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대문이 부서져라 울렸다. 나는 급하게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문을 열었다. 푸른 밤공기. 그리고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으으… 왜 이렇게 문을 안 여나 했어. 우리 지호 샤워 중이었구나?”
밤중에 웬일이야. 나는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을 읊조리며 비틀거리는 김유권을 붙잡아 신발을 벗기고 집안으로 들였다. 어제 걸음발을 배운 사람처럼 김유권은 심하게 다리를 절었다. 그의 무릎 부분이 피로 흥건했다. 술 먹고 넘어졌구나. 나는 혀를 차며 늘어지는 유권을 소파에 앉혔다. 평소에는 말 수도 없고 딱 부러지는 놈인데 술만 먹으면 이렇게 꽐라가 된다.
“기다려. 빨간약 가져올…….”
“으응 지호야, 좋은 냄새나.”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던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났는지 유권이 나를 훽 잡아 당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의 머리는 이미 유권의 가슴팍에 푹 파묻혀 있었다. 유권이 날 껴안으며 덜 마른 머리카락에 볼을 비볐다. 갸르릉, 고양이 울음소리와 비슷한 것이 위에서 들렸다. 본의 아니게 유권의 심장박동이 느껴졌고 그래서 몸이 달았다.
“놔줘.”
“싫어.”
유권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가지마아 지호야, 여기 내 옆에 있어어. 애교 섞인 연약한 말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떠난 건 너잖아.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갈게.”
“진짜루?”
“어.”
“약속해.”
복사, 도장, 카피까지 하니 그제야 유권이 안심하며 팔을 푼다. 나는 애완동물에게 하듯 유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을 열고 구급상자를 찾는데 팔꿈치로 선반에 두었던 청첩장을 건드려 떨어뜨리고 말았다. 잠깐 망설이다가 발치에 떨어진 그것을 주웠다. 새하얀 백상지, 실버색 리본. 신랑의 이름 칸에 쓰여 있는 김유권이란 성명에 목울대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괜히 봤어. 후회하며 청첩장을 쑤셔 박듯이 서랍에 넣어두고 구급상자를 꺼냈다. 답답해진 기분에 한숨을 뱉으며 거실로 나오자 유권이 소파에 엎드린 채 쿠션에 턱을 괴고 있었다.
“지호야.”
나른하도록 섹시하게 접히는 눈매. 저 표정을 미치도록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유권의 바지를 걷으려다가 스키니진이라 포기하고 버클부터 풀기 시작했다. 유권이 몽롱한 눈길로 나의 동작을 훑어보는 바람에 손이 뻣뻣해질 만큼 힘이 들어갔다. 알몸이라면 서로 지겹게 본 사이이니 하등 부끄러울 게 없는데도 어쩔 수없이 얼굴에 열이 오른다.
“덜렁거리긴. 조심 좀 해.”
면봉에 약을 묻혀 상처 부위를 살살 발라 주었다. 으… 유권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파? 유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을 먹었음에도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않은 녀석이다. 나는 조심조심 약을 바르고 데일밴드를 붙였다. 피 묻은 바지는 아무래도 빨아 놓는 것이 좋겠지.
“내 바지 줄 테니까 그거 입고 집에 가자.”
“집…?”
“데려다줄게.”
“무슨 집…?”
“너와… 선혜 씨가 사는 집.”
심장에 누가 칼을 찔러 놓는듯했다. 한심하지만 너무 아파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걸. 회색빛으로 가슴에 싸하게 퍼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고 뒤돌아섰다. 바지 가져올게.
“지호.”
유권이 내 손을 잡았다.
너는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냐. 속으로 원망의 말을 되뇐 채 나는 유권의 손을 떼려고 했다. 이기적이란 말을, 감히 내가 내뱉을 입장은 아니면서도 막상 상황이 뒤바뀌자 그가 한없이 미웠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는데도.
“자고 갈래.”
“선혜 씨는 어떡하고.”
얄상한 유권의 손이 흐르듯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타월에 향했다.
“말해뒀어.”
“이러는 거 범죄다.”
“아직, 혼인 신고 안했는걸.”
타월이 떨어졌다. 동시에 나는 몸을 틀어 유권의 뒷목을 잡고 키스했다. 겨울바람에 건조해진 입술은 약간의 마찰로도 피가 흘렀다. 나는 흡혈귀처럼 유권의 피를 핥았다. 비릿한 쇠맛이,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고 넌지시 말해주는 듯해 가슴이 더 아파졌다.
“미리 축하한다.”
“응.”
“잘 살아라, 김유권.”
“그럼 이게 마지막으로 몸을 섞는 거야?”
마지막. 마지막이 이토록 아리고 슬픈 단어였나. 나는 차마 확답은 하지 못하고 아마, 라며 시선을 피한 채 두루뭉술 대답했다. 유권이 다정하게 눈꼬리를 휘며 내 콧잔등을 깨물었다.
심장이 빠르게 식어가고,
나는 김유권에게 거짓말을 했다.
[블락비/짘권] 카프리카 상수
w.검백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감촉이 무거운 잠에 파묻혀있던 나의 영혼을 건져 올렸다. 맑은 햇빛이 하얀 침대보를 덥히고 방안을 은은하게 밝힌다. 달콤한 향기와, 따스한 옆자리와 이상적인 아침. 나는 눈을 굴려 내 몸에 올라탄 유권이 손가락 장난을 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유권은 내가 깬지도 모르고 무언가를 꼼지락 꼼지락 열심히 쓰고 있었다.
“6… 1… 7… 4?”
“어, 깼네?”
쓰는 대로 따라 읽자 유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햇살보다 밝은 미소였다. 나는 누워있는 채로 손을 들어 유권의 뺨을 감쌌다. 숙취는 괜찮아? 어제 술 많이 마셨던데.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유권이 장난스럽게 내 뺨을 꼬집었다.
“바보. 허리가 더 아파.”
더 아프게 해줄 수 있는데. 벌떡 일어나 이번엔 내가 유권을 깔았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귀여워 그대로 입술에 쪽쪽 뽀뽀를 했다. 아하하 간지러, 지호야 그만해. 간드러지는 음색이 꼭 푸른 하늘을 닮았다. 유권의 목소리는 피리처럼 피아노처럼 플루트처럼 하나의 악기였다. 새벽별을 닮은 목소리는 오롯한 유권의 소유. 인어공주의 목소리가 바로 이랬을까.
“가봐야 한단 말야.”
유권이 나를 밀어냈다. 옛날이었으면 싫다고 했겠지, 나 좋을 대로 행동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억지로 웃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은 먹어야지.”
“생각 없어서.”
“집까지 차 태워줄게.”
“됐어. 너도 출근해야 하잖아.”
유권이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했다. 자꾸만 그를 잡으려 하는 내가 싫다. 나는 옷 입는 유권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며, 옛날의 나와 유권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더 말을 나누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단어가 목을 넘지 못하고 턱턱 막힌다. 어색함. 이런 감정을 유권에게 느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강산이 바뀌는 10년의 세월도 잘 버텼던 우리의 관계가 점점 변하고 있었다.
“권아.”
나는 유권을 늘 권아, 라고 불렀다. 유권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돌아봤다. 맑은 눈동자와 앙증맞은 코와 윤기 나는 입술. 나는 문득 그를 힘껏 끌어안고 싶었다.
“선혜 씨한테 잘해줘. 내 안부도 전해주고.”
또다시 원치 않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유권은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채 도어락을 열고 나가버렸다. 온기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울리고 몇 분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꼼짝도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너무나 이상한 경험이었다. 또한 평생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아픔이었다.
중학교 입학식 때 김유권을 처음 만났다. 아마 유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옆자리에 앉았었다. 으레 성장기 남학생들이 그렇듯 유권 역시 미리 커질 몸을 대비해 헐렁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엄지손가락까지 내려오는 마이 소매며 목둘레가 한참은 남는 셔츠까지. 본인의 치수에 비해 지나친 감이 있는 교복이 꼭 물려받은 아버지의 양복처럼 우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힐끔힐끔 저를 보는 내 시선이 불편했던 건지 유권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왜 그렇게 봐?
교복이 그게 뭐야. 형 옷 물려받았냐.
유권이 얼굴을 연분홍빛으로 붉혔다. 사내자식이 수줍어하는 모습은 더 우스꽝스러웠다. 내가 이사이로 피식 웃자 유권은 푹 고개를 숙이고는, 으으 엄마… 오버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ㅡ라며 울먹였다. 다음날, 유권은 세탁소에서 줄였는지 적당히 몸에 맞춰서 핏이 사는 교복을 입고 왔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유권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의기양양해서 자신감이 넘치던 눈빛. 이상하게 그게 잊혀 지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같은 반이된 중학교 3학년부터지만, 나는 입학식부터 일방적으로 유권을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나와 유권을 말할 것 같으면 친구 이상으로 서로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사이다. 부모님도 모르는 고민거리를 공유하고 장래희망에 대해 의논하고. 문책을 구하거나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일종의 의식이랄까. 마음속의 흉측한 면을 환히 내보이고 나면 우리는 비온 뒤 땅이 굳는 식으로 더 단단해지곤 했다. 우리의 결속력은 신이라도 깰 수 없을 것 같았다.
언젠가 친구들이 나와 유권을 보며 장난스럽게 ‘너희 둘 사귀냐?’ 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정색하면서 미쳤냐고 반문하긴 했지만 나는 우리가 남들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에 꽤 놀랐었다. 돌이켜보니… 나와 유권은 오해할 만큼 서로를 필요 이상으로 챙겨주긴 했었다. 밥을 먹다 입가에 소스가 묻으면 닦아주고 신발 끈이 풀리면 대신 묶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남들이 보지 않는 장소에서 몰래 뽀뽀를 하거나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끼리 이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고 정상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사춘기 시절의 치기로 넘겨짚었다. 그랬던 스킨십이 잠자리까지 발전하고 만 것이다.
발코니에 나와 담배를 물었다. 텁텁한 연기가 유령처럼 공기를 교란시켰다. 눈을 감으니 그동안 사귀었던 여자들의 얼굴이 둥둥 떠오른다. 미애, 지현, 선영, 현숙, 하람, 희주, 다솔, 나진…… 끝은 유권이었다. 김유권. 나는 발갛게 타오르는 담배 필터를 관조하며 침을 삼켰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먹었던 저녁이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 같았다.
못 참겠어서 그대로 달려가 변기에 머리통을 숙였다. 우욱! 기다렸다는 듯 위액에 범벅이 된 음식찌꺼기가 소화되다 말고 통째로 뱉어졌다. 나는 뱃속에 있는 장기들을 모두 쏟아낼 것처럼 격렬하게 헛구역질 했다. 위가 쓰리고 목이 따갑다. 변기 물을 내리지 않은 채 타일 위로 벌러덩 나동그라졌다. 손에서 떨어진 담배꽁초는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다.
“제기랄.”
뺨이 축축하다 했더니 어느새 울고 있었나보다. 어처구니가 없어 비실비실 헛웃음이 나왔다. 서른 살 아저씨가 토하다 말고 화장실 바닥에 누워 질질 짜다니, 알려지면 모두 손가락질 할 거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 말짱한 정신으로 이 무슨 추태냐. 일어나려고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면 유권이 날 찾으러 와주지 않을까. 한심하고 유치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찼다.
나와 김유권이 친구도 애인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를 가지는 동안 서로에게 사귀는 사람이 없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도리어 내 쪽에서 먼저 여자 친구가 생겼다. 유권은 놀란듯 했지만 담담하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여자친구가 있는 기간만큼은 우리는 철저히 친구 사이로 지냈다. 그러나 여친과 깨지고 솔로로 돌아가면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졌다.
나, 깨졌어.
그렇게 말한 날에는 꼭 유권과 함께 잤었다. 두 자리 수에 다다르는 여친을 만든 이유가 차라리 깨지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나는 둥글게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떴을 때, 중학교 입학식 날로 돌아갔으면 하는 실없는 망상을 품은 채.
“김유권 결혼한다더라?”
“어.”
“아, 하긴. 김유권 덕후가 그걸 모를 리 없지. 쯧쯧 안 됐네, 우지호. 이제 너 김유권의 일 순위에서 밀려나겠구나.”
오랜만에 만난 동창과 술자리를 갖다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거칠게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뭔 소리야? 밀려 난다니.”
“야 그렇잖아. 여우같은 마누라 두고 큼큼한 홀아비 냄새 풍기는 친구가 눈에 들어오겠냐, 상식적으로.”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나에게 김유권은 그리고 김유권에게 나는 항상 일순위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첫번째였다. 첫번째여야만 했다. 결혼도, 무엇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믿었다. 나무에서 땅으로 사과가 떨어지듯이 그건 너무도 당연해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조차 없는 진리였다. 나는 태연하게 삼겹살을 구우면서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15년 우정이 사랑만 못하려고.”
“당연하지! 사랑은 딱 하나뿐이잖냐. 우정은 친구마다 있으니 아무래도 희소성이 덜하지.”
암 그렇고말고! 자기가 말했으면서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우와, 나 방금 좀 멋있지 않았어? 이거 완전 명언인데? 자화자찬에 빠진 동기 놈을 눈알이 빠져라 노려봤다. 화가 났다. 놈에게 화가 난 것보다 반박할 말이 없다는 상황에 화가 났다. 나는 벌떡 일어나 플라스틱 사각 의자를 걷어찼다. 동기가 당황해하며 씩씩거리는 나를 쳐다봤다.
“그래. 넌 친구고 나발이고 여자한테 목매달고 살아! 비겁한 자식.”
“왜 그래? 그런 뜻이 아니잖아.”
“실망이다, 박경.”
돌아서서 가게를 뛰쳐나왔다. 야, 우지호! 야!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를 막고 그대로 달렸다.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스럽고 부끄러워서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동기의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너덜너덜하게 찢어발겼다. 울기 싫은데 울음이 나왔다.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나를 치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로수에 팔을 대고 헉헉 숨을 골랐다. 전정기관이 고장 났는지 세상이 방향을 잃고 어지럽게 빙글거린다.
삐빅 거리는 문자음에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유권이 보낸 것이다.
‘495’
뜻 모를 세 자리 숫자. 495에서 나는 365일을 하고도 30일 전을 떠올렸다. 아마 그맘때였을 거다… 김유권이 전선혜를 만난 것이.
온 세상이 나만 빼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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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짘권이다!!! 하고 썼습니다...ㅋㅋㅋ 이 커플링으로는 처음 써보네요 자꾸 완결은 안 내고 새 작품만 들고옵니다 ㅠ_ㅠ!
새우깡
사랑하는 암호닉분들~ 늘 감사해요! 요즘 맨밥만 먹어서 그런가 현미밥이 먹고싶네요.. 아!! 그리고 모두 새학기 즐겁게 보내세요 ㅋ_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