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 없이 창문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로 찌뿌듯한 몸을 풀고 거실로 나가보니, 테이불에 엎드려 자고있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음... 윤정한 같은데, 언제 들어왔대? 왔으면 어차피 침대 넓은데 들어와서 같이 자지...
집에 누가 놀러온 김에 청소나 좀 해둬야겠다 싶어서 간만에 대청소를 끝냈고, 여전히 정한은 잠들어 있었다.
"야, 윤정한! 일어나!"
어깨를 잡고 아무리 흔들어도 깰 기미가 안 보이자 포기하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근데, 울었나...? 볼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눈물 자국이 보였다.
"아으, 눈 부셔. 근데 내가 불을 켜고 잠들었나?"
"오, 일어났다! 불 내가 켠 거야. 근데 너 언제 들어왔어? 왜 이제야 일어나!"
"벌써 아침이네. 어, 잠시만. 지금 몇 시... 헐 늦었다. 애들 기다릴 텐데."
"아이고... 애들이랑 만나기로 했어? 모닝콜이라도 해놓고 자지 그랬어."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에 늦었는지, 나는 무시하고 허둥지둥 나갈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다는 인사도 없이 급하게 집에서 나가버린 정한을 보고 나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정한의 옆으로 다가가 화면을 슬쩍 바라보자, 상단바에는 부재중 전화로 가득했다. 지수부터 시작해서 승관이. 석민이, 찬이 등등... 엄청나게 쌓인 부재중에 놀람도 잠시, 지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윤정한! 설마 지금까지 잔 거 아니지? 죽을래, 진짜로?'
"어... 조금 전에 일어났어. 지금 가는 길이야, 미안."
'지금 다른 애들은 다 왔어. 얼른 와, 오늘만 그냥 넘어간다.'
"알겠어. 근처니까 금방 도착할 거야."
짧은 통화가 끝나고 급하게 걸어갔다. 아마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모이기로 한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리운 얼굴들이 시야에 가득했고,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비어있는 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 정한 형 왔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지각하면 어떡해요!"
"미안~ 사실 승철이 집 잠깐 갔었거든. 갔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어서..."
"얘들아, 나도 왔어! 윤정한은 아침에 일어나니까 거실에 있더라. 잠만 자느라 온 것도 모르고 있었어."
"어휴... 근데 형들 뭐 마실 거예요? 주문하고 올게요. 커피 마시면서 얘기 좀 하다가 가요."
"나는 맨날 마시던 거. 이찬 센스 믿는다!"
"나도 마시던 거."
"카페 라떼... 아, 두 잔 알지?"
"뭐야, 왜 둘이야? 그걸 다 마시려고?"
"하나는 내 거 아냐?"
"승철이 형 거...?"
말도 안 했는데 내가 평소에 마시던 걸 기억하고 대신 챙겨주는 정한이에게 좀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너희 반응은 왜 그래? 내 거라는 말에 다른 애들은 표정이 어두웠다. 침묵을 유지하다 석민이 입술을 잘근 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한 형..."
"어? 어, 왜?"
"아... 아니예요. 진동 울리는데 음료수 제가 가져올게요!"
석민이는 망설이다 결국 말을 꺼내지 않고 음료수를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무슨 말이길래 저러지? 왠지 나만 빼고 모두가 아는 듯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곧 테이블 위로 음료수가 올라왔고, 정한이가 카페 라떼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뱉어내고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오랜만이니까 다들 웃었으면 좋겠는데, 내 바람과는 달리 조금 전의 어두운 분위기는 풀어지지 않았다. 계속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지훈이.
"정한 형, 제발 그만 좀 해요. 형 마음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시간도 많이 지났잖아, 이제 좀 보내줄 때도 됐어요."
애써 부정하려 했던 일이 언급될 것 같았다. 듣기 싫어... 눈을 꼭 감고, 귀도 막아버렸다.
귀를 아무리 막아도 소리는 완전히 막을 수 없었고, 모두 들어버렸다.
"... 싫어, 어떻게 그래. 아직도 옆에 있는 것 같단 말야. 근데, 온기가 없어."
"나도, 승철이 형 보고 싶다..."
눈물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듯한 승관의 말에 눈을 조금씩 떠보자, 아이들의 눈에 고여있는 눈물을 봐버렸다.
그 사건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았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아니야, 나 여기 있잖아...
"나 사진 가져왔어, 우리 단체로 찍었던 사진들. 13명 다같이 놀러갔을 때 찍은 거."
"오랜만이네... 벌써 4년 전이지?"
"그러게. 우리끼리 놀 때가 제일 재밌었는데..."
"나도... 좀 슬프지만,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나라서 다행이야."
"그런 일 생길 거 알았으면, 형 말 더 잘 들었을 텐데."
"흐... 다 나 때문이야. 나만 정신 똑바로 차렸으면 승철 형 그렇게 안 됐잖아. 정한 형 미안해요, 정말로..."
"... 아냐, 우리 이제 얼른 보러 가자."
가자는 말에 다들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나, 다 안 마셨는데...
자리를 정리하던 순영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내 카페 라떼를 챙기곤, 모두를 따라 카페를 나가 어딘가로 향했다.
"저기... 얘들아,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모두 입을 꾸욱 다물고 바쁜 걸음만 걸었다. 나도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납골당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혀오고, 무거워진 발걸음을 힘겹게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한아... 우리 왔어."
모두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눈물이 다시 맺히기 시작했다. 아니, 떨어졌다. 눈물을 삼켜보려 하지만, 하나 둘씩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기에 너무 힘겨워서, 뒤돌아 울먹였다. 고개를 아무리 젓고 부정해도 머릿속에서 그 사건이 떠나가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나 때문이야. 내가 형을..."
"울지 마... 대체 뭐가 미안해, 네가?"
"시간이 더 지나도, 절대 못 잊을 거야. 항상 우리 곁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바로 옆에 있잖아... 나 지금 너희 바로 뒤에 있어."
무거운 몸을 다시 돌려 아이들을 향했을 때, 아이들의 눈물이 향하는 곳에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고통스러웠다. 믿고 싶지 않아, 이건 악몽일 거야.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선물이야. 이 꽃은 처음 보지? 아네모네라는 꽃이야. 꽃말은 제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저의 모든 것을 드릴게요.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최승철 사랑해, 진심으로."
나도 사랑해 윤정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표현 좀 많이 할 걸 그랬네...
다른 애들도 정말 나한테는 다 소중했고, 앞으로도 쭉 아끼는 존재야. 후회는 없어. 석민이를 구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나는 평생 너희 곁에 있을 거야. 만약에, 너희가 나를 잊더라도 내가 너희를 찾아갈게.
웃으면서 마주볼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그 일은 그만 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어줘.
정작 써야하는 홍일점은 안 쓰고 단편을 들고 왔네요... 친구가 갑자기 소재를 추천해 줘서 적어봤어요
13명은 학창 시절부터 함께 지내던 형 동생들인데 함께 여행을 갔다가 화재 사건이 났고, 승철이가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석민, 한솔을 구하고 대신 건물에 갇혀 죽었다는 설정이예요. 그 일 이후로 몇 년이 지났는데 승철이는 아직 애들 곁에서 맴돌고 애들은 승철이를 그리워하는 내용... 승철이가 하는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 이유도 승철이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ㅠㅠ...
홍일점 글은 아마 오늘이나 내일 어떤 분께서 추천해주신 에피소드로 올라올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