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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운명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고싶지는 않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연결된 끈같은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끈은 관계에따라 강도가 달라서
어느것은 조금만 힘을줘도 끊어지거나 풀어지는 반면. 어떤것은 아무리 풀어내려 노력해도 꿈쩍하지않는다고. 시시한 얘기지만 요즘따라 그런생각이
자주 들곤한다. 아마 그사람과 나사이의 끈은 무엇이 온다한들 끊어지지 않을만큼 질기다는걸.
세상에 많은사람들이 있고 그중엔 단연 무리들중 가장튀는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다. 우린 그런사람들을 '특별하다' 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부터 말할려고 하는 소년은 그 특별한 무리엔 끼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였다. 그렇다고 평범하다고 결론내릴수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특별함과 평범한 그사이 어딘가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길가를 유유히 거닐고있는 정도.
"도경수 오늘은 빨리왔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도경수였다. 흰피부에 너무 단정하다싶을만큼 검정색으로 물들인 머리. 도드라져보이는 커다란눈과 도톰한 입술이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소년, 처럼보이지만 이제 24살을 맞이한 떳떳한 대한민국의 남성이다. 지금은 대학을 휴학중인 상태고 딱히 정해놓은 진로는
없는듯 보인다. 나쁘게 생기지 않은 외모에 작은키때문에 어딜가나 여자들이 귀여워 죽을려하지만 그점을 제외하면 어딜봐도 별로 특별하다곤
말할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말이지.
"아.. 피곤해"
그런 도경수에겐 특별한 점이 있었다. 그는 정말 여기저기 어딜봐도 단정하다, 는 단어가 잘어울리는 남자였다. 버스도 고등학생요금을 낼수있을정도로
동안인 얼굴이였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단정한 모습과는 상반되게도, 현재 도경수는 바 에서 일하고있는 중이였다.
본인은 가벼운 알바정도로 생각하고있지만 그 가벼운알바를 시작한지도 요번해로 이년째. 그의 경우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홍대거리에
위치한 웨스턴바에서 일을 하고있는데, 그 바 사장이 유난히 경수를 예뻐해서인지 탈많은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면서도 나쁘지않은 대우를 받아오고
있는중이다. 가끔씩 찾아오는 진상손님과 아무리 오래해도 적응이 되질않는 피곤함만 제외하면.
"빨리 옷갈아입고 와, 지금 사람 미어터져서 죽을거같아"
"예예"
밀려오는 졸음에 하품을 쩍쩍 하고있던 경수는 그제서야 몸을 움직여 탈의실로 들어가 후줄근한 후드티와 삼선바지를 벗고, 그의 단정함을 한층더
부각시켜주는 정장식 유니폼과 앞치마를 둘렀다. 여전히 그의 피곤함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지만, 서비스업 종사자다운 가식미소를 거울에 대고
몇차례 연습한후 약간 부스스하던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리하고는 아무렇지 않다는듯이 탈의실에서 나왔다.
경수가 처음 알바를 하러 왔을때부터 있었고, 아마 이 바에서 일하는 사람들중에선 가장 노련하지 않을까싶은 준면이 이미 잔뜩 웃음을 띄고는
손님잔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경수는 그가 속으로는 엄청나에 욕짓거리를 읆고 있을거라고 조심스레 예상했다. 왜냐면 준면앞에 앉아서
이것저것 말을걸고 있는 저여성은 몇주전부터 매일매일 출석하다시피 나와 준면에게 찍쩝거리고있기때문이다. 저여자가 얼마나 집착이 심하냐면
왠만해선 이런것에 신경쓰지 않는 경수조차 혀를 내두를정도였다.
"김준면 표정좀봐"
"형한테 김준면이 뭐냐"
옆에서 한참 그광경을 구경하던 막내 세훈이 깔깔거리며 웃자 경수가 대신 머리통을 한대 쥐어박아주었다. 그후로 들리는 세훈의 찡찡거림을
뒤로한채 덤덤히 자리로 돌아간 경수는 업무용미소를 유지한채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술을찾고, 농담을 따먹는 일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바텐더라는 직업이 평생직업으로는 모르겠지만 가볍게 하기엔 정말좋은 일이라고 경수는 늘 생각했다. 술의 위치를 외우고 약간의 재치와
유머감각만있으면 전혀 일하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는 직업이니까. 물론 아까도 말했듯이, 약간의 예외만 뺀다면.
바에서 시간은 유난히 빠르게 흐른다. 많은사람들의 얘기소리와 잔잔히 울려오는 음악, 술잔을 부딪히는 소리나 누군가 술김에 슬피우는소리까지 간간히 들려온다.
그리고 경수는 그 소리들의 중심에 있었다. 혼자왔던 둘이왔던 여럿이왔던간에 바쪽 의자에 앉은 손님들은 경수와 얘기나누는걸 즐거워했다. 그의 사소한 농담이나
가끔씩 오고가는 진지한 얘기들 모두 처음오는 손님을 단골로 만들만큼 매력적이였다. 또한 경수는 들어주는것에 대해선 천부적인 재능이있다고해도 믿을만했다.
그 얘기가 진부한 사랑얘기와 잘되지 않는 사업, 가족간의 문제에 대한 얘기들이라 해도. 심지어 똑같은 레파토리라 해도. 경수는 언제나 진심을 다해서 들었고, 반응했다.
물론 경수또한 그런일을 즐겼다. 말이 많은편은 아니였지만, 자신과 얘기하다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거나 즐거워하며 깔깔거리는 모습을 보는것과,
여러직장에서 서로다른 계급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는것 모두가 스스로 즐겁다고 생각한다는것이다. 어쩌면 바에서의 시간이 빨리 흐르는건 그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그런경수가 뻐근한 고개를 돌려 벽한쪽에 붙어있는 시계를 바라봤을때 그 시계의 시침은 막 열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참을 서있다보니 허리와 다리에 무리가 가고, 아까부터 모른척하며 애써 참아왔던 졸음이 절정을 찍어 나른해지는 시간쯤이였다.
마침 왠일인지 손님도 줄어드는듯 싶어 요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스트레칭도 하고, 말을 하다보니 바싹바싹 마르는 목도 물로 축이던 시간.
"..어?"
경수의 나른함을 한번에 깨주는 사건이 하나일어나는데, 사건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할수도있지만 경수 자신에게는 꽤나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것이였다. 북적거리는 바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누가봐도 눈에띄는 남자가 여자한명을 데리고 걸어들어왔다. 그 남자는 아마
'특별한' 무리에 들어있는 종류의 인간일것이다. 큰키의 뭘입혀도 잘어울릴것같은 비율뿐만 아니라, 어두운 조명아래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짙은 쌍카풀이 진 눈이. 아마 바에 앉아있던 여성들은 그가 들어오는 순간 한번쯤은 그를 되돌아보게됬을거라고 장담한다.
아무튼 커플로 추정되는 그 남자와 여자는 다정하게 걸어와 바가있는쪽에 착석한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메뉴판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경수쪽을 쳐다보는 그순간, 남자와 경수사이엔 왠지모를 길고 무거운 정적이 잠시동안 흐르게된다. 원래대로라면 경수가 시시한
농담이라도 걸며 정적을 깨버렸겠지만 지금순간만은 경수조차 당황한 상태라 무어라 말한마디 꺼내지못하고 주춤하다가 한발짝 뒤로 물러나버렸다.
"형.. 여기서 일해요?"
남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수또한 어색한 표정으로 겨우 고개만 끄덕여보인다. 끼리끼리논다는 말에 맞게 남자만큼 출중한 외모의 여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봤지만 경수는 그걸 의식할 기분이되지못했다. 그는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퇴근하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게 안된다면 차라리 배가아프다고 뻥을치곤 화장실에 들어가 몇분이라도 좋으니 생각할 시간을 갖게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수는 다급해진다.
말하자면 남자와 경수는 좋은 관계가 아니였다. 어떤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냥 좋은 대학 선후배사이였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남자의 이름은 종인이다. 김종인. 도경수의 휴학 원인중에서 40% 의 지분율을 갖고있는 남자. 그렇다고 그가 경수에게 해선안되는짓을했다던가
못할짓을 했다던가 하는건 아니다. 종인은 인간관계가 좋은 남자였으며, 그 잘난 얼굴만큼이나 성격에도 흠이없는 사람이였다. 경수가 그런 종인을
피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다. 문제는 그 이유하나가 너무 치명적이라는 점이였다. 그건 도경수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했으며, 가장 취약해지는 부분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있던 단하나의 비밀이다.
그건바로-
「김종인, 너 나 게이인거 알아?」
「..............」
「........미친」
김종인은 도경수가 게이인걸 알고있기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