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암.루한이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왔다.바뀐 집이 조금 낯설었다.어느새 길어진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다.급하게 이사하느라 아직 풀지않은 짐이 눈에 띄었다.루한은 집이 좋다고 생각했다.중국에서 아버지와 같이살던 저택만큼은 아니지만.정원도 있고,주변도 조용하고.무엇보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루한은 집을 찬찬히 둘러보며 민석의 능력에 감탄했다.자신이야 아버지의 회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 여유롭게 생활하지만,민석은 혼자만의 힘으로 아이까지 키우며 살터였다.비서가 집을 구해주며 친구분이 능력이 좋으신가봅니다.하고 말을 건낸게 생각났다.아버지와 저의 일을 봐주며 큰돈을 만지는일이 새삼스럽지 않은 분인데,그런말을 한걸보면 정말 민석은 루한의 생각보다 훨씬 성공한걸지도 몰랐다.생각에 잠겨있던 루한이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오전 9시.민석이 딸과나오는 시각은 9시 30분.루한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얼른씻고 나가야지"
루한이 화장실 앞에서 기지개를 한번 키고 문을열었다.깔끔한 화장실이 민석의 성격같다고 생각했다.세면대를 짚고 칫솔을 들어 치약을 짰다.양치질을 하며 거울을 들여다보는 루한의 눈에 민석의 모습이 겹쳤다.자신의 옆에서 환하게 웃는 민석의 모습.루한은 생각에 잠겨 그것이 몇년전 일인지 기억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5년..반?아,5년하고도 8개월.그는 나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뭐야,6년도 안됬잖아.루한이 어깨를 들썩이며 칫솔을 잡은 손을 움직였다.
"6년쯤이야.쉽게 되돌릴 수 있어"
자신있었다.연인이었던 시간보다 떨어져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자신도 그동안 변한게 없으니 민석도 마찬가지일것이라 생각했다.세상에서 민석을 제일 잘아는 사람은 저라고 자부할 수도 있었다.과거의 3년 남짓한 시간이 그렇게 쉽게 잊혀질 시간이 아니다.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저에게는 평생 담아둘 시간이었고,민석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물론 자신이 일방적으로 끝낸것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얼마못가 다시 돌아올 민석이다.그땐 많이 어렸지만 지금은 아니다.그때 했던 실수를 반복할일도 없을거다.이번엔 루한이 아쉬운 입장이니 더 그랬다.루한이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김민석이 나 말고 누가 있다고"
그렇지.김민석이 날 두고 어딜가.루한은 이와같은 이유없는 자만심도 있었다.자신이 없는 동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건 괘씸했지만 이미 이혼했으니 상관없다.민석은 자신말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6년전이나 지금이나 이생각만은 변함이 없었다.민석은 쉽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물론 쉽게 잊는 사람도 아니다.그건 정말 장담할 수 있었다.다시 시작하자.그때로 돌아가서 아무렇지 않게.루한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옷장을 열었다.굳어있던 얼굴을 환하게 바꾸고 옷사이를 헤집었다.쌀쌀해진 날씨를 생각하며 후드집업을 챙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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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누구야?"
"안녕,꼬마야.아저씨는 아빠 친구야"
민하가 차에 올라타지 않고 민석에게 물었다.경수의 손을 잡고 버스에 오르면서도 고개는 루한을 향했다.루한이 민석의 옆으로 한걸음 옮겨가 민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민석이 루한을 한번 흘겨보다 민하를 배웅했다.경수가 셔틀버스의 창문너머로 민석에게 눈인사를 건냈다.루한의 표정이 의아하게 바뀌었다.
"누구야 저사람?친해?"
"여긴 왜 왔어?"
"너 보러왔지.출근하는거야?"
민석이 자신에게 말을거는 루한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오늘은 휴가가 끝나 병원으로 가야하는 날이다.병원갈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골이 당기네.민석이 어깨를 한번 돌렸다.
"왜 대답을 안해"
루한이 민석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민석이 기분나쁘다는듯 루한을 노려봤다.이게 뭐하는 짓이야?이거 안놔?예민하게 구는 민석에 루한이 코웃음을 쳤다.루한의 그런 행동에 민석은 더 기분이 나빴다.
"튕기지마.대답한번하는게 그렇게 힘들어?"
"너한텐 그 시간도 아까워.이거놓고 꺼져"
"김민석 많이 변했네"
"아무렇지않게 넘어가려고 하지마.다 기억하고 있어"
다 기억한다며 저를 노려보는 눈빛에 루한의 팔이 스르륵,하고 풀렸다.원망섞인 눈빛에 더이상 민석을 붙잡을 수 없었다.매몰차게 자신을 외면하고 걸어가는 민석의 뒷모습을 보며 루한이 고개를 숙였다.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하는 루한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씨발,그때 그렇게 가는게 아니였어.루한이 6년전 그때를 떠올렸다.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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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루한은 애인이 있었다.남자친구인 민석도 있었는데 여자친구인 세희도 있었다.민석도 그걸 알았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지저분하게 구는걸 싫어하는 루한이다.그렇게 지내다가도 곧 저에게 돌아올거라고 민석은 생각했다.그런데 그게 아니였다.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뭐야...」
민석이 루한과 동거중인 자취방에 하루만에 도착했을때,집은 텅 비어있었다.루한도,루한의 옷들도,루한의 것들 모두다 사라지고 없었다.민석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그런데 루한은 여전히 없었다.민석이 어안이 벙벙해서 침대에 주저앉았다.눈을 감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루한과 저는 권태기에 접어든 연인이고,루한의 짐은 집에서 빠져나갔다.그렇다면 루한은.나의 애인 루한은.
「없어졌어-...」
사라졌다.자신을 버리고 어디론가.민석이 상황을 깨달았을땐 이미 늦은때였다.그때 루한은 공항에서 가장빠른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민석은 그날 처음으로 자살기도를 했다.행동도 말투도 감정이 많이 드러나는 민석이 아니지만 충격이 컸다는 증거다.민석이 루한을 많이 사랑했다는 증거기도 했다.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민석에게 아픔을 동반했다.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은,자신만이 알고있는 상처.
"널 어떻게 해야할까..."
루한은 과거의 자신이 많이 경솔했다고 생각했다.사실 많이 충동적인 행동이였다.후회해,민석아.많이 후회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