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그대의 부인으로서 한마디 올리지요. 절대 그대는 저를 얻지 못 할 것입니다. ”
“ … …. ”
“ 그러니, 두 번 다신… 정국의 몸에 상처 하나 내지 마십시오. 국서. ”
그 국서의 자리마저 잃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이름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주먹을 꽉 쥐어 보이던 태형은 고개를 떨구었다. 화려한 비단 의복을 휘날리며 그의 앞에서 떠나는 이름이었다. 태형이 그녀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은 망국(亡國)의 왕자였고, 이름이는 현(炫)나라의 화선(花善)여황이었다. 자칫하면 노예(奴隸)보다 못한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어쩌면 날이 잔뜩 선 검으로 목을 베어버릴지도. 조갑(爪甲:손톱 또는 발톱)으로 깊게 짓눌려버린 손바닥에서는 검붉은 혈이 세어 나오고 있었다.
“ …통증이 이리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
태형은 국서전(國壻殿)에서 나와 화선전(花善殿)의 반대로 가면 있는 연못으로 걸음을 떼었다. 자신의 걸음을 쫒아오는 궁인들을 물러가게 한 뒤에 말이었다. 일각(15분)정도를 걸어 오니 보이는 잔잔한 물결에 미소를 띄어본다. 좀처럼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궁 안에서 유일하게 태형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연못 안에서 헤엄을 치는 어개(魚介)들을 따라서 태형은 연못 주변을 걸었다. 살랑이는 바람에 태형의 머리칼이 바람을 따라서 흩날린다.
이름이 태형을 만나고 있는 동안 정국은 통증이 조금은 멎었는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주던 어의들을 물러가게 한 뒤에 침상에 걸터 앉아 상처에 감긴 붕대를 바라본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에도 하얗던 헝겊에도 선붉은 피가 물들어가고 자연스레 찌푸려지는 눈살이었다. 분명 기절을 하기 전에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듯 싶었는데, 처소 바깥에 하나 둘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아하니 술시(19-21시) 정도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답답한 것을 워낙 싫어하던 정국이었기에 통증이 가라앉지 않은 몸을 이끌고 침상에서 내려와 의가(衣架)에 걸려있는 자신의 의복을 입는다.
정국이 매듭까지 모두 지어 처소에서 나가려고 문을 열자 양동해(凉東海) 가득 물을 받아온 어의는 그 앞을 막아섰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폐하의 명이십니다. 어의의 말을 무시하고 가려다 폐하라의 명이라는 말에 멈춰서는 정국이었다. 뒤를 돌아 여전히 양동해를 들고 있는 어의를 바라보며 정국이 물었다. 폐하께서 알고 계시느냐? 정국의 물음에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내놓았다. 폐하께서 지금 국서전에 계십니다. 어의의 말에 정국은 동자를 굴렸다. 폐하가 국서전에 갈 일은 그리 많은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서전에 들르신 거라면 분명….
“ 가봐야합니다. 폐하께선 무언가를 오해하고 계신듯 합니다. ”
“ 하지만…. ”
정국은 어의의 말이 끝이 나기도 전에 화선전에서 나와 국서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통증이 심히 나타났고, 그에 눈살을 찌푸리며 힘겹게 걸음을 떼어내다 결국 한계에 도달했는지 담에 손을 얹고 잠시 쉬고 있었을까. 정국의 앞에 밝은 빛이 가까워지기 시작하였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당시(瞠視)하는 이름이 있었다. 이름이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붙잡고 정국에게 한걸음 달려와 정국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으며 얼굴을 살핀다.
“ 괜찮아? ”
“ 덕분에 괜찮습니다. ”
“ 나인들은 물러가거라, 정국은 내가 살피마. ”
이름이의 말에 뒤에서 등불을 들고 있던 나인들이 발길을 옮겼고, 그제야 어둠이 내리 앉는다. 불빛 하나 없는 담벼락에 기대어 미소를 띄우고 있는 정국과 달리 다시금 정국이 쓰러질까 두려워 일시가 급하게 처소에 데려가고 싶은 이름이었다.
“ 국서전에 다녀오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 … …. ”
“ 이건 부군께서 하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부군은 저를 지켜주시다가 해를 입었습니다. ”
“ … …. ”
“ 폐하… 그만 부군께 마음을 여시면 안되겠습니까? ”
“ 감히 네가, 간섭할 일 아니다. ”
폐하께서 저를 총애해주시는 걸 압니다, 허나… 부군은 폐하의 국서이십니다. 이름이는 정국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떼어낸다. 현나라의 황제을 지키는 무사가 아직도 심성이 여린 계집 같아서야 되겠느냐. 보기보다 멀쩡한 것 같으니 혼자 가거라. 이름이는 정국의 앞에서 등을 보였다. 왜 이리 태형에 대한 이야기만 들으면 저리 날이 잔뜩 선 채로 행동을 하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름이의 측근인 정국 마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대로 이름이는 정국에게서 멀어져갔고, 정국은 다시금 몰려오는 통증에 상처를 부여잡고 담벼락에 기대었다. 날씨 만큼이나 마음 한 구석이 시린 날이었다.
이름이는 정국에게서 멀어진 뒤 곧 바로 침소로 향할 줄 알았던 걸음이 어느샌가 국서전 뒷편에 있는 연못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섬을 느낀 이름이는 돌아서 다시 화선전으로 향하려던 그때, 연못 앞 모래바닥에 앉아 연못 안에 있는 어개들을 보며 독언을 하는 태형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따라 왜 이리도 태형을 자주 보는지 어딘가가 불편해 보이는 기색을 표해내며 이름이는 발길을 돌렸다.
“ 폐하…. ”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니 모퉁이 부근에서 현나라를 대표하는 푸른색의 비단이 사라지는 것을 본 태형은 바닥에서 일어나 모래를 털어낸다. 분명 저 비단옷을 입을 사람은 여황폐하, 단 한 명 뿐일 것이라 생각하여 뒤를 쫓으려고 하였지만, 아까 자신에게 악을 품으며 말을 하던 이름이의 모습이 떠올라 걸음을 떼어내지 못하고 그곳에 서서 이름이 사라진 곳을 주시한다. 팔을 곧게 뻗어 보았지만 닿질 않는다.
/
“ 민심을 헤아리시고… ”
‘ 합방일이 잡히셨습니다, 폐하. ’
용상에 앉아 대신들이 보고하는 말을 듣다 문득 떠오른 고 상궁의 말에 가지런하던 자세가 흐트러지고 정신 또한 그쪽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송구하오나, 폐하. 강 좌상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강 좌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다시 곧게 펴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샌가 자신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름이는 어떠한 이유로 저러고 있는 것인지 모르면서도, 그리하여라. 이 대답을 원하고 무언가를 말을 꺼내었을 터, 이름이의 말에 머리를 조아리던 강 좌상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이름을 바라보며 예를 표한다.
“ 이만 물러가거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을 내지. ”
“ 예, 폐하. ”
편전을 가득 채우던 대신들이 모두 편전을 떠난 뒤 여전히 용상에 앉아 관자놀이를 꾹 누른다. 합방일이라, 합방… 국서와의 합방이라니. 꽤나 골치아픈 일이 되어버렸는지 이름이는 용상에서 일어나 곧바로 화선전으로 가 의복을 갈아입고 잠시 어디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정전(奏政殿)에서 나오자 주정전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정국이 고개를 돌려 이름을 보고는 곧바로 이름이의 옆으로 다가옴으로 이름이의 생각은 곱게 접혔다.
“ 오늘 많이 편찮아 보이십니다. ”
“ 괜찮아. ”
“ … …. ”
“ 정국아. ”
편전을 지나 화선전을 가기 전에 건너야 할 다리가 하나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면 이름을 닮아 화려한 화선전이 보일 것이다. 허나, 다리를 건너다 말고 이름이는 자신의 뒤를 묵묵히 따라오던 정국을 불렀고, 정국은 그 뒤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이름이의 화려한 장신구들이 꽂힌 머리를 바라보며 대답을 하였다. 그에 이름이는 몸을 돌려 정국의 뒤로 보이는 고 상궁에게 눈짓을 하자 고 상궁은 고개를 숙여 이름이에게 예를 표하더니 그대로 뒤를 따라오던 나인들을 데리고 사라져 버린다. 화유각(和柔閣)의 다리에는 정국과 이름 둘만 남게 된다. 이름이는 다리 위에서 천천히 몸을 움직이더니 연못 아래에서 헤엄을 치는 물고기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 …밀어다오. ”
“ … …. ”
“ 연못 아래로, 밀어줘. ”
“ 폐하. 제가 어찌 감히 폐하께 해가 되는 행동을…. ”
“ 그렇다면 네가 나를 구하러 오거라. ”
이름이는 그대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다. 아아, 그토록 국서와의 합방이 싫었던 모양이었을까. 연못에는 큰 굉음(轟音)이 울려 퍼졌다. 정국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차고 있던 별운검(別雲劍)을 다리 위에 내던지고 다리 아래로 이름이 뛰어 내린 것처럼 뛰어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정국이 몸을 내던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못에는 다시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못으로 뛰어든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 … …. ”
연못에 뛰어든 사람은 다름아닌 이름이 그리 싫다 칭하던 국서 태형이었다. 물 밖으로 나온 태형은 다리 위에서 여전히 당황한 기색을 표해내고 있는 정국을 원망하는 안광(眼眶)으로 바라보았고, 정국은 한걸음에 다리에서 내려와 태형이 올라온 곳으로 향했다. 물에 그리 오랜 시간 있던 게 아니라서 괜찮으실거야. 태형의 말에 정국은 심히 뛰던 심장을 달래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태형의 품에서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는 이름이었고, 태형은 빨리 찬 바람이 부는 곳에서 옮겨야겠단 생각으로 이름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그에 정국도 정신을 바짝차리고 태형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태형이 이름을 안아들고 한 걸음 떼며 정국을 향해 말을 건넨다.
“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
“ 허나, 저는…. ”
“ 너는 그저 호위무사잖니. ”
“ … …. ”
아무리 여황폐하가 싫다고 하셔도 태형은 국서였다. 태형의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고 정국은 한 걸음 물러나 길을 터준다. 정국은 자연스레 물리는 아랫입술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끝까지 이름이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둘의 모습은 퍽이나 이질적이며 조화로웠다. 태형은 이름을 안아 든 채로 화선전을 향해 움직였다. 아무래도 이름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의 처소임을 알게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의 앞에서 떠날 것이 염려되어 그런 것 같았다. 화유각을 빠져나오자 하늘에선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고, 화유각 주변을 돌던 나인들이 태형과 이름을 발견하고는 한 걸음에 달려간다.
“ 폐하께선 어쩌다가…. ”
“ 폐하는 제가 모실테니 화선전으로 어의를 불러주세요. ”
“ 예, 부군…. ”
나인들에게도 꽤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여황 폐하와 국서와의 만남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던 것이 아니었기에, 태형의 말에 말을 더듬으며 머리를 숙이는 나인들이었다. 태형은 혹여나 이름이 눈을 맞아 심한 고뿔에 걸릴까 걱정이 되었는지 화선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바삐 움직였다.
화선전에 들자마자 그 앞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고 상궁이 태형의 품에 안긴 이름을 보고는 한 걸음에 달려가 침소로 향하는 길을 안내했다. 침소의 문을 열자 상궁은 금구(衾具) 걷어내고 그 위에 이름을 눕히게 한 뒤에 상궁은 태형을 향해 의복을 갈아입혀야 하니 잠시 나가달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침소 밖으로 나오자 벌써 어의를 데리고 온 것인지 아까 본 나인들과 함께 오는 어의였다. 태형은 그런 이들을 보고는 문 앞을 막아섰고, 태형의 행동에 의심을 갖다가도 뒤이어지는 말에 잠시 물러가보겠다는 말과 함께 화선전에서 나간다.
일각 정도 기다리고 나니 고 상궁이 나왔고, 태형은 그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춰 서서는 고 상궁을 불러낸다. 화선전 밖에 어의가 기다리고 있으니 불러주시게. 태형의 말에 고 상궁은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화선전 밖으로 나간다. 처음 들어와 보는 공간에 태형은 동자를 굴려 이곳저곳을 탐색하다가도 침상에 누워 잠에 들어있는 이름을 바라본다.
“ 그리도 싫으셨습니까. ”
“ … …. ”
“ 국서 폐하, 어의를 데리고 왔습니다. ”
“ 들라고 하여라. ”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은 태형은 자신도 물에 흠뻑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기색을 뽐내며 이름이의 침소로 들어온 어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린다. 어서 폐하를 살피거라. 어색한 어투로 말을 꺼내던 태형이었지만 어의는 그럼에도 저의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내쉬는 이름이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한다. 맥을 짚어보더니 조심스레 다시 손목을 금구 안으로 넣으며 태형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 한나절 정도 푹 쉬시면 괜찮아지실겁니다. ”
“ …그렇담 다행이군요. ”
“ 국서께서는 괜찮으십니까. ”
“ 나는 괜찮습니다. 이만 물러가도 좋습니다. ”
“ 예, 폐하. ”
어의까지 나가고 나니 적막함으로 가득 채워지는 화선전의 침소였다. 태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이름이의 침상 주변에 있는 성냥을 집어 들어 침소 곳곳에 배치 되어있는 촉(燭)에 불을 붙인다. 그리곤 성냥에 붙은 불을 끄고 나니 조금은 환해진 침소 안이었고, 태형은 침상 끝에 걸터 앉아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름을 바라본다. 저의 앞에만 서면 달라지는 기색이었는데, 이리도 평온한 기색을 보이고 있으니 태형의 입장에서는 섭섭하기 그지 없었다.
“ …정국…아. ”
뒤척이던 이름이의 금구가 반쯤 걷어내지자 태형은 다시 목까지 덮어주었고, 침상 밖으로 튀어 나온 이름이의 팔을 다시 금구 안으로 넣어주려고 했을까. 태형의 손을 꽉 잡으며 정국의 이름을 뱉어내는 이름이었다. 태형은 그 손을 빼내려고 하였지만 그럴 수록 더욱 꽉 잡아오는 악력에 붙잡힌다. 폐하, 저는 정국이 아닙니다. 태형이 잠에 든 이름이에게 말을 해보아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역시 몽중(夢中)이시군요.
“ 정국이, 많이 부럽습니다. ”
이런때 아니면 언제 제가 감히 폐하 앞에서 속내를 쉽게 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태형은 밤이 깊어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