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별 다를 것 없이 흘러가던 그런 날.
“김남준, 미안해. 나 지금 진짜 전속력으로 뛰어가고 있어.”
3월 초부터 시작된 동아리 신입생 모집 후, 면접과 수습을 거쳐 최종 선발된 20기 새내기들을 위한 신입생 환영회였다. 그리고 나는
“아, 진짜 미안. 내가 밥 살게. 이제 늦는 일 없어.”
신입 시절부터 죽이 잘 맞았던 김남준과 함께 3팀의 팀장이었고, 모여야 할 시간보다 훨씬 늦은 지각생 신세였다.
“나 거의 다 왔어! 들어가서 봐! 어어!”
신환회가 열리는 술집의 간판이 가시거리 안에 들어왔고, 나는 새로 산 워커를 혹사시키며 전속력으로 달려 계단을 올라갔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벌컥 문을 열었는데,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조용해지고 온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생경한 얼굴들에 당황한 나는 시선을 내리며 뒤쪽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직 환영회는 시작하기 전이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우리 팀을 찾았으나 술집이 워낙 넓어 쉽지 않았다. 한참 눈을 굴린 끝에 마침내 저 끝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김남준을 찾았
“탄소 팀장님. 이제 오십니까?”
어디서 나타난 건지, 어금니를 꽉 문채 웃느라 얼굴의 온 근육을 다 쓰는 것 같은 괴이한 표정의 석진 오빠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빠 얼굴 진짜 그렇게 쓰지 말라니까..”
“야.”
“오빠 미안해, 진짜. 알지, 나 그 동안 사정 있어서 참여 못했던 거.. 이제 안 늦어. 진심.”
“알지. 알지. 그럼.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봐준다.”
“미안해 오ㅃ..”
한껏 미안한 얼굴로 인사를 마치고 지나치려는데 내 팔을 확 잡아끌곤
“그리고. 신입생들 앞에서는 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잊지 마세요. 탄소 팀장님.”
“아, 맞다. 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근엄한 얼굴에 급 쫄았으나 곧 얼굴을 풀고 웃어 보이는 석진 오빠를 지나 하나하나 관문을 거치듯 미리 와 있던 팀장들, 회장단들과 인사를 했고
“아이고, 탄소 팀장님. 이제 오십니까? 좀 늦으셨네요?”
마치 미리 연습한 듯 건들거리는 포즈와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 익숙한 얼굴.
“아이고, 민윤기 부장님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입니다?”
“팀장님이 이렇게 늦으셔야 되겠습니까? 네?”
윤기는 내 코트 깃을 툭툭 건드리며 뭐가 좋은 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야, 나 늦었어. 빨리 가 봐야 돼. 안 그러면 김남준이 나 부숴버릴지도 모름.”
윤기는 계속 장난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쪽에서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김남준이 있었기 때문에.
“...알았어. 이따 한잔해.”
시무룩해진 윤기의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이따 봐. 윤기를 지나쳐 우리 팀 쪽으로 가는 도중에
“탄소!”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두리번거리다가 반대편 쪽에서 호석이가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게 보였다. 행사팀장이 된 호석이는 잠시 후 있을 환영회 진행을 위해 큐카드를 정리하고 있었다.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곤, 소주잔을 들이키는 시늉을 했다. 호석이도 내 손짓을 따라하며 웃었다. 이따 봐. 크게 입모양을 한 후 우리 팀 테이블로 최대한 빨리 걸어갔다.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고, 팀원들과 웃으며 이야기 중이었던 김남준이 나를 발견한 후
“어. 저기 오셨네요. 저분이 탄소 팀장님이세요.”
팀원들에게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는 게 보였다. 미리 얘기해뒀는지 팀원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기 시작했다. 가슴께에 달아둔 이름표들이 흔들거렸다. 나도 함께 인사하며 재빠르게 이름들을 스캔한 뒤 한 명 한 명 얼굴들을 둘러보는데
.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별 다를 것 없이 흘러가던 그런 날.
그런 보통의 날이, ‘그 날’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달력에 빨갛게 동그라미를 치도록 만든 그 날을 있게 했던 건
그 애가 나를 보고 눈웃음 지었던 그 1초.
그 1초였다.
“? ...탄소 팀장님..?”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며 어리둥절해 하는 김남준을 보니 생각났다.
전에 김남준이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어.
‘너, 어떤 사람한테 첫눈에 반한 적 있어?’
‘아니. 한 번도 없는데.’
다들 나를 향해 엉거주춤 서 있는데, 나는 자꾸 웃음이 났다.
“김남준 팀장님.”
“네?”
“지금이요.”
나는 직감했다.
꽃샘추위도 물리칠 눈웃음.
바야흐로 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