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므파탈, 황팀장. 오늘은 팀장님 아니야.
01, 여느 때와 같은 퇴근 시간. 근데, 이 사람과 같이면 어디든 평범한 건 없어.
평소와 같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할 때 즈음에 늘, 그가 있을 옥상으로 성큼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탓인지, 문을 여닫을 때면 삐걱삐걱, 요란한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덕에 인상을 찌푸리는 건 기본이었고.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려 놓고 신발으로 비벼 끄는 사람이, 바로 내가 늘 만나는 사람. 황민현이다.
그는 생김새와 다르게 다정하고, 세심했으며, 똑똑하기까지. 게다가 이 회사 회장님의 차남이었으니. 회사 여성들의 마음을 훔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랬다. 분명, 저와 있을 때 시도 때도 없이 여사원들이 그에게 말을 걸며, 슬며시 주전부리를 챙겨주는... 그런데, 그런 그에게 문제가 있다면 말이다. 조금 모자란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물론 죄책감은 없다. 그는 잘생겼고, 돈도 많고, 다정했으며, 귀여웠으니까. 오히려 좋은 조건이 아니던가.
"오늘은 조금 늦었네."
“응, 알잖아. 요즘 프로젝트 구성하느라 바쁜 거.“
아-, 그랬지. 하며 제 뒷목을 잡고 머쓱해 하는 그의 행동이 얼핏 귀여워 보여 피식 웃었다. 그런 그에게 걸어가려고 하자, 그의 큰 손바닥을 내보이며 아직은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왜인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슬쩍 갸우뚱하며 가만히 서있었다. 그는 저를 한 번 보고선, 코트 안주머니에서 소형의 탈취제를 꺼내 제 몸에 칙칙 뿌려댔다. 담배 냄새라도 날까, 걱정하는 건가. 그럼 끊으면 될 것이지. 참 모순된 사람이다. 어느정도 냄새가 빠졌는지 그의 큰 키에 맞게 길쭉한 다리로 몇 걸음 안 걸어, 제 앞에 우뚝 섰다.
밥 먹으러 갈까?"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발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그는 매일하는 입맞춤이 그리도 좋은지, 귀는 새빨개져서 입을 틀어막으며 웃었다. 그런 그의 귀를 보고니 놀리고 싶어졌다.
“자기야, 귀 엄청 빨개.”
“내가 불어 주고 싶다“
내 말에 그의 온 얼굴이 붉어지자, 그의 손을 제 눈높이에 맞추고, 손가락에 호-,하고 찬바람을 불어 넣고 잔뜩 부끄러워하는 그보다 먼저 옥상 문 앞에 섰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더니, 이내 찰랑 거리는 생머리를 저의 손으로 쓸어 넘기며. 성큼성큼 제 앞으로 걸어왔다.
"밥 말고, 우리 집 먼저 갈까?"
"그래야겠는데. 지금은."
그의 말에 푸스스하고 웃자. 그는 내 손을 덥석 잡고 급하게 옥상을 빠져나왔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잡아 지하 주자창으로 내려가, 그의 부의 맞게 비싼 외제차에 우리 둘의 몸을 실었다. 급해 보이는 이 상황에서도 그는 다정함의 정석이란 타이틀에 맞게 조수석에 앉아 있는 안전벨트를 꼼꼼하게 매주었다.
어제 밤에 그는 워낙 급했던 그인지라, 빠른 속도로 그의 오피스텔에 도착했었다. 차 안에서 그를 건들이고 싶었던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진지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조금 망설이곤 그만두었다. 그 이후에는 아마 둘 다 어떻게 되던 상관없었다는 듯 둘의 와이셔츠와 블라우스를 거칠게 벗어낸 기억밖에는 기억이 없었다.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황민현을 한 번 보고, 또 처음으로 받았던 선물인 귀걸이가 옆 테이블에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니 문득, 어이없던 첫 만남이 생각난다.
- 부제 1화, 만남은 항상 그래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더라구요. 늘. -
작년 이맘때 쯤 제 적성엔 안 맞던 + 갈구던 상사 때문에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클럽이나 배회하며 지내던 차에 서류 지원 넣었던 회사에서 '합격되셨습니다.' 라는 문자가 띡하고 왔다. 그래, 뭐. 거기까진 좋다. 근데, 회사를 그만두고 있던 정장들은 짜증 나는 부장이 생각난다며 다 가져다 버린 게 생각났다. 한숨을 땅 꺼져라 푹 쉬고, 나갈 준비를 하고 백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 형편에 맞고, 깔끔한 옷을 찾고 있는데 웬 남자가 저를 불렀다. 당연 처음 보는 사람이 제게 말을 걸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얼굴에 물음표를 단 표정으로 부른 남자를 올려 봤다. 아니, 미친 존나 잘생겼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보다 더 잘생긴 것 같았다. 심각한 얼빠인 내 입에선 '헉.' 소리가 필터링도 안 거치고 그냥 나와버렸다. 아, 쪽팔려. 제 반응을 재밌다는 듯 보던 남자가 주변을 살피더니, '손 좀 잠깐 잡아도 될까요?' 라고 물어보는 바람에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은 제가..., 아."
서로에 대한 통성명은 끝났는데, 본론은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뒷목을 긁는 남자의 행동에 이 사람 설마 잘생긴 얼굴을 이용해서 납치해가는 납치범인가. 싶어 대충 둘러대고 일어나려는데, 무슨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길래 그냥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실은..., 부탁을 하나..."
처음 본 사이에 부탁? 무슨 부탁? 진짜 납치범 아냐? 정말 일어나서 가려던 걸 그 남자의 말 한 마디에 털썩 앉게 됐다.
"제가 결혼을 해야 하는데 실은 하기 싫거든요. 그래서 오늘 하루만 제 여자친구인 척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 비용은 드릴게요. 뭐든 다."
뭐든 다? 그럼 내 면접용 정장도 꽁돈으로 얻는 거라는 생각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생각조차 안, 아니 차단하고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가요. 일곱 시에 이 건물 레스토랑에서 만나신다면서요. 근데, 정말 뭐든 다 해 주시는 거죠?“
'하하하, 네. 그럼요' 하며 웃는 남자의 얼굴에 나도 절로 웃음이 났다. 물론 공짜로 옷 생겨서 그런 건 아니고. 남자는 저를 앞장서며 내가 입을 옷을 열심히 고르고 다녔다. 이게 뭐라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르더니, 꽤나 단정한 원피스를 제게 건넸다. 입어보라는 건가. 잠깐 아무 말 없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아 입고 나오려는데, '아, 잠깐' 남자의 목소리에 '?'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뭐야... 라는 심정으로 원피스를 들고 가만히 서 있는데,
"여기부터 여기까지 주세요."
남자의 행동이 참 가관이었다. 이 옷들을 다?? 누굴 주려고... 생각하던 차에 남자가 '이거 다 소담 씨 거예요' 라는 말에 '네?!??' 라는 말밖엔 안 나왔다. 돈지랄도 유분수지 진짜.
”이거 다요? 오늘 하루만 입을 건데...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말하자, 이 경제관념 없는 남자가 하하하-, 웃고는 '그냥 가져요.' 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미친놈 아니야, 진짜.
남자가 사준 옷에, 악세서리에, 잔뜩 치장을 해도 단정한 것들이라 그런지 전혀 화려하게 꾸민 티가 나진 않았다. 꽤 빳빳하게 굳은 저를 보던 남자는 살풋 웃어주며 손을 건넸다. 긴장되는 나머지 그냥 남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근데, 그게 지금까지 오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게다가 그 남자가 제 남자친구가 되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화장대에 올려져 있던 첫만남 때 사준 귀걸이 덕에 괜한 향수병을 일으킨 모양이다.
곤히 자고 있는 황민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설레는 감정이 몽글몽글 가슴 안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 감정을 참지 못하고, 황민현의 볼에 슬며시 입을 맞추자,
"뭐 해."
“헙.”
아, 이게 아닌데. 제가 황민현의 볼에 입을 맞추자 바로 눈을 뜬 황민현이 잔뜩 당황에서 바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황민현의 손이 제 팔을 잡고,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에 놀라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제 딸꾹질에 푸하하하, 웃는 황민현 때문에 쪽팔림은 모두 제 몫이었다.
쪽팔림에 몸부림치며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벽에 걸린 거울로 제 얼굴을 확인하자 잔뜩 붉어져있었다. 이거, 또 황민현이 놀리겠네. 몰라, 씻기나 해야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감싸면서 거실로 나오는데, 식탁에 밥을 차려둔 그에 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런 내 반응이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하는 황민현이 싱긋 웃어보였다.
“네가 했어?“
"국이랑 계란말이만..."
맛있겠다. 말을 하고 식탁에 앉으려는데, 잠깐만 하는 황민현의 목소리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머리 말려야지. 안 말리면 감기 걸려."
"말려줄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그의 손에 이끌려 침실 내에 있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헤어 드라이기를 들어 조심스럽게 제 머리를 휘휘 만지는 투박하면서 서툰 손길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집중하는 입을 내놓고, 꼼꼼한 손길로 말려주었다. 금새 말려진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주는 황민현이다.
”고마워.”
- 오늘 아침 황팀장님 아니고, 소담의 남자친구 황민현 님께서는 -
일어난 지는 한참 됐는데. 소담이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봐 번뜩 눈을 뜰 수가 없다. 그러다 소담이가 놀라 뒤로 자빠질 것 같고, 그냥 계속 자는 척하자니 답답하고, 어떡하지. 그냥 뜰까? 아니야. 놀라면 어떡해. 하며 내적 고민 중이었는데, 고맙게도 친절히 제게 입을 맞추는 소담에 웃음을 꾹 참으며 입을 뗐다.
"뭐 해."
제 말에 화들짝 놀라, 볼이 빨갛게 물드는 소담이를 보자 괜히 놀리고 싶은 맘이 들었다. 밥 먹을 때 또 놀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욕실로 들어가는 소담이를 멍하니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