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짝사랑으로 변하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새것이라는 걸 티 내듯 구김살 없이 빳빳한 교복도. 긴 머리만 고집하던 내가 교칙 때문에 과감하게 자른 머리카락도. 나와 같은 곳을 향해 걷는 낯선 아이들도. 모든 것이 처음이고 새로웠던 그때. 나는 내 반이 될 교실 문 앞에서 한참 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을? 교실 문을 열까 말까를 말이다. 운도 지지리 없는 나는 원래 알던 친구들과 다른 반이 돼버렸다. 어떻게 나 혼자만 다른 반이냐? 하늘도 무심하시지. 당찬 성격이 아닌 나는 새 학교 새 학기 첫날에 굳게 닫힌 문을 벌컥 열어 재낄 수 있는 강심장이 아니었다. 어느덧, 시간은 십오분이나 흘러 버렸고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이 나를 향해 이상한 시선을 보낼 때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아, 그냥 눈 딱 감고 열...
"거기서 뭐 하냐."
"......"
넌 누구냐. 드디어 찌질한 내가 큰 결심을 하고 문을 열려는데 그런 내 결심이 나를 부르는 누군가로 인해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바로 내 뒤에서 들리는 나른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 지금의 나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성숙한 목소리였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남자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에 잔뜩 움츠려 들었을까 남자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신기했다. 그냥 살짝 웃었을 뿐인데 차가웠던 남자애의 분위기가 따듯하게 변했다.
"설마, 쫄아서 못 들어가는 중?"
...정곡을 찔렸다. 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손을 허공에다 휘저었다.
"무슨 소리야? 나 방금 도착했어."
"방금 오긴. 십오 분 전에 왔잖아."
" ...어떻게, 가 아니라. 아닌데?"
아, 진짜 김여주.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방정이야! 내 말실수에 남자애가 입 동굴을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아니긴. 참고로 나도 십오 분 전에 왔다?"
"...하하, 하하하하."
젠장. 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아무리 작아도 내 몸을 쑤셔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는 게 재미있어서 그냥 내버려 뒀는데. 이러다가 조례 시작하겠어."
"......"
"내가 도와줄게. 짹짹아."
...짹? 짹, 뭐? 내가 반문할 틈도 없이 남자애가 앞문을 시원하게 열었다. 아니, 왜 뒷문 놔두고 앞문이야!
"여, 민윤기. 왜 이렇게 늦게 왔어? 1분 남기고 아슬하게 세이프네."
"여, 안녕. 근데 너 교복 입으니까 얼굴이 더 삭아 보인다."
"왜 아침부터 시비냐?!"
이름이 민윤기였구나. 왜인지 남자애와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내가 넋을 놓으며 민윤기의 뒤에 서 있는데 그가 내게 눈짓을 보냈다. 뭐라는 거지.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민윤기가 입을 뻐금거렸다. 디... 뒤... 뒷? 아.
'뒷문.'
민윤기의 입 모양을 해석한 내가 서둘러 뒷문으로 들어가 빈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그제야 민윤기가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배려해준거구나. 일부러 앞문을 열고 큰 목소리로 애들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모두 나를 위한 배려였다. 나는 속으로 오늘 처음 본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
.
.
그래, 그땐 그랬었지. 갑자기 떠오른 중학교 때의 추억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나는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내 성격에 침음을 삼켰다. 이번에도 모든 것이 새로운 날. 그러나 나는 여전했다. 그러니까... 여전히 나는 찌질하다고. 설마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도 이럴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나를 도와줄 민윤기는 없어.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래? 나는 눈을 부릅뜬 것과 정반대로 소심하고 조심스럽게 교실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내 추억 속의 인물이 교실 안에 있었기에. 한참 굳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민윤기의 모습에 서둘러 눈앞에 보이는 자리에 몸을 던지듯이 골인하며 앉았다. 민윤기다. 민윤기야. 왜 쟤가 여기 있지? 같은 고등학교였어? 미친.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
.
.
와, 나만 혼자야. 삼삼오오 모여서 즐겁게 웃고 떠드는 애들과 다르게 나만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어째서인지 내가 앉아있는 자리만 흑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새 학기 운이 없는 나는 이번에야말로 완벽히 혼자가 됐다. 왜, 맨날 나만 달라? 친구들을 만나려면 다른 학교로 찾아가야 하는 판국이라니. 나는 다른 남자애들과 벌써 친해진 민윤기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민윤기가 먼저 아는 척해주기를 바랬는데. 그건 내 욕심이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민윤기와 나의 인연은 중학교 이학년 때까지였다. 삼학년 때는 반이 달라졌기에 서로 마주할 접전 따위는 없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중학교 졸업하기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다. 마지막으로 사서 선생님을 도와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도 평소와 똑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딱 하나가 달랐다. 책과 전혀 연관이 없는 민윤기가 사서 동아리의 회장을 맡고 있는 내게 찾아온 것. 그것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말이다.
"A4 용지 있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민윤기를 올려다보자 그가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니, 그걸 왜 3학년 층에 있는 교무실이 아니라 5층 맨 구석에 있는 도서실까지 와서 말하냐고. 하지만 내가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라리는 민윤기에 나는 군말 없이 그에게 A4 용지를 건네주었다.
"여기."
"고맙다."
"근데 그거로 뭐하게?"
"......"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민윤기의 동공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왜 저래.
"뭐야? 왜 말이 없어?"
"...짹짹이는 몰라도 돼."
헹, 나도 알고 싶지 않거든. 예의상 물어본 거거든.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책을 마저 정리했다. 하지만 내가 책을 거의 다 정리할 때까지도 민윤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답지 않게 무언가를 머뭇거리고 있는 민윤기에 결국, 답답함에 져버린 내가 그를 돌아봤다. 내가 고개를 자신의 쪽으로 돌리자 놀랐는지 민윤기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 종이 받았으면 가."
"...갈 거야, 인마."
"잘 가라."
내 성화에 민윤기가 마지못해 발걸음을 뗐다. 가 멈췄다.
"김여주."
"......"
처음으로 불려진 내 이름에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민윤기를 바라봤다. 나를 맨날 짹짹이라고 부르길래 내 이름을 이년 넘게 모르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나 보네. A4 용지를 만지작거리던 민윤기가 고개를 들고 나와 시선을 마주한 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입동굴을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고등학교 첫날에 또 쫄지마라."
"......"
"네 얼굴이 너무 압도적이라서 다른 애들 다 이길 수 있어."
"죽을래?"
내 감동 돌려내라. 내가 눈을 무섭게 치켜뜨자 민윤기가 낄낄거리며 웃더니 내 머리를 꾹 누르고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민윤기가 누른 내 머리에 손을 올리며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졌다. 무언가가 울컥하고 울렁거리는 느낌. 물론, 그 감정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그냥 한때 지나가는 감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땐 그랬다. 그때는.
.
.
.
고등학교 첫 등교 후,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아마도 여자애들은 서로서로 잘 아는 사이였나 보다. 그래서 그런가 자신들끼리의 결속력이 뛰어났다. 혼자라서 제일 서러운 점은 체육 시간 때였다. 다들 짝을 이루며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데 나만 벽에다가 셔틀콕을 날리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서러운지. 나는뿌옇게 변한 시야를 알아차리고 서둘러 강당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화장실에서 펑펑 눈물을 흘리며 나는 원망의 대상을 죄 없는 사람에게 돌렸다. 누구겠는가. 우리 반에서 내가 예전에 알던 사람은 민윤기뿐이었는데. 나는 화장실에서 민윤기에 대한 저주를 실컷 날리고 후련해진 마음을 안으며 다시 강당으로 들어갔다. 하하, 벽에다가 셔틀콕 날리는 것도 너무 재미있네. 게임하는 기분이야.
.
.
.
지옥 같았던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고 꿀 같은 하교 시간이 찾아왔다. 야자는 2학기부터 시작한다니까 빨리 끝나는 1학기를 알차게 즐기겠어.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멈칫했다. 칠판에 적혀있는 내 이름. 그렇다. 나는 이번 주 주번이었다.
"떡볶이 먹으러 갈까?"
"오케이. 나 완전 잘하는 집 알어."
...나도 떡볶이 킬러인데. 나는 너보다 더 잘 아는데. 나는 혼자 바닥을 쓸면서 집에 가는 아이들을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니, 주번은 두 명이잖아. 근데 왜 나는 혼자야? 왜 여기서도 나는 혼자냐고! 혼자라는 단어에 신물이 난 내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교탁 위에 놓여져 있는 출석부를 펼쳤다. 내가 27번이니까. 28번이랑 같이 주번 활동을 해야 하는 거지? 씨, 28번 누구야. 선생님께 이를 거야! 28번의 이름을 단박에 찾은 나는 출석부를 도로 접고 교탁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28번은 우리 반에서 소위 잘나간다는 여자애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잘 못 걸리면 작살이지. 지금도 작살났는데 여기서 더 작살날거야. 나는 청소 도구함에서 대걸레를 꺼내 들었다. 시발, 인생 참 좋같... 아니 아니. 참 좋다.
.
.
.
모두가 다 가고 텅 빈 교실 안. 내가 대걸레질을 하는 소리가 빈 공간을 울렸다. 분명히 대걸레를 빨아왔는데 왜 바닥에 구정물이 고여있을까. 그게 왠지 모르게 내 앞길을 예측하는 징조 같아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눈물샘이 고장 나기 시작했다.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내 시야에 검은색 삼선 슬리퍼가 보였다. 슬리퍼 크기가 큰 거로 봐서는 남자애가 분명했다. 살짝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김여주."
"......"
왜 인제야 아는 척하고 난리야. 이미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내가 대걸레를 다시 빨려고 오른쪽으로 가려는데 그런 내 앞을 민윤기가 막아섰다. 허, 왼쪽으로 가면 되지. 내가 왼쪽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또 그 앞을 민윤기가 막았다. 그렇게 여러 번. 민윤기와 나의 방향 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민윤기가 무력을 사용했다. 대걸레를 잡고 있는 내 손을 제 손으로 붙잡아 버린 것이다. 팔을 버둥거리며 그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써봤지만 한창 파릇파릇한 남자애의 힘을 내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잠잠해지자 민윤기의 인상이 살짝 펴졌다. 그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김여주."
"......"
"김여주. 대답."
"......왜."
"왜 혼자서 이러고 있어."
민윤기의 말에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이성이 끊어져 나갔다. 너무 창피했다. 너한테는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답 해야 해?"
"......"
"그래, 나 우리 반 왕따여서 혼자 청소하고 있었어. 아무도 안 도와주고 쌩하니 나가버리더라. 나는 순간, 내가 투명망토라도 두른 줄 알았는데 네가 나한테 말 거는 거 보면 그건 아닌가 보다. 그럼 애들이 왜 그러지?"
"......"
지난 일주일간, 나는 다른 애들과 친해지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은 떨떠름한 표정과 단답형의 대답. 그뿐이었다.
"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웃어 봐."
"......뭐?"
"웃으면서 다녀. 짹짹아."
"......"
멍청이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민윤기의 어처구니없는 해결책에 위안을 얻었다.
"내가 일주일간 쭉 지켜봤는데 네 표정 너무 굳어있어. 완전 무섭다고."
"......"
일주일간, 나를 지켜보고 있었구나.
"내가 말했지. 네 얼굴이 너무 압도적이라서 다른 애들 다 이긴다고. 그걸 이런 식으로 써먹으면 어떡하냐?"
"......"
나는 네가 나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줄 알았어.
"...야, 야! 웃으랬더니 왜 울어?!"
"......"
민윤기가 내 앞에서 허둥지둥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거울 옆에 붙어있는 휴지를 여러 겹 뜯어서 내게 내밀었다.
"혼자 청소해서 그래? 야, 힘들었긴 했겠다. 고생했네. 대걸레질은 내가 할게."
"......"
"뭐야, 아니야? 그럼 왜 그러는데? 너 무시했던 애들 혼내줄까?"
"......"
"이것도 아니야?"
"......떡볶이."
"어?"
"떡볶이가 먹고싶, 흐어어어엉."
민윤기가 내 울음 섞인 목소리에 벙찐 표정을 짓더니 곧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먹으러 가자. 그러니까 그만 울어라. 내 앞에서 한 번도 운 적이 없는 애가 우니까 되게 당황스럽네."
"...내가 잘 하는 집 알아. 여기 아무도 모르는 곳이야."
"오, 그럼 내가 두 번째로 아는 사람이 되는 거네."
"응, 근데 다른 애들한테 알려주지 마. 너만 알고 있어."
오냐, 나만 알고 있을게. 민윤기가 바닥에 고인 구정물을 말끔히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난리가 끝나고 민윤기와 함께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짹짹아."
"응."
"넌 웃는 게 제일 예뻐."
"......"
두근두근.
"어? 네가 말했던 떡볶이집이 저기냐? 오, 간판만 봐도 맛있어 보이는데."
"......"
"내가 사줄 테니까 이거 먹은 값. 내일 꼭 해라. 알겠냐?"
도서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나는 중학교 때 유행했던 인소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지금 내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아주 잘 알았다. 이건 아마도...
우정이 짝사랑으로 변하기까지.
단, 한 걸음.
[작가 주저리]
무리해서 올려봐요. 헉헉... 피곤하다^^
나이를 먹을 때마다 제 체력에 한계가 오는 게 느껴져요.
그런데 윤기 글인데 윤기 생일날 맞춰서 올리네요? 기분이 좋아요. 뿌듯하고.
풍악을 울려라!!!!!!
아, 이건 1번이에요!
1번과 2번이 추천 수가 동점이었는데 둘 다 쓰기에는 제 멘탈이 탈탈 털리니까 네이버 뽑기를 통해서 한 개를 뽑았어요.
그렇게 해서 1번이 당첨된 겁니다! 와아아아.
이제 옆.옆.옆과 우.짝.변 (별 걸 다 줄이네요, 저.) 둘 중 하나 여러분들의 반응을 보고 연재를 쭉 이어갈 거랍니다 케케.
과연 뭐로 연재할지 여러분의 마음에 든 글을 알려주세여!
전 방전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