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17
w.규닝
17. 황금 밀밭
"김성규. 이거 봐."
"…."
"니가 자꾸 뚱하게 있어서 이렇게 됐잖아."
성규가 우현이 내민 캐리커처 종이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싫다는데도 억지로 이끌려 의자에 앉기까지 20분. 그에 비해 3분 정도만에 완성된 크로키는 역시나 성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환하게 웃고 있는 우현의 그림과 다르게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제 얼굴 하나. 화가 분이 그러시는데, 크로키는 원래 익살스럽게 그려야 제맛인 그림이래. 너처럼 이렇게 무표정인 그림 나오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데. 우현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역시 김성규야! 너 짱! 그에 성규가 귀찮은 기색을 띠며 몸을 돌렸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안 하겠다고 한 거였잖아."
"뭐 어때. 무표정도 예쁜데."
"지랄도 정도껏 해. 예쁘단 말 하지 마. 여자취급 당하는 것 같으니까."
우현이 성규의 지청구에 괜한 눈만 깜빡이다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까칠하기는. 정말 예쁘니까 예쁘다고 하는 건데. 우현이 자꾸만 캐리커처 종이를 팔랑거리자 인상을 찡그린 성규가 어디든지 좀 갖다 버리라는 말을 꺼냈을 때였다. 뒤처져 걷던 우현이 별안간 제 앞을 막아서 두 종이를 짧게 맞댄 것은.
뽀뽀! 그렇게 말해오는 우현의 목소리와 함께 캐리커처 속 우현과 성규가 입을 맞추었다. 성규의 입꼬리가 어이없는 비웃음을 날렸다.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재밌냐? 남우현. 종래에는 질린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려고 할 때였다. 가까이에 다가섰던 우현의 얼굴이 제 얼굴 바로 앞까지 들이밀어졌다. 성규는 벌어졌던 제 입술 위로 닿은 따뜻한 감촉에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입술은 금방 떼어졌다. 캐리커처 종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크게 뜬 눈 바로 앞에서 배시시 웃은 우현은 얄밉게도 고개를 까딱였다.
"뽀뽀 해달라는 뜻이었는데."
"……."
"니가 안해주니까 내가 해야지."
우현이 가만히 서 있는 성규의 팔을 잡아 끌며 다시 웃었다.
"항상 아쉬운 쪽이 지는 법이라잖아."
장미.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장미였다. 성규가 제 손을 붙잡은 우현의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너의 장미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 주는 사랑을 받아내기만 하면서, 이기적이게도 길들여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그런 존재. 생각을 정리하러 집 밖에 나온 것이었음에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은 길들여짐의 대가를 톡톡히 느끼고 있다는 것. 오히려 더욱 확고해져만 가는 이기심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너의 키스가 달콤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장미는 이기적이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의 장미를,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성규가 가만히 저의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나 그게 내가 될 줄은 몰랐다. 가끔씩은 다투고, 하지만 누구보다 익숙한 이의 손길을 바라는 장미는 그 상대에게 책임을 요구해 온다.
나를 길들인 것에 대한 잔인한 책임. 성규가 몇 걸음 떼지 않아 자신을 돌아보는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 책임은 되려 내가 져야 하는 것이라고.
*
우현이 짐짓 무서운 목소리로 제게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 성규를 쳐다보았다.
왜 이러실까. 우현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성규의 어깨를 저의 어깨로 툭 건드렸다. 왜그래. 담배같은 걸 또 숨겨야만 고분고분해지겠어? 우현은 결국엔 저의 배를 강타한 주먹에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항복을 외쳤다. 우현은 허리를 숙이고 잠시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사이에 멀찌감치 떨어져 앞서 걷고 있는 성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성규는 우현이 다가올라치면 반대쪽으로 보폭을 넓히며 떨어져 걸었다. 우현이 성규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뚝 멈추고 자리에 멈춰 섰다.
"같이 좀 가!"
"……."
"누가 보면 다른 일행인 줄 알겠네! 내가 거기, 야! 기다리라고!"
우현이 급기야 짜증 섞인 목소리를 높이며 인상을 구겼다. 몇 발자국만 다가갈라 치면 곧바로 옆으로 빠지는 성규의 발걸음은 한 번도 우현을 돌아다보지 않았다. 게다가 땅만 보고 걷고 있어. 우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성규의 태도에 입술을 깨물었다. 저게, 어디다 부딪히면 어쩌려고 저래. 우현은 요즘따라 시도때도 없이 변덕을 부리는 성규의 태도에 그동안의 화가 부글부글 치솟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먼저 표현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런데 이렇게 피하려고 드는 것 만큼은 화가 난다. 우현은 성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빠른 걸음으로 성규에게 다가섰다. 그에 맞춰 몸을 피하려던 성규의 팔을 세게 잡아 제 쪽으로 돌린 우현이 기어이 한 소리를 뱉으려고 했을 때였다.
"팔 아파."
홱 돌려진 성규의 고개는 여전히 제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같이 가자고 몇번이나 말했잖아."
"알았어. 같이 걸을 테니까, 팔 좀 놔."
별 거 없는 땅 위로 고정된 시선은 한결같았다. 성규가 저의 팔을 잡아 채고 있는 우현의 손을 힘없이 뿌리치면서 발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혼자 다섯걸음 정도 걸은 후에야 성규는 뒤를 돌았다. 우현은 제자리였다. 같이 걸어준다니까 왜 또 멈춰있냐. 성규가 어쩐지 굳어있는 우현의 얼굴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빨리 걸어 와. 우현은 나즈막한 그 목소리에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빨리 해 성규의 옆에 가 섰다.
확실히 이상하지만 어디가 이상한 줄은 모르겠다. 우현이 아까부터 심란해진 마음을 곱씹으며 제 옆을 묵묵히 걷고 있는 성규의 옆모습을 곰곰히 살폈다.
언제나 알 수 없는 김성규였지만 오늘은 훨씬 더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걷다 지쳐 걸국 자리하게 된 카페 안에서 든 생각이었다. 우현은 커피 위에 얹어진 생크림을 저으며 말을 아끼고 있는 성규를 쳐다보다 한 층 깊은 생각에 빠졌다.
혹시 오늘 어머니 생신이었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명수라고 불리던 그 남자와 관련된 일이 터졌다거나. 우현은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그 나름대로의 추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바깥에 나와 제대로 눈도 마주쳐 주지 않는 성규의 행동은 마땅히 화가 나는 게 당연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우현은 실어증 초기 증세라도 보이고 있는 사람처럼 다물어진 성규의 입을 주시하다가 턱을 괴었다. 말을 안 해주니까 언제나 답답한건 제 쪽이다. 우현이 성규의 면전에 대고 손가락으로 딱,하는 소리를 내었다. 성규의 고개가 살짝이 들렸다.
"…왜?"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나 해서."
"그냥. 오늘따라 피곤해서."
"그럼 집에 들어갈래?"
"아니."
"피곤하다며."
"집은 싫어."
성규가 부슬부슬하게 섞인 생크림을 한 입 떠 먹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들어갈래."
"니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아무래도 좋으니까."
우현이 심심한 대화를 끝맺으려 먼저 꼬리를 내렸다. 입에 생크림. 우현이 저의 입가를 닦는 시늉을 하며 성규에게 말했다. 성규는 제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며 눈에 초점을 잃었다. 그에 우현은 다시금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상을 찡그렸다. 또 저래. 도대체 김성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일까,하며 저마저도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였다. 남우현. 오랜만에 먼저 입을 연 성규는 달콤해 마지 않는 목소리로 우현의 이름을 불러왔다.
"어,어?"
갑작스러운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턱을 괴고 있던 우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성규가 제 앞에 놓인 커피잔을 의미없이 휘젓다가 웃었다.
"너는 누군가를, 보고싶은데 못 보게 된다면 어떡할거야."
성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이지 예상 밖의 물음이었다. 사랑해, 좋아해. 뭐 그런 말을 바란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뱉어진 물음에 당황한 우현이 허공에서 길을 잃은 손 위로 다시금 턱을 괴면서 멍한 입을 벌렸다. 보고싶은데 못 보게 된다고? 그렇게 다시 한 번 성규의 물음을 되묻자 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우현의 머릿속에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역시 아까 그게 맞았나. 우현이 길을 걷다가 추측해낸 수십개의 이유 중에 한 가지를 꼽았다. 역시 오늘이 어머니 생일이라던가 그랬던 걸까. 우현은 전주에 내려갔을 적, 내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성규를 떠올리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보고싶은데 못 본다라. 물론 당연히 슬픈 일이겠지만 괜히 감성적인 대답을 했다가는 더욱 진지한 분위기가 형성될 것 같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답해야겠다고 생각한 우현이 활짝 웃어보였다.
"뭘 어떻게 해. 보고싶으면 보면 되는거고. 볼 수 없는데 보고싶으면 그리워만 해야지 어쩌겠어."
우현의 대답에 성규가 작게 웃었다.
아직 그런 아픔 따윈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의 지극히도 여유로운 답변이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하지만 어쩌면 이 정확하고도 단순한 대답이 가장 현실적인 답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성규는 제가 휘젓고 있는 생크림을 보다가 아.하며 입을 벌리는 우현에게 크림을 한 입 떠먹여주며 화답했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해주었기에 자신도 마찬가지로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그래, 그렇게 해."
그냥 그리워만 해.
그 때 만큼은 진심으로 웃어주었다. 그에 우현은 성규의 웃는 모습을 보며 따라 웃었다. 이제야 좀 웃어주네. 안면근육이 굳어버린줄만 알았잖아. 시덥잖은 말장난과 함께 커피잔은 비워져만 갔다.
옥탑방을 나온 것은 오전 즈음이었는데 벌써 해는 지고 있었다. 심야 영화 보고 들어갈래? 우현이 카페를 나서는 성규의 뒤를 좇으면서 물어왔다. 집에 들어가기 싫다며. 최대한 늦게까지 할 수 있는 건 심야 영환데. 우현이 제 응큼한 속을 속이면서 순수한 척 물어왔다. 성규가 피식 웃으며 제 얼굴 옆으로 들이밀어진 우현의 얼굴을 멀찌감치 밀어뜨렸다. 컨디션 봐서. 그렇게 꽁꽁 언 두 손을 겉옷 주머니에 찔러넣고 나서야 둘의 걸음은 시내 한 켠에 위치한 서점으로 걸음을 떼었다.
*
김성규는 시 같았다.
꽤나 북적북적한 서점 안에서 느린 발걸음으로 진열된 책을 훑는 성규는 시, 그 자체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성을 채워주는 그런 사람.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여기서부턴 따라오지 마'하고 명령한 성규의 말에 열 발자국 정도 쯤 뒤떨어져 그를 좇는 우현의 발걸음도 마찬가지로 느려졌다. 성규의 눈은 잔잔하게도 그것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괜히 애꿎은 책을 하나 집어 든 우현은 책을 펼쳐 얼굴을 가린 채 눈만 쏙 빼내 성규의 뒷모습에다 시선을 고정했다.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 백 편의 시집을 읽는 것보다ㅡ그저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 뜯어보는것이 우현의 감성을 충전시켜 주었으니까. 책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던 성규는 지금 시가 되어 우현의 두 눈을 속이고 있었다.
성규에게 우현은 이미 관심 밖의 어떤 것이었다. 우현은 성규가 몸을 틀어 사라진 코너 옆으로 바짝 붙어 서며 입술을 삐죽였다. 애초에 서점 때문에 집을 나선 사람이라지만, 여기 들어서고 나서부터는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모습이 밉다. 우현은 언제나 제게 처음이자 모든것인 성규가 본인은 그렇지 않아 조금은 서운해지려는 찰나였다. 단 한번만 돌아보면 스토커처럼 저를 좇고 있는 눈과 마주할 수도 있을텐데 밉고, 또 밉다. 우현이 잔뜩 심통이 난 눈을 잠시 책으로 가렸다. 언제나처럼 김성규는 너무하다. 알게 모르게 잔혹한 천사라고 생각한 우현이 잠시 후에는 얼굴을 가렸던 책을 내려 성규의 뒷모습을 눈으로 찾았다.
성규가 제 자리에 멈춰 서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놀란 숨을 들이킨 우현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가.'
성규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서는 입모양만으로 말해왔다. 짧고 굵게 가라고 말한 성규는 오른 손을 들어 어서 꺼지라는 듯한 제스처까지 취해주었다. 우현이 불쌍하게 눈꼬리를 내렸다가 다시금 책을 들어올렸다.
치사해서 안 따라가. 우현이 제 앞쪽에 위치한 진열대 옆에 쪼그려 앉으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책 읽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다른 새끼들이 말이라도 걸면 어떡하지. 아니면 어떤 책을 집었다가 누군가랑 손이라도 맞닿아서 운명이라고 착각해버리는 시나리오가 펼쳐지면 어떡하지. 그것도 아니면 저만 이렇게 떨어트려놓고 먼저 서점을 벗어나서 다른곳으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우현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갖가지 변수들을 나열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김성규 성격이라면 세번째 이유가 가장 유력하다. 우현이 괜스레 불안해진 눈을 들어 다시금 성규의 뒷모습을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성규는 이미 그 주위를 떠난 뒤였다. 우현은 2층, 3층 높이까지 책이 진열되어 있는 서점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니겠지, 잠시 다른 곳으로 책을 보러 간 걸거야. 종래에는 작게 고개까지 끄덕였다. 천사는 잔인하기는 해도, 잔혹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우현은 진심을 다해 따라오지 말라며 눈총을 주었던 성규를 떠올리며 성규가 사라졌던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답지 않게 책을 읽고싶어하는 것 보니까 방해하지 말아야지. 우현은 흥미없는 책 두어권을 의무적으로 꺼내 들고 간이 의자에 앉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서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혼자 책을 보러 나온 것처럼 보이는 어떤 여자부터 서점 데이트를 즐기러 온 것 같은 풋풋한 커플까지 그들의 종류는 참 다양했다. 엄마 손을 잡고 동화책을 사러 온 어린 아이. 참고서를 훑고 있는 중고등학생 무리 하나. 잡지 코너에 둘러앉아 깔깔거리는 여고생 집단. 만화책 코너 밑에 죽치고 앉아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열 명 남짓한 초등학생. 우현은 책을 읽는다기보다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작게 마련된 소파에 앉아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을 뜯어보고 있으면 괜스레 자신은 수많은 인파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 웃기기도 했다.
김성규는 지금 뭐할까,하는 생각도 불쑥 불쑥 들었다. 벌써 서점에 들어선 지 세시간이 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사람들을 관찰하며 돌아다니던 세 시간동안 신기하게도 성규의 모습은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으로 '첫 눈에 반했는데, 데이트나 하러갈까요' 따위의 말장난을 준비했던 우현은 금세 맥이 빠져 있었다. 어딜 갔길래 보이지도 않아. 우현은 사람들을 둘러보던 눈을 돌려 성규의 뒷모습을 찾는 데에 열을 올렸다. 그 다음으로 드는 감정은 걱정이었다. 이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혹여나 혼자라서 외로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지극히도 오버스러운 그런 걱정.
시간은 벌써 아홉시 반. 아까 말했던 심야 영화라도 보러 가려면 지금 쯤이면 장소를 옮겨야 할텐데. 우현이 소리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시계를 쳐다보다가 본격적인 발걸음을 떼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내야지. 집에는 가야 할 거 아니야. 우현은 그렇게 자리를 일어나서 진열대 구석진 곳 하나하나까지 허리를 숙여가며 성규를 찾았다.
잔인하기는 해도 잔혹하지는 않은 천사는 역시나 다른 곳으로 사라진 건 아니었다.
우현이 20분 남짓하게 헤멘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 성규를 보다가 습관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 중요한 고서라도 읽을 기세로 서점에 집착하더니 성규가 머물러 있던 곳은 3층 한 구석에 위치한 어린이 코너였다. 누가 애니메이션 광 아니랄까봐. 책 취향까지 유치해서 귀여워 죽겠다. 우현이 참을 수 없이 귀여운 성규의 모습에 손을 번쩍 들어 그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떼었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성규의 자세였다. 가만히 무릎을 모은 채로 동화책 하나를 들고 있던 성규가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처음에는 졸렸구나,하고 생각했다. 세 시간 동안 책만 봐 왔을테니 졸렸을 만도. 그렇게 생각하며 성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에는 이상하리만치 잠잠한 성규의 태도에 의아해지려는 찰나였다.
"김성규."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은 그의 앞에 멈춰 서 이름을 불렀다. 우현의 목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든 성규가 펴고 있던 책을 덮으며 표정을 바꾸었다. 남우현이네. 성규가 세 시간 새에 반쯤 잠긴 것 같은 목소리로 우현의 이름을 불렀다.
"따라오지 말랬잖아."
"그래서 안 따라갔잖아. 그 쯤 읽었으면 이제 가자고. 시간 늦었어."
우현이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 액정을 성규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시간 봐, 아홉시 반이야. 그 말에 성규가 밑으로 내렸던 책을 집어들며 세웠던 무릎을 내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네. 늦었네. 성규는 담담하게 내려간 목소리로 진열대 아무 곳에나 저의 책을 끼워 넣었다.
"책은 안 사?"
"안 사."
그냥 읽으러 온 거였어. 성규가 고개를 들어올렸던 것도 잠시 우현의 시야 앞에서 몸을 틀어 걸음을 빨리 했다.
정말로 그냥 읽기만 하러 온 거였네. 우현이 빠르게 앞서 가다가 코너를 돌아 사라진 성규의 뒷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책 읽는 거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종종 올 걸 그랬나. 우현이 종래에는 저의 옆머리를 긁적이다가 성규가 앉았던 곳으로 눈을 돌렸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한참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던 김성규. 우현이 별안간 몸을 돌려 성규가 진열대 사이에 꽂아두었던 책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어린 왕자.
동화책 코너에 있었으니까 당연히 동화책을 보고 있던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은ㅡ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제 눈 앞에 펼쳐진 작은 동화책에 살풋 웃은 우현이 성규가 읽었던 책이기에 저도 눈으로 한 번 훑어보려 책을 폈다.
새 책이었음에 분명한 동화책은 의외로 어느 한 페이지를 떡하니 펴 놓았다. 우현이 한 번에 펴진 책 페이지에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를 살펴보았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펴 놓아 그대로 눌려버린 듯 익숙하게 펴지는 페이지는 어린 왕자의 삽화 하나와 그 옆에 앉은 작은 여우를 담아내고 있었다.
우현이 빳빳하게 펴진 책장에 손을 얹었다. 방금 전까지도 성규가 잡고 있었던 곳의 종이는 아직도 미지근한 온기를 갖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거야. 우현이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가 가득한 책장을 눈으로 읽어내리다가 익숙하게 펴진 페이지의 끝을 손으로 짚었다.
길들여짐에 관한 고찰.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현은 알았다. 도망치듯이 뒤를 돈 성규의 눈가가 조금은 빨갛게 보였었다는 것, 책을 오래 보아 충혈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쯤은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따로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 자연스레 펴지게 되어버린 페이지를 쳐다보다가, 겉 표지를 꾹 눌러 닫은 우현은 성규가 꽂아놓았던 그 곳에 어린 왕자를 다시금 꽂고 나서 몸을 돌렸다.
길들여 진다는 것은 좋은 건데. 그렇게…울 일이 아닌데.김성규. 우현이 성규가 사라졌던 코너 쪽으로 맥이 풀린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너에게 장미 같은 존재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예시로 등장했던 황금 밀밭 그 어딘가 즈음에 난 하나의 밀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만큼의 존재일지라도 네 인생에 내가 끼어들었음이 증명된다면.
그 정도여도 행복하겠다. 우현이 벌써 입구 앞에 도착해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성규를 보며 중얼거렸다.
* * * * *
"'길들인다'는게 뭐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너무 잘 잊혀지고 있는 거지.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관계를 만든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내게 있어서 너는 아직 몇 천, 몇 만 명의 어린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는 내가 아쉽지도 않지. 그러니 네게는 나라는 것이 몇 천, 몇 만 마리와 같은 여우에 지나지 않는거야.
ㅡ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아쉬워질 거야. 나에게는 네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또한 네게는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거야."
"같은 시간에 왔으면 더 좋았을 건데.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나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을 느끼겠지. 4시가 되면 벌써 안절부절을 못하고 걱정이 되고 말 거야. 행복이 얼마나 값 있다는 걸 알게 되겠지."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이야."
"…내가 나의 장미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하지만 넌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책임을 져야 되는 거야."
여우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