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16
w.규닝
16. Lily-of-the-Valley
겨울이 지나고, 두텁게 입고 다니지 않아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날이 풀렸다. 약속처럼 무섭게 엄습하는 것들을 모른 척 할 수 없을만큼 따뜻한 계절은 오고 있었다. 꽁꽁 얼어 움직일 생각조차 없던 전깃줄이 잔바람에도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다가 반짝 든 생각이었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것을 숨겨야 할 때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잃게 되므로.' 어쩌다가 스치듯이 읽어 황급히 덮고야 말았던 어느 책의 한 구절은 그 뒤로, 시도때도 없이 성규의 인생을 간섭하려 들고 있었다.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뇌리 속에 박혀 열병처럼 어딘가를 뜨겁게 만들어주는 그런 것. 무언가를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소리나게 덮고나서야 가슴을 짚어봤자 이미 늦은 후였다. 그래서 성규는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몇 장 되지 않는 종이 뭉치들은, 평생을 떠안고 가야할 만큼 잔인하고, 또ㅡ들키지 말아야 할 자신만의 치부를 고발하듯 잔뜩 담아내고 있었기에.
어쩌다가 문득, 멀리해야 함을 느꼈다.
모든 것을 잊게 만드니까, 잊어버린 채로 살고 있었다. 그것은 너의 잘못도 아니었으며 나의 잘못 또한 아니었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행복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성규는 자다가도 수십번은 몸을 일으켜 그렇게 앉아 있었다. 괜한 나의 삶을 너에게 떠넘겨서는 안되는 건데, 네가 자꾸 나를 잊게 만들어오고 있는 것이라고. 아주 위험한 불장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저 웃으면서 살고싶다는 욕심만 강했다. 성규가 다리 맡을 덮고 있던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당겨 파고들었다. 잊게 만들었어도 잊으면 안되었던 것을 잊고 있어서, 이상한 숲 속을 걷다가 문득,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깨어나는 어느 동화 속의 오즈처럼 잠 못 이루게 만드는 참회만이 저를 찾아왔다.
이렇게, 씨발스러운 천사도 있냐.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저를 천사라고 불러오며 제 품에 안기게 만드는 남우현은 지독했다. 사실은 마음 속부터가 수백번은 넘도록 말해오고 있었다. 천사라는 말로 나를 매도하려 들지 마. 자꾸만 그렇게 말도안되는 유혹으로 잊게 만드려 하지 마. 간사한 마음은 그럴때마다 나는 웃고 싶다고 말해오니까. 성규가 언젠가부터 억지로 올리지 않아도 웃고 있는 저의 입가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렇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에 손을 가져다 대며, 나 왜 웃고 있는거야 생각하면 남우현은 뒤에서 저의 어깨를 안아왔다. 언제 일어났어. 잠에서 마악 깬 남우현은 아침부터 깨끗하게 머릿속을 비워둔다.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를 지워버리며 잊어버리고 살려 노력한 것일지도 모른다. 성규가 제 어깨에 와닿은 우현의 손을 잡아내리면서 중얼거렸다. 지랄. 그렇게…
껴안지 마.
그러면 우현은 그렇게 말해왔다. 좋으면서 괜히 그래. 정말이지 질리도록 웃어대면서.
근데 그게 매력이야. 김성규. 다물린 입술에는 또다시 익숙한 입술이 찾아들었다. 매번 너는 마법을 건다.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하니까 그러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입이 열리지도 못하도록ㅡ 혹시라도 찾아들까 미리서 병을 치료해버리는 약처럼.
그런 순간이면 아무래도 좋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심지에 불을 지펴놓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음에도.
* * * * *
성열은 호원과 동우가 그랬던 것처럼 옥탑방에서의 적응이 빨랐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꾸 성규더러 소세지 형, 소세지 형 하는 통에 살짝 엇나가려 한 것을 제외하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우현은 어제까지도 성열이 어질러 놓고 간 트럼프 카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서는 화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원과 동우가 필요 이상으로 성규와 살갑게 지낸대도 괜찮았다. 괜히 툴툴대던 이성열이 옥탑방에 멋대로 출입하게 되던 날들도 전부 괜찮았다. 우현이 오후 7시를 향해 가는 시계를 쳐다보다 빙긋이 웃었다. 지금은 저녁이고, 녀석들은 없다. 지금만큼은 온전히 저의 시간이니까. 우현이 생글거리는 입을 옷소매로 막아보았다. 그래 입. 입을 맞출 수 있는 것도 생각해보면 오직 저 뿐이기도 하고. 녀석들이 아무리 천사랑 친해졌다 해도 역시 제가 일등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안심 비슷한 성취감이었다.
"당신은 나의,"
우현이 티비 옆에 놓아둔 화분에 하얀 리본을 달아 매면서 즉석에서 지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성규에게 선물했던 꽃과 똑 닮은 하얀 리본을 샀던 우현은 화분 둘레에 긴 끈을 매달아놓은 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부를, 까지 노래를 지어 부르던 우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만족! 우현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온도계를 빼내어 화분 속의 흙더미에 쿡 박아넣었다.
"이름은, 규브리엘."
우현이 작게 키득거렸다. 니 이름이 가브리엘이 아니니까, 화분이라도 천사 이름으로 지어야겠어. 미리 사 온 이름표 스티커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규브리엘,이라고 적어넣은 우현이 매달은 리본 아래에 꾸욱 눌러 붙였다. 설마 멋대로 이름 지어놨다고 또 화내지는 않겠지. 그런 안일한 염려와 함께 메모지를 꺼내 든 우현이 내려놓았던 펜을 다시금 들어올렸다.
「규브리엘이 잘 사는 방법. 2~3일에 한 번 꼴로 물주기. 까먹으면 절대 안됨! 흙 온도는 22º가 가장 적당하니까 온도계 봐가면서 물 줘야함. 화이팅. p.s물 주는 건 안 도와줄거야. 내가 선물한 거니까 니가 키워야 돼.」
우현이 딱 알맞게 적어 넣은 메모지를 쳐다보다가 흡족한 미소를 띠기도 잠시, 까먹은 말이 있어 아랫쪽 작은 공간에다 두번째 p.s를 꾸역꾸역 적어 넣었다.
귀찮다고 죽이기 없기.
김성규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으니까. 우현이 괜한 입을 삐죽여 완성한 메모지를 화분 뒤쪽으로 밀어넣었다. 마지막으로 까먹은 하트는 더이상 그릴 공간이 없어 온도계 아무 곳에나 허겁지겁 그려 넣은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렇게 한참을 규브리엘과 단 둘이 옥탑방에 남아있기를 두어시간 남짓 되었을까, 삑삑삑삑,익숙하게 들려오는 도어락소리에 거실 바닥에 부비고 있던 얼굴을 들어올린 우현이 김성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심심해서 아사할 뻔 했잖아!"
"심심한거랑 아사랑 무슨 상관인데."
현관문에 들어서자 턱 끝까지 올렸던 겉옷 지퍼를 끌어내린 성규가 비웃음을 흘렸다. 뜻이나 알고 말하는건지. 그렇게 대충 신발을 벗으면서도 현관 앞까지 달려와 저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우현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너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늦게 들어오진 않았던 거 같은데. 이호원 장동우 그 씨발새끼들이 그렇게 좋아? 우현이 집요한 눈을 들어 무심한 성규의 눈에 억지로 저의 얼굴을 맞춰 왔다. 어? 대답해. 이제는 어느 정도 구속까지 하려 드는 우현이 웃겨 성규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이게 진짜 약을 처먹었나. 마음 속으로 피어오르는 욕지거리에 헛웃음만 내뱉은 성규가 그대로 우현을 지나쳐 소파 위로 몸을 뉘였다.
"나 지금 피곤해."
"너 똑바로 대답 할 때까지 안,"
"말로 할 때 대가리 치워. 피곤하다고 몇 번 말해야 알아들을래?"
이 거머리같은 새끼야. 성규가 제 발치로 달려드는 우현의 이마를 왼발로 막아 밀었다. 하여간, 한 번 말해선 들어먹질 않지. 성규가 저만치 나가떨어진 우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구들은 꼭 저같은 놈들로만 사겨가지고는 이렇게도 날 힘들게 한다. 성규는 이미 우현의 분신들과 놀다 온 것만 같은 기분에 녹초가 된 몸을 소파 깊숙히에 묻었다. 하지만 그에 질세라, 우현이 몸을 일으켜 성규의 얼굴 부근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뭐야, 자지 마.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우현이 뾰루퉁한 목소리로 성규가 누운 소파 위에 머리를 기댔다.
"얼마나 재밌게 놀았길래 이래. 너 진짜 나보다 이호원 장동우가 더 좋냐?"
우현이 손을 들어올려 추욱 늘어진 성규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걔네가 평상에서 삼겹살 구워먹재."
"…니가 먹고 싶은거지."
"아니야, 걔네가 그랬어."
"구라 즐이야."
"그래 사실 나도 먹고싶긴 해. 뭣보다 재밌을 거 같아서 좋아. 콜?"
우현이 한풀 죽은 목소리로 성규가 앉은 소파 맡에 볼을 비비적거렸다. 그에 성규가 코를 찡긋하다가 픽 웃었다. 순순히 그렇다고 하는거 봐. 단순하기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성규가 응,하는 대답을 뱉었다.
"마음대로 해. 상관 없어. 근데,"
"응."
"너 생각해보니까 왜 반말이야. 니 친구들은 전부 형이라고 부르는데."
건방지게. 성규가 우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밀어뜨렸다. 그에 우현이 타격을 입은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인상을 구겼다.
"새삼스럽게 이제와서 뭐. 그리고 걔네랑 나랑 비교하지마. 이미 비교 할 수도 없을만큼 난 특별하니까."
"누구 맘대로 특별이야. 미친놈아?"
성규가 우현의 자신만만한 말투에 헛웃음을 지어보이며 머리를 들어올렸다. 이게 진짜 점점 기어오르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멀찍이 떨어졌던 우현의 얼굴이 바로 앞까지 확 다가온 것은. 얼굴을 확 당긴 우현은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새끼 진짜 새티스트인가봐, 욕 먹는 걸 즐기는 것 같아. 성규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ㅡ얼굴 좀 저리 치우라는 말을 하려 입꼬리를 달싹이려고 했을 때 먼저 선수를 친 것은 우현이었다. 있잖아,하며 운을 뗀 우현의 얼굴은 여전히 싱글벙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차피 걔네는 이제 잘 못올걸. 개강준비하느라 바빠."
우현이 여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오랜만에 처음처럼, 둘만 있을 수 있게 됐다고. 소파 위에 턱을 기댄 우현이 달뜬 목소리로 물어왔다. 좋지?
성규의 눈은 느리게 깜빡였다. 개강…이라고.
"넌."
"응?"
"너도 바쁠 거 아냐, 이제."
그렇게 말한 성규는 소파 위에 뉘였던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동그란 눈으로 우현을 내려다보던 성규가 살짝 고개를 숙였고, 마냥 밝은 눈을 하고 성규를 올려다보던 우현이 은근슬쩍 성규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배시시 웃었다. 있지, 김성규. 우현이 숙여진 성규의 고개를 돌려보려 이름을 불러왔다. 성규가 나지막한 우현의 목소리에 제 옆자리로 힐끗,시선을 던졌다.
난 안바빠. 성규의 말에 운을 뗀 우현이 어깨를 으쓱하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언제 말할까 싶었더니, 이렇게 말하게 되네. 오랜만에 저에게 조심스러운 시선을 주는 성규에 살짝 웃은 우현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것만큼, 니가 날 좋아하고 있을거라곤 생각 안 해."
"……."
"아직까지는 내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조차 보이기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되도록이면 먼저 말도 걸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나랑 같이 티비를 보다가 문득 옆으로 떨어져 앉는 것도, 내가 현관에 들어서면 일단 멈칫부터 하고 본다는 것도 다 알아."
"……."
"특히 요즘따라 더 그러는 것도 알아.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나한테서 피하려는 것도 다. 근데 그냥 그러려니 하려고, 내가 더 좋아하면 되는거니까."
우현이 아직도 저를 보지 않고 있는 눈과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숙였다. 성규가 제 표정을 확인하려는 집요한 눈과 눈을 마주쳤다.
"오아시스는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말라."
"……."
"너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아서 갈증이 나."
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가 성규의 귓가를 괴롭혔다. 세 번째. 술에 취할 때면 어김없이 진지해졌던 남우현과 마주할 때면 늘 그렇듯이, 쿵 떨어지는 가슴을 느끼며 눈을 들어올린 성규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술김도 아닌데 남우현은 진지하다. 삼겹살 얘기를 잘만하다가 갑자기 무슨. 성규는 어딘가 모르는 가슴께 한 구석이 콕콕 쑤셔오는 것을 느끼면서 입술을 물었다. 이런 분위기이면 으레 그랬듯이, 평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묘해지려는 성규의 표정을 느낀 우현이 진지했던 저의 표정을 먼저 풀었다.
"근데, 오아시스는 그래서 매력적인거잖아. 상관 없어."
우현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성규의 얼굴을 마주하다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김성규는 늘 그랬다. 조금만 대화가 진지해진다 싶으면 표정부터 굳히고 앉아있는 거. 우현이 성규의 표정을 풀어보려 꼿꼿히 세웠던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내가 진짜 믿는 구석은 뭔지 알아?"
"…뭐?"
"넌 아마 나랑 백년해로할걸."
우현의 말에 성규가 허탈하게 웃었다.
"무슨 근거로."
"시간이 말해주지."
"……."
"봐봐, 너랑 나랑 알게 된 지 3개월 정도 접어들어가. 되게 얼마 안됐어."
12월, 1월, 2월. 우현이 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여태껏 함께 했던 달들을 상기시켜주었다. 우현이 세개의 손가락을 성규의 눈 앞에 펴들고 흔들었다. 보여? 3개월.
"근데 이제 2개월 남았어."
우현이 다른 손으로는 브이자를 만들어 성규의 면전에 대고 쑥 내밀었다. 이것도 보여? 마치 유치원생을 다루는 듯한 말투와 함께 실실 웃어보인 우현이 대답 없는 성규에게 반응을 재촉했다.
성규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밝게 말해오는 우현의 목소리와 유치한 손가락 갯수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으며 몇 개월이니, 또 몇 개월이니 하는 우현의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뭐가 남았다는거야, 꼭 시한부처럼. 성규는 저에게 설명하려 드는 우현의 손을 옆 쪽으로 밀어내면서 가라앉은 눈으로 우현의 얼굴을 주시했다.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장난스러웠던 우현의 말 위로 더없이 진지한 성규의 목소리가 얹어졌다. 그와 동시에 실실 웃던 우현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3개월동안 벌써 이만큼이나 잘해왔잖아."
"……."
"2개월이면 넌 이제 나한테 빠지고도 남을테니까 안 불안해. 그래서 그거 믿고 휴학했어."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한부처럼 몇개월이니 하고 있는 것은 녀석이 아니라,
"군 휴학."
저의 얘기였다는 걸. 잊고 사는 생활 속에서 다시 한 번 잊고있었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순간이었다.
우현의 입꼬리가 얄쌍하게 올라갔다. 그래서 걔들이랑 다르게 난 안 바빠. 옥탑방에 붙어있을거야. 무슨 뜻인지 이해 가냐고 물어오는 입술은 그 순간 생각보다 독한 실타래가 되어버렸다. 아무렇게나 엉겨버린 실타래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뒤엉켜지며 자잘한 생각들을 한층 더 복잡하게 흐트려놓고 있었다.
분명 모르지는 않았다. 잊고 살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전부 알았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를 찾아온다. 여느 영화가 그려내듯이.
우현의 말대로 꿈속을 헤매다 문득 정신이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혹은 마약에 취했다가 이래서는 안된다며 고개를 젓는 누군가의 순간이라던지. 성규가 어느새 멍해진 눈으로 초점을 흐렸다. 군 휴학. 남우현은 2개월이 남았다고 했지만 정작 시한부인 것은 자신이었다. 남은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성규가 반응이 없는 저의 눈 위로 손바닥을 휘휘 저어대는 우현을 느끼다가 힘없이 웃었다.
그러니까, 천사니 오아이스니 하는 말로 나를 매도하지 말지 그랬어. 별 거 없는 내게 그런 멋진 말 같은 것은 해주지 말지 그랬어. 너는 나의 보잘것없는 옥탑방에 의미를 부여했고, 내가 사는 이곳을 성으로 만들어버렸잖아. 성규에게는 제 앞에서 무어라 떠들어대는 우현의 목소리가 음소거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무렇지 않게 2개월이 남았다고 말해오는 너는, 결국은 뭐가 남게 되는지를 모르고 있는거겠지. 그래서 결국엔 너무 눈이 부셔서ㅡ 알고 있는 것들을 외면하려 눈이 멀어버렸다. 결국엔 넌 끝까지 씨발새끼야. 성규는 꾹 다물은 입 속으로 비웃음이 섞인 욕지거리를 뱉었다. 성규가 제게 상기시켜오는 '군대'라는 단어와 명수의 군입대 날짜가 한꺼번에 뒤섞여버려 복잡해져오는 머리에 표정을 굳혔다.
"야, 표정 왜 그래."
"……."
"꼭 안 기다려 줄 사람처럼 그런 표정 짓지 마."
"남우현."
안 기다려 줄 사람처럼, 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너와 만나기 전부터 정해진 내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우현이 눈에 띄게 가라앉은 얼굴로 성규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이렇게 진지한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워낙 감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니까, 이것도 그저 고개만 끄덕이다가 피곤하니까 꺼져,뭐 이런 말이 나올 줄로만 알았다. 우현이 저의 이름을 뱉어 놓고도 한참동안이나 말을 잃은 성규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후에는ㅡ 에이, 왜그래애. 하며 말꼬리를 늘이려고 웃어보이려던 찰나였다.
"니가 언젠가 그렇게 말했었나? 천사가 지옥을 선물할 수도 있냐고."
"응."
"내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뜬금없이 과거의 일을 꺼내는 성규에 천연덕스러운 고개를 끄덕이던 우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반사적으로 되물어버린 우현의 목소리가 조용한 거실 위로 흩어졌다. 늘 틀어져 있는 티비 화면이 깜깜한 것 처럼, 거실 위의 공기마저도 깜깜하게 가라앉아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천천히 인상을 구기는 우현의 귓가에 아까까지는 들리지도 않던 시계의 초침소리가 정확하게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째깍거리는 소음은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마저 칼날같이 부러지는 스타카토처럼 끊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침묵만 지키고 있기를 몇 분 째였다. 어쩌면 그 때부터 직감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부터 혹시나 하던 어떤 것은 이미 머릿속에서 기정사실이 되어 내려앉았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성규의 말은 단순히 군대를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의미를 넘어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도 직감적으로는 알 수 있는 그런 것. 우현이 묘하게 흐려진 눈으로 성규의 얼굴을 마주했다.
차라리 군대,기다리지 않을 거라고 말해. 그러면 나는 그게 장난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거고ㅡ그러면 우리는 평소처럼 따뜻한 옥탑방 안에서 뒹굴기만 하면 돼. 이상한 직감같은 거… 들게 만들지 마. 우현이 저도 모르는 새에 아랫입술을 지긋이 물었다. 그러니까, 김성규는.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넌 구원인데."
완벽하게 이상한 사람이다.
성규는 우현의 얼굴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것을 보다 눈을 감았다. 뒤이어 제 입술에 닿는 따뜻한 감촉에는 힘주어 쥐고 있던 주먹을 풀어 우현의 목 언저리에 팔을 둘렀다. 천사와 오아시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구원이라고 말해오는 사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어도 끝없는 찬사로 자신을 깊게 매도하려 드는 사람. 힘주어 감은 눈가가 뜨끈해지려는 것을 느끼다가 고개를 틀은 성규는 답답함에 소리없는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나누었던 대화와는 다르게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운 감촉은 생경하게도 전해졌다. 항상 이랬기 때문에 힘이 든다. 가야할 길에 비해 누리고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져서 무의식으로 힘들었었다. 이렇게 입술을 부딪혀 오는 남우현도. 성규가 제 몸을 넘기려 드는 우현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숨이 부족해져옴에도 우현의 입술은 떼어질 줄을 몰랐다. 마찬가지로 감긴 눈은 힘주어 감은 눈과 가까이에서 마주했으며 어느덧 소파 위로 눕혀져버린 몸 위에 저의 몸을 겹쳐오는 순간에도 깊게 들이쳐 올 뿐, 우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구원이라고, 남들이 말하는 천국을 넘어서 너는 이미 구원이라고 천번을 넘게 말해주고 싶었다. 제가 얼마나 내게 중요한 사람인지는 눈꼽만큼도 몰라 괘씸한,
ㅡ나의 연인에게.
*
김성규는 밖에 나가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 날 이후로 생긴 습관이었다. 제가 자신의 집에 머무르기 싫어하는 것처럼 성규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가는 발걸음이 귀찮다며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티비 보는 것만을 좋아하던 사람은 어느덧 바쁘게 나갈 채비를 하려 했다. 밥도 안먹고 나가게? 우현이 제가 만든 찌개를 식탁에 내려두며 의아하게 물었다. 그러면 겉옷을 챙겨입던 성규가 그저 그런 눈을 하며 회피하듯 대답했다. 그냥. 답답해서. 그렇게 성규는 우현이 자신을 따라오던 말던 먼저 현관 밖을 나서 가만히 자리에 서 있고는 했다.
그러면 우현도 곧이어 겉옷을 챙겨들고 발걸음을 같이 했다. 그 날 이후로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도 김성규는 제가 준비한 온도계니 쪽지니 하는 것은 발견조차 못한 것 같은 눈치였어도 괜찮다. 물을 주지 않아도 괜찮아. 우현이 살짝 벌어진 성규의 옷깃을 다시금 여며주며 생각했다. 그 날처럼 갑자기 당장이라도 변할것처럼 굴지만 않으면 돼.
군대라는 말은 일절 꺼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은 2개월, 적지 않은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많다고 생각하니까 조급하지는 않은 마음이었지만 성규는 달라보였다. 마치 전혀 기다려 줄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우현은 그럴 때마다 앞서 가는 성규의 옆자리로 보폭을 좁혀왔다. 같이 가자고. 우현이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걷는 성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면 잠깐이나마 조용한 눈은 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집 싫어.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번화가를 걷다가 뱉어진 말이었다. 우현은 투정부리듯이 작게 들려오는 성규의 목소리에 허리를 숙여 물었다. 알아. 우현이 성규의 앞쪽으로 멈춰 서며 밝게 말했다. 그럼 밤에 들어가면 되지 뭐. 어디 갈래? 성규는 우현의 발치만 쳐다보던 눈을 들어 우현을 바라보았다.
서점. 우현은 성규의 입에서 튀어나온 의외의 행선지에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서점? 조금은 큰 목소리로 물어오는 우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성규가 몸을 비켜 앞장 섰다.
"요즘 내가 잊고 사는 것 같아서."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제나 뼈저리게 아픈 말들만 담고 있는 것들이니까. 성규가 멈춰 선 우현보다 걸음을 바삐 하며 인파 속으로 몸을 돌렸다.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읽어보려 한다. 무엇보다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해주는 데에는 책만한 것이 없어서. 우현이 보폭을 크게 해서 성규의 옆자리를 따라잡으며 발길을 놀렸다.
의외네. 집에 책이 한 권도 없어서 책 같은 건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우현은 여전히 제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성규를 쳐다보다가 천사의 앞에서라면ㅡ 습관처럼 익숙해진 웃음을 흘렸다.
-
하지만 무엇보다 잔인한 것은
인생을 기술적으로 살아내려면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함께 있어서 기쁘다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잃게 되므로
-체사레 바베세
0214, |
0214, 더 발렌타인(Valentine 세륜 발렌타인ㅋ.ㅋ 에 올리는 0214 더 파라디 우왓그대 생일 축하해요!*=.=* 나 안까먹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