께서 최근 들어 통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시니…. 최근들어 저하께서 마음고생이 꽤나 심하신 듯 하니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저 저하께서 적당한 나이를 맞으실 때까지 대공을 황좌에 앉히시는 게 어떠실까 하여 아뢰는 것이옵니다."
황제가 죽은 지 세 달이 흘렀다. 황제가 암살당하거나 병으로 죽으면 첫째 아들이 물려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아들, 즉 1순위인 황태자가 없을 경우, 태자의 나이가 어릴 경우에는 황제의 친척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그의 친척이라 함은 황제의 동생인 대공뿐이었다. 황태자가 있으니 당연히 황태자가 물려받는 것이 옳았다.
어렸을 때부터 매일마다 책을 읽게 한 탓에 서재에 채워진 책들은 정국의 손을 한 번씩 거친 것들이었다. 정국은 영리했고, 배우는 족족 곧잘 따라 했다. 그 어렵다는 말타기도 하루 만에 배워버렸으니 당장 황제 자리에 올라도 부족할 게 없는 정국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죽더라도 황위 계승 문제로 싸우는 일은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 상황이 너무 이르게 닥쳐온 탓에 정국의 나이가 황위를 물려받기엔 조금 이르다, 최근 들어 나랏일을 게을리한다. 라는 이런저런 문제로 걸고 넘어진 윤기였다.
윤기가 말하는 대공은 황제의 동생인 석진이었다. 황태자인 정국보다는 석진을 조금 더 다루기 쉽다고 생각한 윤기였다. 앤더 가문과 튜더 가문, 지금 귀족들 사이에서 세력을 쥐고 있는 가문이었다. 황제가 죽은 지금이 튜드 가문의 세력을 더 넓힐 수 있는 기회였고, 그 타깃이 하필이면 석진이 된 것이었다.
황실에는 조금의 거리와 층을 둔 채 붉은색에 금으로 장식이 된 소파 세 개가 놓여있었다. 그 조금의 거리와 층, 황실 내에서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붉은색으로 만들어진 소파, 대리석 위에 깔린 카펫이 황실의 권위를 나타내주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황비와 정국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황비는 실크 천으로 만들어진 연홍색의 천에 화려한 무늬들과 보석들을 박아 넣은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짜인 드레스가 황비의 품위를 한 층 더 높여주는 듯했다. 머리는 올려 묶어 왕관을 올렸다. 그 옆에 앉아있던 정국은 네이비색의 슈트를 입은 채 따분하다는 듯 귀족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래 태자께서 오르셔야 하는 자리를 감히 제가 탐내도 될는지. 저하의 판단에 따르도록 하지요.”
"루이스 공께서 제 마음을 헤아려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마음을 정리할 동안 부디 대공께서 저희 대영제국을 보살펴주시지요. 기대가 큽니다, 대공.”
정국이 망설임 없이 말을 마치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내려왔다. 대공과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문까지 이어진 카펫을 밟더니 윤기의 앞쪽에 멈추었다. 윤기도 고개를 숙인 탓에 정국이 윤기을 내려다보았다. 정국이 윤기의 귀 옆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공께서는 고개를 조금 더 숙이셔야겠습니다."
그럼 약속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황비 쪽으로 인사를 하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녀들이 양쪽 문을 잡아 열어주었고, 황실을 나오는 정국의 표정은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고,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황제가 죽기 전에는 찾아도 볼 수 없던 행동이었고, 너무 많이 변해버린 정국이었다. 정국의 행동이 변해버린 이유를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석진은 윤기를 잘 알았기에, 고개를 들어 정국이 지나간 자리를 훑었다. 그 자리에는 윤기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고, 윤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윤기가 정국이 중요시하는 무언가를 건드린 것이 틀림없다고.
정국이 나간 후 귀족들은 고개를 숙인 채 서로 눈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윤기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정작 그 주인공인 윤기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고 있던 석진이 조용히 말을 꺼낸 덕분에 나머지 귀족들도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들의 언성이 점차 높아졌고, 중간에 나가버린 정국에 기분이 좋지 않던 황비가 소파의 팔 받침대를 세게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가 왕실을 메웠다. 움찔한 귀족들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을 둘러보며 이내 황비가 입을 열었다.
-태자의 뜻을 따라 대공을 황좌에 올리도록 하지요.
-다만 나라를 책임지지 못한다면 대공은 물론 그대들의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아시겠지요, 루이스 공?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석진이 머리를 조아리자 귀족들도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목숨이라는 단어 하나가 여럿을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윤기는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음에 입꼬리를 올렸다. 윤기를 보며 조용하고도 귀품 있는 목소리로 묻는 황비의 큰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