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방을 나선 경수는 계단 아래로 향해야 할지 아니면 제 방문과 같은 문들을 하나씩 열어 보아야 할지 고민했다. 큰 계단을 내려가 아랫층을 둘러보다 혹시나 찬열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떡하지. 다시금 붉게 열이 오르는 얼굴에 계단 쪽으로 기운 몸을 돌려 제 방문과 마주한 방 앞으로 섰다.
♩♪♬♪♪♩
피아노 소리. 마주 선 방문에 몸을 바짝 기댄 경수는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둥그런 눈매 좀 더 크게 떴다. 마치 계단처럼 하나씩 올라가던 음들이 다시 내려오고 또 다른 음들을 만나 끝날 듯 계속 이어지는 것에 다시 뛰기 시작한 가슴을 억누른 경수는 마음이 붙은 듯 따라 두근거리는 손을 올려 문고리를 잡았다. 달칵, 그닥 큰 소리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내며 돌아간 문고리에 피아노 소리가 그치기라도 할까 잔뜩 몸을 움츠린 경수는 다시 이어지는 피아노 소리에 문 사이로 빼꼼 고갤 내밀었다. 집으로 들어오기전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줬던 창문은 커튼으로 숨겨져진 것만 빼면 제 방과 별 다르지 않은 모습이였다. 그러나 하나, 넓직한 방에 어울리는 피아노가 있었다. 피아노를 빤히 보던 경수는 그 위로 분주하게 놀려지는 한 손이 계단 벽 사진에서 본 것과 같아 좀 더 방안으로 들어섰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년. 백현이 찬열과 준면을 닮은 온화한 웃음을 얼굴에 피웠다. 잠자코 한손으로 같은 구간의 연주를 여러번 반복하던 백현은 다른 손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어 바닥에 내리고 아직 피로 얼룩덜룩한 손을 피아노 건반 위로 올렸다. 건반을 누르며 질끈 윗니로 문 아랫 입술. 그것을 보며 아마도 엄청 아픈 것이구나, 하고 경수는 제 손을 뒤로 감췄다. 아픈 듯 잔뜩 찡그린 얼굴과는 반대로 피아노 소리는 맑아 경수는 백현의 피아노 곁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 가까이서 보자 집중한 듯 인상을 쓴 백현이 이내 곧 몇 번이고 같은 구간을 연주하다 말고 제 왼손을 붙잡았다. 아플까, 따라 인상 쓴 경수가 걱정하기도 전에 작게 말아쥔 주먹으로 내리치던 백현이 이제는 피가 얼룩덜룩 묻은 건반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침과 같은 상황이 이어질까 경수의 눈이 또 다시 커졌다.
문고리 앞으로 달려간 경수가 긴장으로 몇 번 헛손질을 하자 문고리는 오히려 더 단단히 잠기는 듯 했다. 철컥 철컥 점점 커지는 소리에 덜컥 겁을 먹은 경수가 뒤를 돌아보자 피아노 덮게를 조심스레 내려 닫은 백현이 날카롭게 뜬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어지는 시선에 피아노 의자에서 내려온 백현은 바닥에 떨어진 붕대를 주워 제 손에 감으며 문을 향해 급하지도 또 느리지도 않게 여유로운 걸음을 옮겼다. 아.. 나,나는.. 전화기.. 작은 몸 숨길 곳이 없는 경수는 등을 문에 기댄 채 큰 눈을 바닥으로 내리 깔고 서툰 말로 서둘러 변명했다. 기분이 나빴을까. 저와 별 차이가 나지 않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금도 주춤이는 폼 없이 걸어오는 것에 경수는 내리깐 눈을 들어 백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난.." "변백현 밥은 먹어야지"
똑똑. 문을 가볍게 두드린 찬열이 문을 열고 틈 사이로 몸을 내밀어 백현과 마주했다. 그 바람에 무언가 말하려던 백현이 다시 작은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물자 찬열의 인상도 조금 굳어져 방문을 좀 더 열었다. 그러자 문을 기대고 선 경수의 몸이 앞으로 밀려났다. 그제서야 문 앞의 경수를 발견한 찬열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무릎을 굽혀 경수와 시선을 맞춰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놀랐어 경수야? 다정하게 물어오는 찬열에게 답을 해 주어야 하는데 가까워진 거리가 무색하게 옆을 빠르게 지나쳐 방을 나서는 백현의 모습을 보며 경수는 한참후에야 크게 뜬 눈으로 찬열의 물음에 고갤 저었다. 그러나 이미 저 때문에 겁을 먹은 것이라 답을 내린 찬열은 백현이 나간 방문을 닫고 경수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붉게 오르는 볼과는 다르게 안긴 품이 답답해 경수는 작게 몆 번이고 찬열의 어깨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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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이가 혹시 심한 말 하거나 그랬어? "
그래도 경수가 이해를 좀 해 줘. 큰 계단을 내려가며 잡은 손을 조심스럽게 당긴 찬열이 말하자 주위를 훑은 경수는 고갤 추켜들어 찬열의 얼굴을 바라봤다. 물음으로 생각했는지 찬열이 중간쯤 내려가던 계단에 멈춰 경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췄다. 백현이가 아파서 이제 자기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칠 수 없거든 그래서 지금 토라진 거야. 슬픈 기색보단 오히려 웃음기 섞인 말투에 다시 고갤 추켜든 경수가 찬열의 손을 힘 줘 잡자 찬열은 말을 더 잇는 대신 다시 경수가 계단을 수월히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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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는 찬열이 허릴 안아 올려주어 좀 더 편히 의자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제 앞에 마주 앉은 준면이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저를 바보로 생각하진 않을까 큰눈을 굴리며 준면을 훔쳐보던 경수는 준면의 옆에 빈 자리를 바라봤다. 아까 방을 나선 백현이 이리로 오지 않은 모양이라며 찬열과 준면이 대화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듣게 되자 저도 모르게 들어간 온 몸의 힘들이 탁 하고 풀렸다.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내기도 전에 경수는 찬열이 제 앞으로 미뤄주는 음식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일년 중 단 하루뿐인 생일에도 조촐하게 차린 밥상이 전부였는데 잔뜩 차려지는 음식들과 그 사이로 눈처럼 하얀 생크림 케잌을 보자 저를 위한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경수는 오늘이 누구의 생일인지 꽤나 궁금했다.
"집에 온 걸 환영해 경수야"
분주하게 차려지던 음식들이 제자리를 잡고 경수의 배가 소란스레 울릴 무렵 목을 가다듬던 찬열이 말했다. 정말로 환영한다고. 멍하게 박수치는 준면을 바라보자 준면은 제게 이미 얘기한 부모님은 내일 오신단 말을 몇 번이고 설명했다. 서운해 말아줘. 미안한 듯 웃는 준면이 마지막으로 덧붙이자 뜻을 알아들은 경수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