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보다 빛나는 제 3화 : 바보
그렇게 몇일이 흘렀다. 나와 김종인 그리고 변백현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워낙 성격이 둥글둥글해서 그런지 백현은 우리가 아닌 다른 애들과도 잘 어울렸다. 한달 정도 흐르니 백현이 전학 왔다고 느껴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쭉 옆에 있었던 사람 같았다, 변백현은.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와 백현은 늘 그렇듯 함께 하교하고 있었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그런지 언제부턴가 아무렇지 않게 이리 해왔다. 평소엔 떡볶이 좀 먹고 가자, PC방에 들려서 게임 한판 하고 가자하며 시끄럽게 굴었을 백현인데 오늘따라 참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뭔일 있냐.”하고 물으니
“어? 아니아니, 없어!!!”하고 대답해온다.
반응을 보자하니 뭔일이 있는 게 분명한데 왜 없다 그러는건지.
“뭔일 있구먼, 뭔데. 얘기해봐.”
“아무일도 없다니까 그러네!!”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래. 뭐든 얘기해봐, 이 형아가 들어줄테니까.”
긴 정적이 흘렀다. 백현의 표정을 보니 이걸 말할까말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괜히 말하라고 재촉했다가는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입을 열까말까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찬열아.”하는 평소와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라고 하기도 뭐하고 응이라고 대답하기도 뭐해서 잠잠코 있었다. 할 얘기 있으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경수가... 있잖아..” 들려오는 도경수의 이름이 놀라웠다. 도경수? 걔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건가. 이유는 모르겠는데 궁금해졌다, 그것도 엄청.
“도경수? 걔가 왜.”
“걔가 나한ㅌ...”
나한테까지는 귀에 들어왔으나 그 뒤에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뭐라뭐라한 것 같기는 했는데 하도 우물거리니 들릴 리가 있나. 근데 진짜 도경수랑 싸우기라도 했나. 어제 백현이가 도경수랑 운동 간다고 그랬었는데. 운동하다 싸웠나?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해결이 안될 문제다. 그냥 물어봐야지.
“아, 걔가 왜! 말할거면 빨리 말해주지 뭐하러 그렇게 질질 끄냐.”
“알았어알았어.. 말하기 좀 그런거라서 그렇지...”
“뭐길래 그래. 뭐 걔가 너 좋아서 사귀고 싶다든?”
그냥 막 던졌다. 아닐 걸 알면서도. 솔직히 저 정도 일이면 말하기 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저 정도로 심한 얘기도 아닌데 왜 저렇게 뜸을 들이는건지. 답답해 죽겠네 진짜.
음? 그나저나 왜 대답이 없는거냐 변백현.
당연히 “아니!!! 무슨 그렇게 징그러운 말을 하구 그래!!!”하며 얼굴을 찡그려야 했을 백현은 지금 땅을 보고 걷고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은 이런 게 아닌데. 진짜 제대로 싸웠나보다. 피를 보기라도 한건가.
“야 뭔데 그러냐니까.”하고 물으니
“니 말이 맞아..”하는 간결한 대답만 돌아온다.
도대체 내가 한 말들 중에 뭐가 맞다는거지? 생각하기 귀찮아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니까 뭐가 맞는데.”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아까 니가 한 말... 그게 맞다고오...”라고 대답하는 백현이다.
내가 아까 한 말이 뭐가 있더라. 난 분명 나한테 얘기해보라는 말, 그 말을 들어준다는 말, 왜 얘기 안해주냐는 말 밖에 안했는데 도대체 뭐가 맞다는거야.
“뭐가 맞냐고. 또 묻게 하지마라.”하고 화난 듯이 얘기하니 백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다가 마른 세수를 한다.
그 모습이 한심해서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아주.”라는 말 밖에는 안 나왔다.
“이씨, 내가 진짜 눈 딱 감고 말한다! 딱 한번! 알겠지?”
“제발 딱 한번만 말하시라고요.”
“경수가 나한테 사귀자고 고백했어!”라는 말을 2초안에 해버리고는 걸음을 빨리한다.
듣고서 10초 정도는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다가 내가 무슨 내용을 들었는지 정리가 되고 나서야 백현을 찾으니 이미 저 멀리 가있다. 저새끼 뭐야 저거. 얼른 뛰어가서 백현을 따라 잡았다. 궁금한 게 많은데 뭐부터 물어봐야할지 몰라서 생각나는 것부터 내뱉었다.
“너 남자 좋아하냐.”라고.
난 분명 게이냐고 물어보려다가 기분 나쁠까봐 배려해준답시고 저렇게 물었는데 백현은 그 질문이 썩 맘에 들진 않았나보다.
“물어볼 게 그거 밖에 없어 넌?”이란다.
너 같으면 뭘 물어보겠냐라고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백현이가 나보다 혼란스러워 보였으니까.
정적.
정적..
정적...
이어지는 정적을 먼저 깬 건 다름 아닌 백현이었다.
“아니. 남자 안 좋아해. 그래서 안 받았어.”
괜히 또 심기를 건드릴까 걱정돼 가만히 있었다.
정적.
정적..
정적...
이번 정적을 깬 것도 백현이었다.
“싫어?”라고 물어온다.
뭐가 싫냐고 묻는거지. 너? 도경수?
“누가?”하고 물으니
“누가가 아니고... 남자끼리 그러는 거.. 만나는 거... 그거.. 싫냐구...”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동성애가 싫은지 좋은지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난 딱히 상관 없는데, 어차피 내 일도 아니고 뭐.”라고.
정적.
정적..
정적...
이번 정적은 참 길다. 이번에는 안 깨주려나?
정적.
정적..
정적...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하나.
정적.
정적..
정적...
내가 아까 한 대답이 맘에 안드나. 동성애 싫어한다고 할 걸 그랬나. 하긴, 남자애 차고 온 애한테 동성애가 나쁜 건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멍청하게 군 나를 탓하며 이번 정적은 내가 깨기로 마음 먹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싫다, 같은 남자끼리 그러는 거.”
은은하게 울려 퍼진 내 낮은 목소리가 그 날 우리 사이에서 들린 마지막 소리였다. 더 이상 그 어떤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백현이는 집에 다 도착해서도 말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그냥 보내기 뻘쭘해서 최대한 밝은 척하며 “내일 보자!”라고 건넨 내 인사도 메아리로 돌아왔다.
백현의 집과 우리 집 거리는 5분 거리였다. 내가 혼자 걸어야 하는 그 5분. 그 5분동안 나는 수만가지 생각을 했다. 내가 뭘 잘못한 게 분명했다. 그니까 애가 저렇게 토라져서 말도 안하고 그냥 가지. 원래 성격이 더러운 것도 아니고 착한 앤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집에 들어가 씻고 게임을 하고나니 벌써 11시가 되어 있었다. 뭔 놈의 시간이 이렇게 빨 리가. 백현이는 뭐하고 있을까?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종종 백현이 생각이 난다. 이렇게 심심할 때, 아무것도 할 게 없을 때.
아까 그렇게 헤어진 게 마음에 걸려 백현이에게 문자를 쳤다.
‘괜찮아? 아까 그러고 들어가면 어떡하냐!!’
괜히 더 호통을 쳤다. 걱정하는 것 같이 보내면 오글거리잖아, 남자끼리.
2시간동안 답이 없는 전화기를 보다 시계를 보니 벌써 1시였다.
오늘은 그냥 자야겠다. 내일 학교가서 얘기해야지 뭐.
답을 하지 않는 백현에게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내일은 10분 일찍 만나. 7시 20분 니네 집 앞에서.’
으어, 피곤하다피곤해. 내일 급식은 뭐가 나오려나하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사람은 바보라 하루, 아니 몇시간 뒤에 일어날 일도 깨닫지 못한 채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난 그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날 일은 꿈 속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