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We Want
Written by.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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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분명한 감정들이 한 때, 뭉뚱그려졌다. 나는 백현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처음에는 죽고 싶을 만큼 내 자신이 싫어서 변백현을 보고도 못 본 체 했다. 내 과거라고 칭하던 아이가 이제는 현재의 내 옆에 존재했다. 그럼에도 자꾸 욕심이 나는 건, 이제 정말 완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변백현이 내가 아닌 타인과 접촉을 한다는 것이였다. 나밖에 모르던 앤데. 어떻게 되었건, 약혼은 의미 자체로 약혼이었다. 경수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웠다. 정신병자 새끼, 자신을 이렇게 칭하며 더 망가지던 지난날들을 치유해주던 백현인데. 백현이 옆에 있는 데도 자꾸만 제 욕심이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경수는 작은 커터 칼을 샀다. 집에 혼자 틀어박혀 핸드폰 확인도 하지 않으니, 자꾸만 진동이 울렸다. (내 현재)백현이♥ 낯간지러운 그 핸드폰 액정화면을 확인하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죽지 않을 만큼만 제 자신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경수는 점차 정상인이 되어갔고 그럴수록 과거의 기억들이 더 경수를 괴롭혔다. 살인, 정신병, 미쳐있던 지난날들,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다. 옆에 변백현이 있어서 부러 더 밝은 척을 해보였다. 그런데 백현이한테 자기 자신이 한 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있는 집 애들은 딱 그 수준의 사람과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고 들었다. 경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 결혼을 약속한다고? 그래, 말은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드르륵, 들고 있던 커터칼을 밀어, 날을 보이게 했다. 팔위로 여러 번 낙서를 하듯 그었다. 작게 피가 맺혔지만 금세 그 피는 응고 되고 말았다. 덧대어 계속 해서 상처를 내었다. 힘을 많이 주지 않은 채, 긋자, 잔 상처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따끔하다. 따끔한 감촉보다도 마음이 훨씬 더 아팠다. 왜 나는 변백현과 약혼을 할 수 없을까. 백현이 분명 파혼한다고 약속을 하기야 했지만. 그 때가 언제가 될 줄도 몰랐고 미래는 보장할 수 없었다. 나야, 한 순간 사라져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러면 변백현이 아프잖아. 이 상황에서도 백현 걱정을 하는 경수는 쓸데없는 배려심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자해했다. 그렇게 아프지도 않은데 계속 눈물이 나는 걸 보면 진짜 내가 못할 짓을 하고 있구나. 못났다. 도경수.
“도경수, 전화 좀 받아라.”
제발, 백현은 종인의 생일파티 이후로 경수를 보지 못했다. 분명 웃으면서 집에 되돌아갔는데. 그 당일에도 그 다음날에도 연락 한 통 없다. 매일 카톡하고 통화했는데. 연락두절이라니. 무슨 생각이야. 또 백현은 불안해졌다. 불안함에 몸서리 쳤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몸 건강히 있는 거 맞지? 백현은 결국 집에서 나와 경수에게로 향했다.
칼을 보고선 여러 번 눈이 뒤집어질 뻔했다. 피를 보고 있으니 더 했다. 하지만 경수는 망설이지 않고 하던 짓을 계속해서 했다. 한 쪽 팔을 거의 채우고 나자, 이번엔 다른 쪽 팔을 건드리려 할 때에, 현관 문 도어 록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경수는 커터 칼을 손에서 놓쳤다. 커터 칼이 발등을 찍으며 팔을 긁었을 때보다 더 큰 생채기가 났다. 경수는 아픈 줄도 모르고 소매가 긴 옷을 걸쳐 입었다. 내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변백현밖에는 없다.
“경수야, 발에 피나.”
갑자기 들이닥친 백현은 그렇게 말했다. 발만 다친 줄 아나보다. 다행이다. 하지만 곧 떨어져있는 커터 칼을 발견하고서 이거 뭐야? 이런 게 왜 네 집에 있어? 묻는 백현을 보니 덜컥 무서워졌다. 들키면 혼나겠지. 혼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화를 내고 또 내게 실망하겠지. 안 돼, 경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소매를 매만지며 다치지 않은 팔 쪽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밝은 색의 아우터는 경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밝은 색의 아우터가 점점 피로 젖어들었다. 그리고 그걸 백현이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너 팔 왜 그래, 소매 걷어 봐.”
“왜? 추워서 입은 건데.”
“피 묻었잖아. 피나? 왜 계속 범위가 넓어지는데.”
“아니, 좀….”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경수는 고개를 숙였고 백현이 억지로 소매를 걷어 올리려 할 때는 크게 비명같은 소리가 났다. 일단 이거 벗어봐. 사태를 파악한 백현이 경수의 양 소매를 잡고 경수가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빼내자마자, 경악에 물든 백현의 표정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 이였다. 아, 현실이려나.
“왜 그랬어…. 이거 이걸로 한 거야?”
묻는 백현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커터 칼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체념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현은 예상과는 다르게 눈물을 보였다.
“뭐가 또 널 불안하게 했어. 어?”
“…백현아, 미안해.”
“내가 약혼해서? 어? 그거 때문이야?”
“….”
“당장 파혼하고 올게.”
그 말은 저번에도 했었잖아. 경수는 말만이라도 백현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에 대해 고마웠다. 자기 힘도 없으면서.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서 어느 하나 제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업, 아버지의 사업. 자기 것도 아닌 일에 휘말려서 결혼은 나와 하겠다고 말하는 변백현에게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커터 칼이 얼마나 비위생적인지 알아? 너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어쩔 뻔했어.”
“…미안.”
백현이 하는 말에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백현은 급하게 구급상자를 찾다가, 나 혼자 사는 집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집 근처 약국에서 급하게 소독약을 사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독약을 부어대는 변백현의 얼굴이 상처 때문에 쓰라린 내 얼굴보다도 훨씬 아파보였다. 아직도 눈물을 그치지 못한 채였다. 나는 그런 변백현의 얼굴을 보다가 미안함에 울었다. 따가운 것도 따가운 거지만, 미안함이 훨씬 컸다. 너는 내가 먼저인데, 나는 네가 다른 게 먼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
바르는 연고를 상처 위에 짜낸 뒤, 혹여, 내가 따가워할까 봐. 제대로 문지르지도 못하고 상처위로 계속 연고를 뿌려댔다. 손으로 상처가 닿지 않도록 연고만 살짝 두드리는 손에 상처는 따갑기보다는 간지러웠다.
“나는 네가 힘들다 하면, 아버지 사업 물려받지 않을 생각이야.”
“…너, 외동이잖아.”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너 지금 이러는 거보면 돌 것 같은데. 내 일보다도 도경수 네가 제일 중요해. 그거 알아? 티낸 적 없었지만 사업이란 것도 다 아버지가 벌여놓은 일이고, 내 일 아니야. 나는 그냥 너만 있으면 돼. 경수야.
우리는 서로를 한 없이 바라보다가 자연스레 입을 맞췄다. 행여나 상처가 쓸릴까봐. 경수의 손목을 꼭 붙잡은 백현이, 아픈 경수를 치유하듯, 부드럽게 혀를 움직였다. 어느 때보다도 느릿하게 키스했다. 길고 긴 말보다, 지금 나누는 입맞춤이 더 명료하게 제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겨울방학이 다 끝나고 개학을 했다. 일주일 정도 되는 짧은 기간 동안 학교를 나와야했지만 아이들은 그마저도 성가시다는 듯, 귀찮아했다. 그래도 입은 쉴새없이 움직였다. 화젯거리. 그 나이 때의 화젯거리는 별다른 게 없었다. 변백현 파혼했대. 헐, 벌써? 지금 이제 2월인데? 부터해서 그거 다 도경수 때문이라며. 까지. 아이들의 대화내용은 다 이런 비스무리한 내용들이었다. 그 중에는 오세훈과 김종인의 얘기도 있었다. 걔네 1학년 때 기억나? 서로 죽일 듯이 냉랭하더니, 2학년 2학기 때 갑자기 친해졌잖아. 진짜, 그 크리스 말대로 뭐 있는 거 아니야? 좀 의심스러운데. 게다가 김종인 최대주주 됐다며. 오세훈은 열도 안 받는데? 학교는 온통 그들의 얘기뿐이었다. 종인은 시끄러운 듯, 제 쿠션을 끌어다가 귀를 틀어막고 책상에 엎드렸다. 잠이나 자자, 어차피 곧 봄방학은 오고 2학년도 얼마 안 남았으니.
그러고 보니 변백현 좀 웃겼다. 약혼한 지 한 달밖에 안 됐잖아. 도경수가 신경 쓰였으면 처음부터 약혼을 하질 말던지. 종인은 자연스럽게 세훈을 대입시켰다. 세훈이였으면 단칼에 안 한다고 잘라냈겠지. 나였어도. 나였으면 근데 선택권한이 없었을 것 같기도 했다. 어찌됐건, 진짜 아들도 아니고 얹혀사는 거나 다름없는데. 하라면 해야지. 어차피 그런 건 나중의 일이었다. 결혼을 해도 나중의 일이고.
“김종인.”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누구인가 싶어서 뒤돌아 봤더니, 김민석이었다. 뭐야, 단체로 쌩 까놓고 이제 와서. 종인은 탐탁지 않다는 듯, 제 뒷목을 매만지며 민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최대주주 됐다며. 집에선 좀 어때?”
“뭐야, 정보 캐내려고 온 거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냥 전이랑 똑같지 뭐.”
“…아, 그렇구나.”
별다른 해줄 말이 없어 다시 엎드렸다. 민석은 뒤돌아서 제 무리 친구들에게 갔다. 크리스, 루한, 종대, 타오가 민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아무것도 없다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루한은 작게 한 숨 쉬었다. 그렇게 티 나게 물으니까. 아무것도 못 캐지. 크리스는 그래도 괜찮다는 듯, 작게 웃었다. 어차피 곧 탄로 나게 되어있는 거였다. 저 둘의 사이는 어느 누구보다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형제잖아. 한 집사는 형제.
“난 이 학교 졸업하자마자 중국 갈 거야.”
“그건 나도.”
“나는 못 가, 민석이 있잖아.”
“나도 종대 있잖아.”
넌 종대랑 무슨 상관이야. 크리스에게 되물으려던 루한이 종대의 어깨에 올려진 크리스의 손을 보고 하려던 말을 감췄다. 변백현이랑 도경수 쪽이란 쪽은 다 주고 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애하네. 중학생 때부터 봐왔지만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놈이었다. 게이 혐오하는 척 해놓고 지도 게이면서. 온갖 연막은 다 쳐놔서 저는 멀쩡한 척 하는 놈이었다. 마약에 손을 댔을 때도 그랬다. 미운 오리 새끼 떡 하나 더 준다고 박찬열을 꼬드겨, 약을 받아내고 저는 깨끗한 듯 손을 털었다. 그리고 김종대도 마찬가지였다. 난 한국기업들 별로야. 한국남자도 별로야. 했던 크리스는 어디 있는지. 김종대 회사는 중국관련기업이니까. 괜찮아. 하고 합리화시키는 크리스에 루한은 작게 실소했다. 머리는 비상한데, 좀 특이한 놈, 자기가 하는 일이 모두 옳은 거라고 믿는 애.
“민석이가 엄마 보고 싶대.”
“민석이 어릴 때라 잘 기억도 안 난다며.”
“그래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대.”
에이 뭐야, 다 같이. 놀러가려고 했는데. 크리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찾고 와.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종인이 한 숨 자고 일어나자, 벌써 4교시가 끝나 점심시간이었다. 저를 깨우는 세훈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급식실로 향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제 옆에서 잠들어 있던 찬열이 떠올랐다. 또 저러다, 밥 못 먹지. 반으로 다시 들어가자 세훈이 제 팔을 붙들고 왜? 하고 되물었다. 종인은 작게 찬열이. 하고 답했고 세훈은 작게 질투했다. 그 놈의 박찬열 전부터 되게 신경쓰네.
“박찬열, 일어나. 밥 굶을라.”
“어? 점심시간이야?”
“그래.”
“박찬열,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김종인 때문에 밥도 같이 먹고.”
이씨, 오세훈. 삐딱한 세훈의 말에 찬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친구 놈이었는데. 철벽같이 김종인을 지키려드는 탓에 찬열과 어정쩡한 사이가 되었다. 우정, 사랑. 사랑이 먼저인 놈. 근데 나도 두 개 중에 하나 택하라고 하면 사랑을 택할 것 같다. 그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니까.
종인은 부러 두 사람사이에서 걸었다. 아까 오세훈이 박찬열을 째려보는 걸 봤는데, 제가 사이에 끼지 않으면 분명 싸움이 날 것 같았다. 정말 오세훈은 구제불능이다. 밥 못 먹을까 봐. 친구로써 챙겨주려고 한 건데.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인 것 같기도 하고 전 같았으면 멋대로 내 손을 끌고 급식실로 향했을 텐데. 내가 박찬열을 깨우는 것도 기다려줬고. 뭔가 오세훈이 정말 변한 것 같았다. 사람 다 됐네. 오세훈.
봄 방학이 금방이라 그런지, 이번 주 식단표는 맛없는 음식이 하나도 없이 다 만족스러웠다. 물론 전지적 김종인 시점에서였지만. 오세훈은 은근히 편식을 해댔다. 이렇게 만든 피클은 피자집에서 파는 형식이잖아. 대량으로 사서 부은 거야. 몸에 안 좋아. 그러면서 오이를 통으로 잘라놓은 피클은 먹었다. 그냥, 못 먹는 음식이 있는 게 아니라,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봐봐. 이거 미트, 3분 아니야. 직접 만든 거네.”
입으로 반을 베어 단면을 보여주자, 그제야, 입에 넣는 세훈이었다. 찬열은 어색하게 끼여 있다가 종인이 제 식판위에 미트볼을 올려주자, 고개를 들어 종인을 마주봤다. 먹어. 미소 지으며 말하는 모습에 너는? 하고 되묻자, 나 배불러. 하고 식판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올려놓는 종인이었다. 배부를 리가 없는데? 밥을 반밖에 안 먹었어. 찬열은 생각했지만. 이내, 종인의 식판에서 밥이며 반찬을 가져가는 세훈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세훈 쟤 방학 때 키가 좀 큰 거 같네. 김종인 밥까지 다 뺐어먹었나 보다.
오세훈이 마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 우뚝 선 세훈의 키가 확실하게 자라있었다. 바로 옆의 종인의 키가 그걸 입증해주었다. 분명 종인과 똑같은 키였는데, 세훈이 종인보다 크다. 그리고 자연스레 어깨에 걸쳐지는 손, 찬열은 종인의 옆에 조금 떨어져서 섰다. 좋아 보인다. 씁쓸하게 속으로만 뇌까린 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좋지, 너도 있고 세훈이도 있고.”
나는 그 말에 조금이나마 희망을 얻었다. 네가 지금이 좋은 이유는 나도 있어서라는 걸, 네가 말해주어서. 오세훈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어서.
*
그 날, 세훈은 조금 열이 받아있었다. 박찬열이 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사귀고 있는 건 난데. 왜, 박찬열을 계속 신경 써. 세훈은 종인이 바라던 데로 종인을 때렸다. 사실 감정도 좀 실려 있었다. 손이 엇나가, 종인의 복부를 세게 가격했다. 종인은 그대로 벽에 기댄 채, 배를 붙잡고 윽윽 거렸다. 그래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건, 김종인이 웃고 있었으니까. 미소를 머금은 그 얼굴을 보니, 조금 더 열이 받았다. 때리면 좋아? 아프면 좋아? 왜, 때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은 걸까. 원인은 거기에 있었다.
“웃지 마. 왜 맞으면서 웃어. 병신같이.”
“…좋은 걸 어떡해.”
“넌 내가 죽도록 때려도 웃고 있을 거야?”
“….”
“나는 지금 널 딱 죽기 전까지만 때리고 싶어.”
그제야, 세훈이 화가 나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종인의 눈이 흔들렸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단지 내가 화났다는 이유만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종인을 보며 세훈은 낮게 한숨 쉬었다. 나는 때리는 데 흥미 없어. 그저 네가 맞는 게 좋다고 말하니까. 때리는 거야. 그런데 왜 자꾸 때릴수록 화가 나지? 아픈 건 넌데, 왜 내가 더 아픈 것 같지?
세훈은 몇 번이고 분에 못 이겨서 종인을 때렸다. 아프도록 발 등으로 종인의 다리를 찼다. 반항 한 번 없이 맞던 종인의 다리가 비틀거리며 풀썩 밑으로 꺼졌다. 무릎을 꿇은 채였다.
“세훈아, 더 때려.”
“미친, 그런 소리가 나와? 나 지금 열 받은 거 알아? 몰라?”
“그러니까. 화 풀릴 때까지 때려.”
“…널 더 때린다고 내 화가 풀릴 거 같아?”
얼굴엔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 세훈은 진심으로 열이 뻗쳐서 종인의 뺨을 내리쳤다. 종인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무릎을 꿇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지금은 저녁이었다. 학교에 갔다 와서부터 계속 냉전이었다가 맞기 시작한지도 거의 두 시간 째였다. 입술이 터져, 피가 맺혔다. 세훈은 종인을 일으키고 전투적으로 키스했다. 피 맛이 감돌아, 느낌 자체는 썩 좋지 못했으나, 키스밖에는 더 없었다. 서로 말없이 공유할 수 없는 무언가는.
급작스레 도어 록 소리가 들려 두 사람이 떨어져 갔다.
도어 록 소리가 들리자마자. 떨어져 나간 둘이었지만. 종인의 상태는 겉보기에도 멀쩡하지 못했다. 종인은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고 세훈만 자리에 남았다.
“일찍 오셨네요.”
아버지였다. 세훈은 어색하게 뒷목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종인은 거울로 급하게 제 모습을 살폈다. 입술이 터진 건, 어떻게 가릴 수 가 없었다. 팔이며 다리를 걷어, 멍울진 상처들을 확인한뒤, 다시 내렸다.
“종인이는 있니?”
“…아, 네.”
“방에?”
“네.”
종인은 급하게 책상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방문을 열자, 옆모습을 보인 채로, 책을 읽었다. 왼쪽 측면으로는 보이지 않는 입술에 난 상처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가 방 안으로 걸어들어 오셨다.
“불은 키고 책을 읽어야지.”
“아, 벌써 어두워 졌네요.”
“종인아.”
어색하게 고개를 꺾어, 옆을 바라보자 아버지는 조금 크게 눈을 떴다. 결국 봤구나. 상처.
“아니,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누가 때렸어? 어떤 놈이야.”
“…아, 별거 아니에요.”
“내 아들을 건드리다니, 참 겁도 없는 놈이구나.”
“…저도 그 친구 때렸으니까. 그냥 넘어가주세요.”
거짓말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낳았다. 아버지는 끝까지 물고 넘어졌다. 종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상관하실 일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살을 파고드는 통증들은 이미 익숙했다. 신경까지 깊숙이 자극한 타박상들은 종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훈아, 종인이 이렇게 될 때까지 넌 뭘 했어? 어? 종인이 누구랑 싸웠는지 알아?”
아버지가 조금 더 격양된 목소리로 방 밖의 세훈에게 말했다. 세훈은 결국 종인의 방 문 앞에 서서. 저도 몰라요. 하고 답했다. 우리는 끝까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경호원을 붙여야겠구나.”
“…아버지.”
세훈은 어렸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경호원이 붙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몹시도 귀찮고 괴로운 일이었다. 어디 함부로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했고. 친구와 놀지도 못했다. 뭐만 했다고 하면 경호원이 달려오는 바람에 세훈은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다 큰 아들에게 경호원이 붙는다니. 세훈은 허탈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설득시켰다. 제가 잘 볼게요. 종인이 잘 보호할게요. 아버지는 올바르게 자라온 종인을 맹신하는 듯 했다. 그래서 종인이 일방적으로 맞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일방적으로 맞은 건 맞다. 그래도 그건, 자기가 원해서 그런 거지. 절대로 온전히 일방적으로 맞기만 한 건 아니었다. 때려달라잖아요. 아빠가 김종인을 저보다 잘 알아요? 하고 되묻고 싶어졌다.
“그럼, 세훈이 널 믿고 경호원 붙이지 않으마.”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갑자기 심장이 저 밑까지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는데, 세훈은 안도한 듯 작게 한 숨 쉬었다. 아버지는 곧이어 말했다. 아버지가 더 이상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게 힘들 것 같구나. 아버지는 너희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리려 했지만, 이사진들이 좀 더 빠르게 후계자양성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학교에서는 기본 수업만 받고 후계자수업을 받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세훈과 종인은 후계자 수업을 같이 받게 되었다. 원래는 두 사람 중에 한 명을 택하려 했지만 급하게 한 명을 선택할 수가 없어서 일단 수업을 받아보고 두 사람 중에 좀 더 뛰어난 사람을 후계자 자리에 올리기로 한 거였다. 학교를 가는 날도 잠깐이었다. 봄방학도 이주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3월 3일, 개학을 했다. 반은 거의 변동이 없었지만 불가피하게 학부모들의 부탁에 못 이겨 이사장은 몇몇의 아이들의 반을 재배정했다. 세훈은 종인과 같은 반이 되었고 크리스의 무리들은 다 옆 반으로 붙었다. 종인과 같은 반이었던 종대도 마찬 가지었다. 반을 옮긴 쪽은 세훈이었다.
“이거 끝나자마자. 경영수업 받으러 가야해.”
육교시가 시작하자마자, 세훈이 가방에 짐을 쌌다. 찬열은 옆 분단에서 그런 세훈과 종인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책상에 엎어졌다. 좋겠다. 먼저 가고. 그것도 둘이서. 찬열은 못내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 김종인이 가면 학교에 있을 이유가 없는데. 찬열은 어느새부턴가 학교의 초점을 종인으로 맞췄다. 학교는 종인 때문에 오는 거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가야하는 대학에 대한 부담감도 전혀 없었다. 혹시 종인이 대학을 간다면 모를까. 그래도 찬열은 종인이 갈 대학에 진학할 수 없겠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올려 맨,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대기해있는 차에 올라탄 사람이 회사로 향했다. 모든 수업은 거의 회사에서 행해졌다. 개인 교사를 붙이고는 싶었지만 두 사람이 같이 배우겠다고 부탁하는 통에 그룹과외나 다름없는 식으로 두 사람에게 질의응답하고 간단한 서술형문제를 풀며 경영수업을 이어갔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업보다 좀 더 실용적인 수업이었다. 한솔그룹과 SJ제강기업이 서로 협의하여 결제하려 한다. 계약서의 문항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부당한 쪽이 있으면 적고 올바른 답을 써서 제출해라. 뭐. 이런 시덥지도 않은 재미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래도 기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내용들이었다.
“두 사람, 첫 수업인데. 선생님이 질문하나만 할께요.”
“네, 말씀하세요.”
“보통 경영수업을 형제 둘이서 동시에 받는 게 흔치않아서.”
“…아, 네.”
“왜 둘이서 같이 받겠다고 한 거죠?”
종인이 바로 대답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 거렸지만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고 선생님의 말에 대한 답변은 세훈이 했다.
“같이 배워야,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아, 배우는 내용은 다 똑같을 텐데.”
“서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걸 배우면 부조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아, 그 말이군요.”
세훈은 포장했다. 저와 종인이 같이 배우는 이유가 단순히 같이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후계자 자리에 대한 깨끗한 마음가짐을 내비췄다. 이건, 사실 종인과도 입을 맞춰보았던 사실이었다.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씀 드렸으니까.우리는 어찌되었건, 후계자가 누가 되었건 간에 끝까지 같이 가야하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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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결말 낸 거 같아... 잠시만여.. 아직 더 남았어.. 완결 35편 예정이여...ㅋ
이렇게 똥망인 연재텀에도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 뒤 늦게 달리면서 정독해주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여러 분 들 때문에.. 제가 정말 망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작품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었어요..
암호닉 끌고 올게요. 새로 오신분도 추가!
72%님 렌즈통님 심키님 판다님 안녕님 잉여님 텐더님 슈슈님
리마님 퐁퐁님 호호님 짜요짜요님
디니님 비밀님 파레라님 aa님 백백님 정모카님 삥님(정주행 힘드시죠..ㅠㅠ길텐데.. 죗옹죗옹)
29편이나 되는 긴 글 정주행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게으른.. 작가는 자꾸 썰만 쓰고.. 장편에 손도 못대서.. 오늘 급하게 세시간 만에 써재꼈네요..ㅠㅠ
다음 주에는 금방 써서 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