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고 싶을 만큼 큰 비밀이 있죠?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것들이 있죠? 어쩌면 그런것들을 전부 해소할 수 없을지 몰라요, 감정의 변화가 격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춘기 시절 나이라면 더더욱 그럴수도 있지요. 전부 이해합니다. 어떻게든 사람은 스트레스가 있기 마련이지요, 생활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면서 받는 고통들은 자신의 목을 메이게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는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지요, 그것이 이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은 생각을 하며 제 목을 조르고, 죽으려고 하는 것일테니까요. 당신은 이상한게 아닙니다. 괴로우시고, 힘드시다면 어서오세요. 이 카페로 자살을 도와드립니다. 여러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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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회원. 김성규
고등학교때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그 이유는 단지 하나였다. '전교 2등' 성적표가 손에 쥐어졌다. 아 이번에도 100등 안에 못 들었네, 하는 말들은 귀에 찰리가 없었다. 왜냐, 나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니까, 다른 세계에 사람이라 절대 신경쓸 이유가 없지. 그리고 그저 내 성적표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다, 차오르는 눈물 탓에 다시 고개를 떨궜다. 벌써부터 들려오는 잔소리가 소름끼치게 싫었다. 그것이 시초였다. 나는 항상 전교권에서 노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학원을 벌써 세개나 다녔고 나는 항상 그것이 똑바른 삶의 좌표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이 철봉에 손을 붙들고 모래 아래서 동전을 찾으며 깔끔했던 손을 잔뜩 더럽히는 짓을 할때 나는 항상 연필로 내 손을 더럽혔다.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또 다른 삶을 살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항상 위였으니까, 바닥에서 아이들을 올려다보기보다는 위에서 아이들을 내려다 봤으니까. 중학교때 일진 아이들이 공부한다며 시비를 걸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연필 또한 움직임을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심보였다. 너희들은 바닥에서 항상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항상 너희들을 내려다 볼테니, 그것이 삶의 신조였고, 대기업에 다니는 아빠도, 대학 교수인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바람대로, 그리고 내 삶의 신조대로 유명한 대학교에 들어왔다. 거기서도 경쟁은 항상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나에게 1등을 강요했고 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펜을 쉴새없이 움직였다. 어느날은 친구들이 제발 한번만 놀아달라며 떼를 쓰는 통에 5년만에 처음으로 노래방에 왔는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최신곡은 하나도 몰라 그저 돈만 제공하고 나온 꼴이 되었다. 나온 후에는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책 한자라도 더 볼수있는 시간이었는데. 그것 덕에 괜한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너희들 때문에 학점 깎이면 책임 질거야? 물론 내 화에 아이들의 대답은 전부 비난의 화살이었고 나는 그 화살을 그대로 받아쳐준채 아이들에게 화살을 꽂고 인연을 끊었다. 그것이 또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너희들을 내려다 볼거니까, 나중에 내가 잘되면 너희는 어차피 나에게 돌아오게 되있으니, 이깟 막말쯤은 참을 수 있지 않아? 비소와 함께 생각했다. 권력 앞에, 돈 앞에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두번째 자살을 생각한것은 대기업에 취직을 곧장 했을때였다. 판사나 검사도 합격하면 좋겠지만 비리가 많고 여자와 몸을 나누는것이 유흥이라 해 거절했다. 여자와 유희를 나누는것은 만년 공부벌레에겐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내 목적은 오로지 돈, 그리고 명예, 권력 이런것들 뿐이었으니, 여자와 친구는 그 후에 따라오는 부산물과 같은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펙과 능력으로 단번에 면접을 합격한 후, 일반 사원으로 지낼때, 인턴 사원 한 명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신조나 의견들이 같았다. 내가 항상 돈에 기를 쓸때면 동료들도 그랬고 윗선들도 마찬가지로 명예나 돈을 뺏기지 않기 위해 밤샘 야근을 한 적도 많았다. 그 인턴 사원만 제외한 채. 인턴사원은 말단 주제에 퇴근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퇴근했고 내 말에 토를 다는것도 매우 잘했다. 이런 커피 타와서 윗선들한테 이쁨 받겠어? 라고 했을땐 인턴은 왜 윗선들에게 잘보여야 하죠? 라고 답했고, 하는 일 마다 내가 꽉 막힌 사람이라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신경이 거슬리지 않을리 없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는 젊은 나이에 부장이 되고 말단 인턴은 사원으로 정식 채용 되었다. 맘껏 부려먹을 생각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띄이던 날, 신상 아우디 Q5 타고 거리를 나설때 바로 옆 인도에 인턴 사원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가운데에는 아이가 있었고 아이는 그 사원과 여부인의 손을 동시에 맞잡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웃음에, 난. 두번째로 자살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자살을 생각하게 한 것 역시 그 인턴에 의한 것이었다. 외국 출장을 동시에 다녀오는데, 면세점에서 그 인턴은 그저 유명하다던 제과들만 잔뜩 사들였다. 왜 자신을 가꾸는 명품같은것은 눈에도 여기지 않으면서 쓸데없이 살만 채워주는 제과들만 손에 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정말 그 인턴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차오르는 궁금함에 말을 꺼내어 왜 그런것만 사느냐고 타박을 내렸다. 인턴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아들 주려고요' 하며 대답했다. 나는 그 순간 까지도 가족간의 정이 뭐라고, 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길었던 출장이 끝나고, 힘들게 벌었던 돈으로 구매한 넓은 집에 몸을 들였다. 피곤함에 몸이 절로 쳐져 정장 마이 하나 벗지 못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아들, 가족.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겼는데, 사실 나한테는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다. 가족여행 한 번 못간 유년시절이 한번도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고 오히려 고마웠다. 내가 돈을 잘 벌수 있게 도와준 셈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주 약간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해맑게 웃는 모습에 사람간의 정이 아주 약간 부러워졌다. 왜 나는 저런 웃음을 짓지 못하지? 잠깐 생각했다.
복잡한 심경에 TV를 틀었다. 어느때처럼 유치한 토크쇼가 하고 있었다. 한 여자연예인이 자신의 아빠가 가수가 되는걸 반대했었는데, 결론은 도와줬다는 그런 2차원적인 동화같은 얘기였다.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제와서 후회할거면 뭣하러 후회할 짓을 하는거지? 멍청하게. 그리고 멍하니 계속 티비에 시선을 두었다. 여자의 아빠가 깜짝 등장으로 토크쇼에 들어섰다. 뻔한 전개가 눈에 보였다. 그래놓고 서로 질질 짜겠지. 성규는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외면하려고 해도, 대사가 계속 들렸다. 아빠가 미안해, 더 도와줬어야 하는건데. 아니에요, 아빠 이런걸로도 고마워. 여자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그제야 거두었던 시선을 다시 티비로 돌려 화면을 쳐다보았다. 서로 의지한 채 꽉 끌어안는 모습이, 여느 토크쇼에 나오는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동공은 점점 화면속으로 밀어넣어지고, 급하게 어릴때의 기억을 떠올렸지만 남는건 그저 학원, 길, 엄마의 잔소리, 아빠의 한숨. 신나게 놀았던 기억은 머리 어느부분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다. 바닷속에서 헤엄치며 놀았다던 사진을 보여주는 순간에도 한번도 놀러가본적이 없는 기억은 나의 가족과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없구나. 계속 더듬어 봐도 전혀 나오지 않는 추억들이, 마치 빈 깡통을 탈탈 터는 느낌이었다. 아까 후회할짓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알고보니 나는 여태까지 쭉 후회할 짓을 하고 있던 거였다.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너덜너덜한 공책 하나와, 전교 1등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엿보이는 성적표 하나 뿐.
두번째 회원. 김명수
잘생김. 나를 꼭 따라다니는 단어였다. 여자아이들은 내가 지나가면 환호를 질렀고 남자아이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어릴때 친척집에 가면 다른 아이들에게 신경은 무산이고 무조건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우리 명수는 누굴 닮아 이렇게 잘생겼을까, 사람들이 대부분 하는 소리였고 나는 내가 잘생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재수가 없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말했으므로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수 밖에.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남자아이들은 나를 보고 전부 다가오기 어려워했다. 외모 덕이라는 것을 나는 금방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어느정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외모니까 한층 멀어지는 것 처럼 생각되겠지? 나 혼자 파악한거였지만 아마 맞는것 같았다. 나는 특유의 친화력, 그리고 외모덕인지는 모르지만 아이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아이들은 항상 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나는 그것이 여전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생겼으니까, 나를 우러러 보는것이, 하나도 틀릴게 없다고 생각했고 나는 점점 아이들과 깊게 친해졌다. 이것이 내 생각만은 아닐지 모르지만.
내가 첫번째로 자살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7월 가량이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아이들은 운동장에 모여서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원체 땀이 나는 행위를 즐기지 않는 터라 스탠드에 앉아 여자아이들이 주는 음료수나 한가하게 받아먹으며 그들을 구경했다. 아이들은 신나게 돌아다녔고 공이 차는 소리가 운동장에 강하게 울릴 만큼 정신을 놓고 뛰어다녔다. 나는 그저 그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음료수를 한 입 들이키고, 곧 휘슬이 울렸다. 경기가 아마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아이들에게 다가갔지만, 이미 다들 자기들끼리 하이파이브를 하며 웃고 있었다. 내가 낄 자리가 없어보여 그때는 한발 물러났다. 그땐 그걸 그저 아무것도 아니게 여겼다.
그리고 교실로 들어왔을때, 아이들이 축구에 관한 얘기를 잔뜩 늘어놓느라 말을 낄 틈이 없었다. 개드립을 잘 친다는 칭찬이 무색하게 나는 말 수가 줄어들었다. 하나도 모르는 일에 무작정 바보처럼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싸보일테니까, 꼭 이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야만 하는 사람 처럼 보일테니까,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혼자 핸드폰을 꺼내들어 게임을 시작했다. 돈을 주고 받은 게임이라 재미가 나름 쏠쏠했다. 화면을 터치하며 게임을 하는데도, 이게 최신 스마트폰임을 알면서도 아이들은 나에게 주목을 하지 않았다. 게임은 금세 질렸다. 어느새 아이들과 소통하는것이 더 즐거웠다. 억지로 라도 자존심을 구기고 말을 걸었을 땐, 이미 자신들끼리 얘기를 나누며 물을 마시러 간 이후였다. 이것에 첫번째 자살 생각을 들게 한 이유였다.
두번째는, 조금 적나라했다. 항상 개드립의 신, 말 많다 김명수! 하던 아이들은 벌써 자신들끼리 짝짝을 이뤄 말을 이어나갔고 나는 그에 반해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다른 아이들이 축구선수 이름을 말하며 놀때면 나는 그저 말 없이 엎드려 책상에서 잠을 청했다.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말을 걸 수 조차, 받아낼 수 조차 없었으니까. 한참 그런 일로 소외가 계속 되고, 몇일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조금씩 말을 하고 있는 사이긴 했으니까, 여러 주된 얘기엔 끼지 못해도 소소한 말들은 자주 나눴으니 그들과 친하다고 나는 분명히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그 날 마지막 컴퓨터일반 시간, 두 명씩 조를 짜서 하는 과제가 지시되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소외되었다. 친한 애들끼리 짝을 이루고, 아이들은 웃음을 나누며 자연스레 자신과 친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옆으로 향했다. 나는 여전히 제 자리에 앉아있었다.
짝수였던 우리반 아이들은 한 명이 남았고, 그로 인해 그 아이는 자연스레 나와 짝이 되었다. 선생님은 남은 남아에게 가서 '저기 명수 있네, 가서 같이 해' 하며 등을 떠밀었다. 그 남아는 표정으로 하기 싫다는 것을 잔뜩 드러내었다. 나는 일부러 표정을 더 마주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공책에 낙서를 끄적였다. 그리고 앞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 아이를 올려다 봤을땐 찡그려진 얼굴 표정이 크게 다가와 압박하고 있었다. 나 얘랑 안 친한데…… 하는 말이 비수가 되어 내렸다. 찡그려진 표정과, 안 친한데. 하던 말이 두번째 자살생각 이유였다.
마지막은, 방과후의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아이와는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아이가 조금 말을 걸어줌으로써 나는 일부러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고, 그 아이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과제도 순식간에 끝마쳤고 생각보다는 좋은 친구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 수업이 끝난 후, 화장실도 같이가고, 물도 마시러 같이 갔다왔으니… 아마도 좋은 친구가 될거라고 나는 예상했다. 그리고 방과후 수업이 끝난 후, 노을이 질 무렵 가방을 가지러 오기 위해 반 문을 열려는데, 수군거리는 소리에 내 이름이 언뜻 들린거 같아 걸음을 멈추고 귀를 문 쪽으로 가져다 댔다.
' 김명수 왕따 새끼가, 존나 말 걸잖아… 앞으로 저 새끼랑 아는척 안했으면 좋겠는데, 예전에 얼굴 좀 반반하다고 놀아준 것 같다가 존나 나대, 씹새끼… 너네 앞으로 나 버리지 마라, 그새끼랑 짝 하기도 싫으니까, 아 씨발 진짜 오늘 기분 더럽네 '
이미, 나는 그들 사이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문을 열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가방은 아마 그 곳에 계속 있을것이다. 나는 이곳으로 절대 돌아오지 않을거니까.
세번째 회원. 장동우
돈이 없다. 내가 하는 소리는 항상 똑같았다. 아이들이 동우야 놀자! 하며 말을 걸어올때면 이상한 변명을 대어 피하기 급급했고, 무언가 사고 싶을때엔 사진을 여러번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중산층도 아닌, 그저 돈 없는 가정에 사는 사람이었다. 중학교 시절은 지낼만 했다. 친한 아이들은 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아웃도어를 입고 신발을 신었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메이커에 대한 개념 또는 무언가가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아이들도 전부 그랬다. 그냥 부모님이 사주시는 신발, 옷, 그런것들을 몸에 걸칠 뿐 다른 메이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빠가 옷을 사오실때마다 비싼거야, 라고 하며 장난으로 생색을 내면, 나는 그저 웃으면서 고맙다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낱 때가 묻지 않은 아이들은 그것이 전부였으니, 나는 그게 지속될거라 믿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입학식 날, 같은 고등학교로 온 애들은 전부 번쩍이는, 그리고 빛나는 아웃도어를 걸치고 있었다. 비싼 신발이라는게 딱 티가 나는 신발을 갈아신은 채 의기양양하게 자기 신발 바꿨다고 말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차마 내 신발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하필이면 아이들이 각자의 신발을 꺼내 보이기 바빴다. 나는 어디거야, 나는 어디거. 말하는 모습이 부럽고, 그리고 한 없이 내 신발이 부끄러웠다. 아빠는 마음이 명품이면 된다고 했지만 그 문장 하나가 이렇게 공감이 안된 적은 처음이었다. 가방에 빨리 신발을 집어넣으며 아이들의 질문이 건너오는 것을 차단했다. 그리고 강당으로 들어섰다.
입학하고 조금 지나서, 아이들은 교복부터 시작해서 모든걸 브랜드화 시켰다. 시계 하나도 외국 브랜드 런칭 한다고 하면 알바를 뛰어서라도 구매했고 아웃도어도 역시 100만원 가량 되는 비싼 브랜드 옷을 입고 다녔다. 내가 언뜻 말하며 이해가 안된다고 해봤지만 아이들은 크면 클수록 그런거라며 나를 억지로 이해시켰다. 왜 크면 클수록 비싼걸 요구하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올라간다고 비싼걸 요구해야 하나? 어차피 중학교때나 고등학교때나 회사가 바뀌거나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집안 사정은 다 똑같을 텐데, 왜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멀어야 하지? 나는 처음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다 따라하길래, 그날 밤 처음으로 아빠에게 졸랐다.
아빠, 아이들이 다 나이키 입고 다녀, 나도 하나만 사주면 안돼? 공사판에서 일하시는 분이었다. 항상 돌아오면 파스를 여러장 손에 들고 계셨고 철이 들어야 할 나이인 17살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면 좀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해. 하던 말들이 공중에 흩어졌다. 더 이상 아이들이 옷 자랑이나 신발자랑을 할때 자신의 옷을 슬그머니 숨기기는 싫었다. 그래, 철이 들어야 하는 나이지만 아직 덜 든 나는 조를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고 피하는 것이 두려웠다. 공사판에 흙이 잔뜩 베인 옷자락을 붙들고 말한 말에 아빠는 한동안 대답을 지연시켰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서야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알았어, 조금만 더 있다가. 긍정의 대답에 나는 미소를 지었고 그 날밤은 설레어 잠도 제대로 못 이룬것으로 기억했다.
몇일이 지나서, 나이키 운동화라고 구입한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나섰다. 정품 매장에서 구입한거라 의심갈 염려도 없었고, 아무튼 내 자신이 굉장히 당당해지는 느낌이었다. 교문에 다다라, 신발을 갈아신는 장소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각자 제 신발을 꺼내보였다. 다들 언뜻 봐도 고가의 제품들이었다. 나는 조용히 신발을 꺼냈다. 아이들의 물음이 직언을 날아왔다. 어 동우 신발 바꿨네, 야, 웬일? 어디꺼냐? 묻는 말에는 나이키라 당당하게 답했지만, 얼마 주고 샀어? 내건 13만원인데. 하는 말에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은 5만원 가량 세일하는 것을 붙들고 간당하게 넘겨 산 제품이었다. 나는 10만원이라고 거짓말을 쳤고, 돈에 물들어 가는 시대를 원망했다. 또 다시 신발을 넣고 싶어졌다. 13만원이나 하는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도저히 꺼내서 자랑을 더 할 수 없었다. 조용히 가방에 신발을 집어넣으며 교실로 향했다.
아이들은 또 다시 옷 자랑을 이었다. 야, 이번에 아디다스 신상이래. 제 옷을 들어보이며 자랑하는 친구에게 얼마냐고 묻자 가격은 30을 언뜻 돈다고 답했다. 30만원, 무려 2주일이나 생활할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일부러 눈을 내리깔고 있자 아이들은 내 옷을 집어보이며 너도 메이커 좀 사라, 브랜드 있는게 좋잖아. 오래가고 튼튼하고. 비싼게 좋은거야. 물론 딱히 이 옷이 깔끔하고 오래갈만큼 품질이 좋은건 아니었지만, 이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딱히 좋지만은 않았다. 마치 우리나라 학생들이 전부 메이커나 브랜드에 미친 사람마냥 여겨졌다. 동화되고 있는 제 자신이 미웠다. 아이들이 메이커 제품이 아닌것을 두고 놀림거리로 삼을때면 괜시리 부끄럽고 쪽팔렸고, 어느새 내 머릿속에도 메이커가 아니면 다 질 안좋은 제품이라고 주문이 밀려들었다. 이게 아닌데.
우리 아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야해, 지금 좋은 옷 입고 하는것보다 나중에 입는 것이 더 좋아. 아빠의 말은 이제 귀에 차지 않았다. 내달리고 있는 곳은 공사판이었다. 아빠처럼 시멘트를 나르고, 공사판에서 노동을 해서 얻은 돈으로 나는 미친듯이 메이커를 사댔다. 애들이 하는것은 다 하고 싶었다. 나쁜길로 빠져든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이 상황은 끝없이 악순환마냥 반복될것이 뻔했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브랜드를 사야하니까.
곧이 곧대로, 공사판에서 시멘트를 들고 있는데, 다시 한번 이 상황이 무한적으로 반복될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끝마치자마자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난 지금 우리 가정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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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방엔 여전히 네명이 존재했다. 자신들의 이야길 끝마친 회원들은 신세에 대해 한탄하기 시작했다. 나는 죽어야 해, 나는 죽고싶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의미가 없어, 하는 둥은 한탄이 대부분이었다. 어제는 어떤 자살방법을 생각했냐면… 하며 명수는 나름 섬뜩하다면 섬뜩한 소리를 뱉어냈다. 수다방이 끝없이 이어지고,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관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자살은 하실 생각이신가요? 성규와 명수, 동우는 전부 긍정의 대답을 택했다. 이유는? 관리자의 또 한번의 물음에 아이들은 각자의 이유를 길게 뽑아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모든게 스트레스 덩어리고, 위에 있는 얘기들도 마찬가지니까. 하며 여러 장황한 이유들을 늘어놓더니 급작스럽게 주제는 불만 토로로 넘어갔다. 그러고보면 경제 살린다면서 되는게 없어, 뭐 어떻게 살란거야. 이민을 가고 싶어도 그게 다 돈이 있어야 가잖아. 불만스런 느낌에 동조하듯 성규가 말했다. 알고보면 이 지구도 다 스트레스야. 성규의 말에, 관리자의 물음이 또 다시 들렸다. 이 지구에 살고 계시죠. 짧은 물음에 회원들은 다들 긍정의 대답을 내비쳤다. 아예 스트레스를 다 없애고 싶어요, d 결국 이것이 현실이군요, 원하는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회원님.
※ 보편적 얘기는 내일 나옵니당~@^^@ ※ 죄송함돠.. 자꾸 딴짓만 하네요 ※ 이 글의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슴돠, 잘 파악하셔도 좋고 아니어도 좋고! 커플성 아닌 글도 오랜만이네요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