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ting Slowly
w.김새벽
A
1.
본래 김 성규는 이상하게도 사람을 이끄는 남자였다. 얄쌍하니 매끄러운 눈꼬리라던가, 웃을 때면 해사하게 빛나는 미소 같은 것이 그랬다. 그의 미소는 따듯한 햇살 같았으며 파아란 하늘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 입을 다물고 똑바로 설 때면 위축될 정도로 날카로웠고, 그러면서도 가끔씩 드러내는 허점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팔색조 같은 그의 주위엔 항상 웃음소리와 사람들이 가득했다. 방패 같은 웃음에 둘러싸여 다치지 않고 사랑받으며 자라왔다. 그 속에서 김 성규는 웃고 있었다.
그랬었다.
2.
살갗을 찔러오는 서늘한 공기에 그는 애써 눈꺼풀을 들었다. 머리맡에서 꼿꼿이 편 시계의 두 팔을 보니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방은 아직 새벽의 장막이 걷히지 않은 듯 어두웠다. 김 성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배개 커버를 익숙하게 벗기고 방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진득하게 제 몸을 핥고선 도망간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한기에 김 성규는 양 팔을 감고 배게 커버를 세탁기에 대충 던져 넣었다. 그리고 커피를 내리고, 커튼을 젖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은 고요히 침묵하고 있었고 그 위로 조심스럽게 눈만 내려앉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얀 깃털에 덮여있었다. 한 곳도 빠짐없이 흰빛으로 가득했다. 시끄러운 옆집 꼬마의 발자국도 없었다. 온전히 하얬다. 회백빛 구름은 날아가며 계속 흰 깃털을 떨어뜨렸고, 깃털은 공중에서 이리저리 춤추며 우아한 발레리나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숙련된 발레리나는 온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추악한 것들 위로 감싸 안듯 누웠다. 토기가 치밀었다. 김 성규는 서둘러 커튼을 닫았다. 방은 다시 진회색 공기로 바뀌었지만 김 성규의 표정은 여전히 시리도록 흰빛이었다.
김 성규는 서둘러 방에 들어갔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추워졌다. 몸을 기어 올라오는 그것은, 추위로 위장하며 저를 괴롭혀오는 그것은. 김 성규는 애써 잊으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침대로 다시 올라갔다. 두툼한 솜이불을 덮었음에도 한없이 춥기만 했다. 이불 속에 누워있는 게 아니라 눈이 내리던 그 빨간 도로 위에 누워있는 듯했다. 아니야. 여긴, 그곳이 아니야. 애써 생각을 환기시켰다. 겁쟁이 같은 제 모습에 벽이 비웃어오는 게 느껴졌다. 맞아 난 겁쟁이야. 눈을 감았다. 벽의 비소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2년 전 밴드 보컬이었던 제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귀를 막았다. 벽의 비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과거 자신의 노랫소리가 뇌에 울렸다.
"I don't know you. but…"
풋기 어린 목소리가 힘들게 잠궈 놓은 기억의 상자에서 슬금슬금 새어나왔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 있는 소년에게선 쉬이 정의내리기 힘든 독특하고도 신선한 감성이 가득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묘한 설렘이 소년의 목소리에 어룽어룽 섞이어 추억과 함께 실려 나왔다. 그리고 지금 성인이 된 김 성규에게선 더 이상 풋내는 나지 않았다. 그저, 사람 많은 출근시간의 지하철에서 날 법한 소리. 사방을 무채색으로 물들이는 네모반듯한 키보드 타자소리 따위가 차가운 목소리에 대충 얹어져 무미건조하게 공기를 울릴 뿐이었다.
김 성규는 자꾸만 저를 괴롭히는 그 이명에 이어폰을 거칠게 귀에 꼽고 아무 노래나 재생시켰다. 소리 크기를 왕창 높이고 눈을 감았다. 비웃음소리가 가수의 목소리에 조금 묻혔다. 이명이 드럼소리에 섞여 흐릿해졌다. 김 성규는 그제야 조금 더 편하게 누웠다. 목소리와 악기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이야기에 몸을 맡겼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눈을 감았다. 김 성규의 몸은 붕 떠올라 침대가 아닌 저 차가운 바다의 심연으로 가라앉아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고요한 세계. 밴드의 음악은 그곳으로 저를 이끌었다. 황홀했다. 노래는 클라이막스로 치달았다. 노래의 흥분은 점점 고조되어가고 가수의 에너지는 부서지기 직전의 파도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클라이막스의 순간, 보컬은 비웃으며 김 성규에게 속삭였다. 난 너의 아픔 속에, 너의 고통 속에 기생하고 있는 아름다운 벌레야.
김 성규는 제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저 깊은 심해에서 다시 침대로 와버렸다. 김 성규는 제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끼며 나지막히 내뱉었다.
씨발.
다시 잠들긴 글렀다. 자꾸만 고이는 침을 삼키며 김 성규는 이어폰을 뺐다. 어찌나 볼륨을 높였던지 침대 위에 나뒹구는 이어폰에서 희미하게 소리가 흘러나온다. 김 성규는 꾸역꾸역 몸을 움직여 mp3를 껐다. 모든 소리는 사라졌다. 아직도 식지 않은 땀을 대충 이불 속에서 말리며 눈을 감았다. 고요한 방은 조금씩 제 심장소리로 채워졌다. 아직도 심장은 늦출 줄을 모르고 달리고 있다. 아마 방심한 상태에서 눈을 보아서 그러리라. 눈 생각을 하니 다시 한기가 돌았다. 손만 뻗어 전기담요의 온도를 좀 더 높였다. 한동안 꼼짝도 못할 것 같다.
3.
눈을 볼 때마다 이렇게 발작(까진 아니더라도)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보게 되었을 때만 그럴 뿐.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젠 집에서 나와 혼자 살아 괜히 가족에게 미안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겨울마다 이러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눈을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김 성규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놀던 때를 상기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 성열 그 자식 드럼 때문인지 팔 힘은 좋아서 항상 나를 괴롭혔었지. 김 명수가 제 옷 속에 눈덩이를 넣었던 것도 떠오른다. 저를 맞추겠다며 눈덩이를 들고 달려오다 미끄러졌던 장 동우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어느새 김 성규는 회색 방이 아니라 하얀 운동장 위에 앉아있었다. 하늘은 온통 하얬다. 구름도 하늘 속에 흠뻑 녹아들었다. 운동장도 하얬고, 도로도 하얬고, 나무도 하얬고, 벤치도 하얬고, 입김도 하얬고, 바람도 하얬고, 제 앞의 아이들의 웃음도 하얬고, 성규도 하얬다.
그 모습을 가만히 둘러보던 김 성규가 웃었다. 색은 없었다.
4.
김 성규는 영 뚱한 표정으로 목도리를 둘렀다. 혼자 사는 대가로 해야만 하는 몇 가지 조건 중의 하나, '눈이 오는 날이면 밖에 나가 영상통화 하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갑자기 눈이 내리는 것만 아니면 이젠 어느 정도 괜찮은데도.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제 아들이 걱정되시는 듯 당신의 아들이 성하게 잘 있는 모습이라도 봐야 안심이 되는 듯하다. 그것이 비록 겉모습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믿고 싶은 것이다. 괜히 심통이 나서 죄다 검은색 옷으로만 입었다. 대상 없는 분노였다. 그 날, 저를 덮쳤던 트럭의 운전자나, 하필 제게 심부름을 시켰던 아버지나, 노래의 볼륨을 높여 들어 경적소리를 늦게 알아차린 저를 원망하는 건 그만 둔지 오래다. 이제는 다 부질없는 짓이다. 가끔씩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미는 것만 뺀다면. 결국 김 성규는 코트부터 워커까지 올블랙으로 차려입었다. 검은 코트 위에 얹어진 하얀 손이 바다 위를 떠도는 빙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를 뒤로 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복도에도 눈이 소복히 쌓여 있다. 김 성규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눈을 볼 때면, 그리움이 라던가 쓸쓸함, 후회, 추억 등이 한데 엉키어 괜히 마음이 복잡해진다. 사고를 당한지 3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상처가 났던 자리에는 상처 대신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았다. 이제는 아리지는 않지만 볼 때마다 기억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괜히 입이 깔깔해졌다. 가만히 눈을 바라보던 김 성규는 불어오는 찬바람에 정신을 차리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뗐다. 실뭉치들이 잔뜩 엉킨 듯 마음이 싱숭생숭 복잡했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도 내릴 때도 복잡한 마음은 여전했다. 다른 게 있다면 복도보다도 확연히 낮은 기온 정도. 놀부 마누라보다도 더 매서운 바람이 제 뺨을 자꾸만 때린다. 따가운 바람에 김 성규는 잠시 귀를 만지작거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눈이 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은 없지만, 오매불망 제 연락만 기다리고 계실 당신께 좀 더 화사한 배경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어머니 가슴에 큰 상처를 입힌 막내아들의 가련한 효도였다. 분명 바람은 차갑고 매서웠지만 그 위에는 훈기와 붉은 기운이 사풋이 올라타 있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바람마저도 치장한 듯하다. 그래 봤자 칼날 같이 날카로운 건 변함이 없지만. 기분이 좀 나아진 김 성규는 살짝 웃으며 다시 옷을 여몄다.
5.
거리는 차갑게 훈훈했다. 평소에는 한없이 차가워 보이던 눈도 거리가 온통 붉은빛이니 왠지 따듯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제서 김 성규는 제 모습을 바라봤다. 온통 시커먼 모습이다. 머리카락도 검고, 입은 옷도 검고. 드러난 피부만 서느렇게 희다. 돌연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거리는 수만은 색들의 향연이었다. 저 뒤에서 걸어오는 여자의 웃음소리는 소라색이고, 방금 제 옆을 지나간 남자의 숨소리는 갈색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저 남자의 눈웃음은 연노랑색을 띠었다. 그리고 김 성규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슨 색일까?
6.
욕심이 없어지면 열정도 없어지더라.
7.
가볍게 전화를 끝내고 김 성규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날씨가 추웠기도 했고, 집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왠지 그 집에 들어가면 다시 추억이란 이름의 아픔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또 맞서지 않고 슬금슬금 꽁무니 치는 제 모습에 김 성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린 입꼬리가 쓸쓸했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처럼 혼자 온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제각기 둘 이상씩 모여 하하호호 떠드는 모양이 김 성규는 그저 신기했다. 저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 같았다. 마치 극장에 앉아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결국은 제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김 성규는 잘 안다. 화사한 그들을 가만히 관조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거리도 카페 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모두들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이미 해진 거리는 햇빛 대신 화려한 조명과 은은한 미소로 가득해 어둡기는커녕 낮보다도 더 반짝반짝 빛났다. 창가에 앉은 김 성규만 밤의 어둠을 죄다 빨아들인 듯 어두웠다.
8.
한참을 그렇게 창가에 앉아 사람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커피는 이미 다 식은 지 오래였다. 이미 온기는 다 날아가고 미적지근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내 다시 커피 잔을 내렸다. 웃는 산타 모양의 컵이 다시 바닥에 앉았다. 한참을 앉아있는 게 꼭 제 모습 같아 김 성규는 잠시 애상에 젖다가도, 이내 무료하단 표정으로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냈다. 은색 휴대폰이 하얀 손가락 사이로 시리게 빛난다. 그 모습이 너무 차가운 것 같아 김 성규는 휴대폰을 바꿀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 그것마저도 귀찮아져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고등학교 때 알던 친구들과의 연락은 다 끊겼다. 그래도 스물한 살 즈음까지는 서로 점점 멀어져 가는 현실이 안타깝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꾸역꾸역 연락을 했었는데 사고 이후로는 모든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번호까지 다 바꿨다. 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차라리 친구들을 만나 추억을 안주삼아 술이라도 한 잔 마시라고. 그리고 다 잊어버리라고. 김 성규는 그 말에 그냥 웃어버린다. 반박해 봤자 그들은 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동정 받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제 치부가 드러나는 게 싫었다. 꽁꽁 잠궈 놓은 기억의 상자를 열어버리면, 결국 이 모든 현실을 인정해버리고 정말로 제 자신이 비참해질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무니 저를 대신해주기라도 하는 건지 주위에서는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 '쟤가 그 김 성규야?', '쟤 교통사고 당했다며. 가수 준비한다고 하던데…, 어떡하냐.'. 타인들의 입에서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촌철에 김 성규의 가슴에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날카로운 비수는 독으로 바뀌어 하나하나 망가뜨려갔다. 행복, 추억, 기대, 그리고 설렘. 그리고 김 성규는 입을 닫았다. 노랫소리를 잠궜다.
"…아."
김 성규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 휴대폰을 넣다 말고 기억에 빠져서는 허우적대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지난 3년 동안 생각도 나지 않던 것이 오늘따라 자꾸만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른다. 보고 싶지 않은 쓰라린 기억에 김 성규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
김 성규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새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방금까지는 그저 물결처럼 흘러가던 사람들이 한데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김 성규는 목을 쭉 빼서 이리저리 뜯어보았지만 사람들에 가려 보이는 것은 없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저건 뭘까. 밖에 나가면 느껴질 한기에 잠시 머뭇거리던 김 성규는 결국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 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B.
1.
남 우현은 눈이 오면 늘 사색에 잠긴다. 왜 나는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이 똑같이 행동했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래도 한 번 더 후회를 한다. 눈이 내리면 유난히 텅 빈 가슴이 더욱 시리다. 한때는 그 공동이 너무나도 허전에 미친 듯이 먹기도 하고 여자와 뒹굴기도 했지만 변한 건 없고 오히려 더욱 외롭기만 할 뿐이었다. 그 공광함을 메꾸려 이것저것 다 해보다 우연찮게 선택한 것이 '노래 부르기'였다.
"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
별 기대 없이 부른 노래인데, 첫 구절이 제 입에서 나온 순간 그 진동은 공기를 타고 귀에 흘러들어와 남 우현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지금까지의 응어리가 조금, 녹은 듯한 느낌이었다. 녹은 응어리의 찌꺼기는 가슴에서 머리로 솟구쳐 눈을 통에 빠져나왔다. 볼 위를 타고 흐르는 눈물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남 우현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2.
어머니는 첫째 부인이 아니셨다. 입에 올리기도 낯선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셨다.
덕분에 첫째 부인과 어머니의 기싸움은 엄청났다. 첫째 부인의, 딸. 그리고 둘째 부인의, 아들. 이 애매한 상황은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는 커녕 건장하심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을 신경전에 몰아넣었다. 만약 그 애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혹은 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텐데. 이 모호한 입장은 "어쩌면…"이란 바람을 어머니께 불어넣었다. 덕분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당신의 기대에 다다르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었다. 우수한 성적, 수려한 외모, 다부진 몸, 포용하는 인성, 그리고 통솔하는 위엄.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더 열심히 해서 그 애를 이기라는 냉기어린 말뿐이었다. 아닌데, 내가 원했던 것은 이게 아닌데.
내가 바랬던 건 수고했다고, 사랑했다고, 이 두 마디로 충분했는데.
A
9.
카페 문을 열자마자 나를 반긴 건 찬바람이 아닌 노랫소리였다. 희미했지만 분명했다. 아메리카노 컵을 고쳐 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수록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굉장히 따듯한 음색이었다. 김 성규는 냉랭한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 앞으로 나갔다. 점점 따듯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와 제일 앞줄에서 서서 노래하는 가수를 본 순간, 성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 녹아내렸다.
10.
성규가 고등학교 시절에 보컬을 맡았던 밴드는 근방에서 '혼수상태 비트'라고 하면 다 알아볼 정도로 꽤 유명한 밴드였다. 소리의 조화가 좋은 밴드라고 칭찬이 자자했었는데 그중에서도 보컬이었던 성규는 그 목소리로 많은 사랑과 기대를 받아왔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특유의 감성이 가득했고, 한 번 들으면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중독성도 있었다. 그에 주위 사람들은 당연히 성규가 가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고 성규 또한 당연히 가수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성규는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었다. 미래에 대한 설렘과 불안함이 오묘하게 섞여서 두근두근 가슴 뛰던 그 시절이. 그것은 흡사 눈 내리던 하늘을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항상 뭔가 엉성한 동우의 웃음소리도 참 좋았고, 비쩍 골았으면서도 저를 괴롭히겠다고 달려드는 성열도 좋았다. 아닌 척 조용한 척 하면서 은근히 성열과 함께 장난치던 명수도. 가슴부터 발끝까지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림이 가득했었고, 울렁울렁이는 상태를 즐길 수 있었던 그 때. 눈이 멀 듯 강렬한 조명과 날카롭게 귀를 찔러오는 뜨거운 환호 소리. 열광하는 관중들을 내려다보며 함께 소리 지를 때 김 성규는 확신했다. 제가 가야 할 길은 이 길밖에는 없다고.
11.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남자는 쏟아지는 눈발의 입맞춤을 받으며 그렇게 서 있었다. 그의 머리칼이나 어깻죽지에는 이미 눈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도 성규의 눈에는 눈이 아니라 흰 꽃잎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봄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새싹 냄새나 햇살 냄새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성규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제 목소리에서는 쨍한 찬바람 냄새가 났다. 바람 같은 목소리는 칼이 되어 성규의 가슴을 찔렀다. 성규는 제가 한심해서 웃었다. 저 남자의 목소리가, 저 봄이 제 얼음을 녹여줄지도 모른다는 헛된 생각을 했다. 그냥. 그냥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
성규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 자신이 창피했다. 나는 오늘 처음 본 남자에게 뭘 바라는 걸까. 어차피 제 목소리는 이미 얼어붙어 다시는 녹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해 버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까지 겨우겨우 욱여넣었던 감정이 터질 것만 같았다. 3년 동안 잘 버텨왔지만, 남자의 목소리에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새봄의 시작을 알리는 개나리꽃과 같아서 성규의 마음 속 얼음덩어리를 사르르 녹여갔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조금밖에 녹이지 못할 바에야, 다 녹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아예 건들이 말아야 했다. 곪아 있던 상처가 결국에는 터져버렸다.
시야가 흐려졌다. 성규는 맺힌 눈물을 애써 집어넣으며 뒷걸음질쳤다. 눈물에 굴절되어 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리저리 휘어지고 흔들리는 세상은 제 모습과 비슷했다. 두려워졌다.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과 결국 조우했다. 몸에 한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성규는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몇 모금 마셨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김이 모락모락 났지만 찬기가 올라와 몸이 덜덜 떨렸다. 집으로 가야 한다. 집으로 가서, 샤워를 하고,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노래를 들어야 한다. 현실이 아닌 저 깊은 곳으로 떠나야 한다. 성규는 아메리카노를 대충 버리고 주춤주춤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이라도 저 목소리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12.
처음 눈을 떴을 때 들었던 생각은 '무(無)'였다. 몸뚱아리만 덩그러니 남아 영혼 대신 공허함만 가득 찬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흐느끼며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성규야, 일상생활은…, 일상생활은 가능하대."
당신은 평소에도 내가 상심할 만한 말은 잘 못하고 돌려 말하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어머니는 내 눈을 피하셨다. 어머니의 말을 적당히 필터링하자면, 성규야, 너 노래는 못할 거래.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 도로에서 타이어의 절규를 들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두 번 다시 오디션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눈만 껌뻑이고 있는 나를 어머니는 차마 바라보지 못하셨다. 그저, 내게 참회라도 하듯 머리를 숙이셨다. 묻고 싶었다. 엄마, 엄마가 왜 미안해? 의문을 품고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아버지가 출근하시는 그 높은 빌딩보다도 더 뻣뻣한 그 표정에 그냥 눈을 감았다. 아빠, 아빠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죄책감을 느껴? 입은 열지 않았다. 입을 열면 미안하다는 말이 붙잡을 새도 없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병실에서 누워 있는 동안 내 모든 감정을 정리했다. 필요 없는 기억은 버리고, 버릴 수 없는 기억은 저 멀리 놔두고. 울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위로할 때에도 뒤에서 수근거릴 때에도 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기방어일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가면을 썼다. 내가 가면을 쓰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내게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말을 건넬 사람도 없으니 말수도 줄어들었다. 점점 맨얼굴을 드러내기가 무서워졌다.
13.
덜그럭덜그럭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샌가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성규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더 듣고 싶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 모순이다. 왜 자꾸 그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의 목소리에 과거 자신의 꿈을 대입하는 건지, 아니면 자세히 들어야 느껴지는 목소리의 공허함을 메꿔 주고 싶어서인지. 남자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알게 모르게 쓸쓸했다. 샛노란 개나리. 연둣빛 잎은 없는 개나리. 다정한 사람은 상처가 많다. 그 남자도 상처가 있는 걸까.
"저기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성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의 그 남자가 기타를 짊어지고 저를 따라오고 있었다. 성규가 깜짝 놀라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니 남자는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야들야들하다.
"이름이 뭐예요?"
"왜요?"
의도치 않게 말카롭게 말이 튀어나왔다. 성규는 속으로 자책했지만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는, 이미 몸에 밴 버릇이라 어쩔 수 없었다. 틱틱거리는 제 태도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남자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성규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남자는 앗!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을 안 알려 드렸네요. 전 남 우현이에요."
남 우현…. 속으로 되내이자 봄 향기가 물씬 났다. 이름마저도 봄이구나. 성규는 계속 우현의 이름을 중얼거리다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다시 뒤돌았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자꾸제 방패 속으로 들어오려 한다. 성규는 다시 발의 속도를 높였다. 괜히 기대했다 또다시 실망하는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다. 성규는 더이상 아프고 싶지 않았다.
B
3.
타인이 생각하는 내가 될 게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무척 뜬금없었다. 그냥…, 그 날은 하늘이 파란 물감이라도 푼 듯 유난히 푸르렀고 햇살은 평소보다도 더 따듯해 눈이 녹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녹아가고 있었다. 햇살의 손길에 얼음이 조금씩 녹아가고 있을 때에야 나는 내가 얼어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도 보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느 누가 겨울에게 가까이 오려 하겠는가. 하지만 아직 어렸던 내게는 그 사실이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서글펐다. 삶의 목표가 송두리째 뽑혀간 느낌이었다. 내게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반 아이들과의 사이도 좋았고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그들과 나만의 미묘한 경계선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웃음은 그들에게서 나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을 웃음으로 밀어내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신다. 내가 '재미없는' 남자라고.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성격도 좋고, 교우관계도 좋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다. 그 때의 나는 지나치게 '완벽'한 남자였고 그건 충분히 '재미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지만 아직 어렸던 그 때에는 그 말에 많이 힘들어했다. 그 당시 나는 '완벽'해야 했고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성격도 좋고, 교우관계도 좋은 '남 우현'은 '완벽'하기 위해서 '재미있는' 남자가 되어야 했다. 순전히 모순이다. 어떻게 모든 것이 '완벽'한 남자가 '재미있는' 남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걸 깨달은 날은 내가 처음으로 타인과 섞이지 못하고 떠돌던 빙산이란 걸 알아차린, 내가 녹아간 그날이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하고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끝이 따듯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방의 물건들을 다 때려 부쉈다.
난장판이 된 방을 기겁하며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나는 일종의 쾌락을 느꼈다. 그것은 동시에 서글픔이기도 했다. 시종일관 내게 무표정으로 대하시던 당신의 표정이 무관심 외에 다른 감정으로 뒤덮인 원인이 나라는 사실은 묘한 희열과 뿌듯함을 불러일으켰지만 처음으로 나에게 보인 감정이 나를 향한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이라는 사실이 나를 눈물짓게 했다. 그리고, 그 방에서 어머니를 바라보며 눈물짓던 그날에야 나는 알았다. 내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남자였고 눈물은 아직 얼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흘려본 눈물은 뜨뜻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후련했다. 거울을 바라보니 눈이며 코며 불그죽죽했고 꽤나 못난 꼴이었지만 그 후련함이 마음에 들어 웃었다. 색은 없었다. 예전 같은 검은 색은 아니었지만, 색은 없었다.
4.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이 되니 내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에 내가 벗어났던 것은 집이 아니라 나를 억압하던 그 모든 것이었음을.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내가 방을 다 엎어버렸다는 것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공포와도 같았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집에서 이질적인 나의 방. 그 때는 그것이 나는 더 이상 이 가족의 울타리에서 있지 못할 거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듯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그것이 맞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집은 곧 나의 세계였다. 그리고 나의 세계에서 내가 있을 곳이 사라지자 나는 발밑의 땅이 사라지는 듯했고 그것이 무서워 나는 밖으로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집을 나섰던 밤의 공기는 아직도 내 곁에 머무르는 듯 생생하다.
5.
그 뒤는 그냥 진부한 이야기다. 어느 삼류 드라마의 남주인공의 사연으로도 나오지 못할 케케묵은 이야기. 나는 점점 집에 들어가는 횟수가 줄었고, 어머니와 대판 싸우고 나는 그 망할 후계자의 자리는 때려치웠다. 어릴 적부터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수없이 참아 왔던 그 말은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별 거 없었다. 후련하기보다는 허탈함이 더 컸다. 나는 기껏 이 한 마디를 못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나. 어쨋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나는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굳이 나갈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셨지만 '집'에서 나와 내 스스로 뭔가를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몸 깊숙히 밴 수동적인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나는 그 사실에 절망해 점점 저 바닥으로 향해 갔다. 어둡고 차가운 심연으로. 그러다 발견한 것이 음악이고, 지금 나은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음악이란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다.
누군가 내게 내 목소리가 참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도 내 목소리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얄팍한 껍데기 같은 내 목소리를.
A
14.
그림자는 가기 싫다는 듯 길게 늘어졌지만 성규는 꿋꿋이 찬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그 따듯한 음색이 자꾸 귓가에 맴돌아 이어폰을 꼽았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싶었는데 흘러나오는 음악은 부드럽게 서글펐다. 당신이란 사람 정말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하네요…. 곡을 바꾸려다 손이 시려 그냥 다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mp3를 만지작거리며 성규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무엇보다도 찜찜한 점은 남자, 아니 우현이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왜. 나를 왜 따라왔을까. 성규는 잠시 그가 게이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다 하다하다 남의 성 정체성까지 나오나 싶어 어이없는 웃음만 나왔다. 제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다. 이젠 하다 못해 같은 거 달린 남자에게서라도 사랑받고 위로받고 싶은 건가 싶었다.
'위로받고 싶다'
성규는 우뚝 멈췄다. 드디어 제가 왜 도망치는지, 그리고 왜 우현을 보면 자꾸만 묘한 감정이 드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이것은 같은 상처를 가진 자에 대한 동질감이며 마도 이제 내 방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처음으로 상처를 덮은 거즈를 떼어냈다. 오랫동안 꾸역꾸역 덮어온 상처는 예상대로 형편없었고 목소리를, 세상 전부를 잃은 성규 또한 형편없었다. 지금까지 외면해왔던 사막같은 제 모습과 처음으로 조우한 성규는 울고만 싶었다. 그는 결국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리며 폭발할 것 같은 이 안타깝고 갑갑한 감정을 털어놓고 싶었다. 노래하고 싶다고, 소리지르고 싶다고 투정부리며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싶엇다. 하지만 성규는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다시는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므로. 그런데 알아버렸다. 인정해버렸다. 울컥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목구멍이 시큰해지고 숨소리는 거칠어지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울고 싶은데 울 수도 없다.
"저기요!"
성규는 천천히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성규의 시야에는 코도 귀도 붉어진 채 저를 쫓아온 봄이 있었고 이내 그 봄은 눈물에 굴절되어 성규의 시야에서 자리를 넓혀갔다. 눈시울이 뜨겁다. 성규가 울먹이는 것을 본 남자는 놀라지 않고 성규를 꼭 안았다. 그의 가슴팍이 성규의 눈물로 물들어갔다.
15.
"김 성규."
"김 성규구나…. 김 성규."
성규의 이름이 신기하기라도 한 것인지 자꾸만 제 입에서 굴려대는 우현에 민망한 듯 그만 중얼거리라며 성규는 불퉁거렸다. 자꾸만 저를 다정스레 바라보는 우현의 시선이 민망해 성규는 고개를 돌렸다. 나이가 스물 셋이라던 우현의 집은 딱 그 나이에 맞게 적당히 아담했다. 구경하고 싶으면 구경하라는 말에 성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을 보면 주인의 성격이 보인다는 말대로 우현의 집은 정말 우현스러웠다. 햇살이 잘 비칠 것 같은 넓은 창과 곳곳에 가득한 연녹색 화분. 책꽂이에는 정리가 안 된 채로 잔뜩 꽂혀 있는 책들로 가득했고 군데군데 악기도 보였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뭔가… 빠진 느낌. 그 기묘한 위화감에 성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우현의 목소리에서도 느껴지는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뭘까. 골똘히 생각하는 와중에 우현이 뒤에서 물었다.
"뭐, 차라도 마실래요?"
"됐어. 그냥 차가운 물이나 한 잔 줘."
성규는 우현의 물음에 대충 대답하고선 다시 머리를 굴렸다. 그게 대체 뭘까. 이 위화감은. 한참 그렇게 끙끙대는데 갑자기 투박한 손이 성규의 목을 덥썩 잡았다. 손끝이 따듯했다. 깜짝 놀란 성규가 뒤를 돌아보니 씁쓸한 표정의 우현이 성규의 목을 양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손을 타고 목에 곰살맞게 옮아오는 온기가 따듯했다.
"왜 자꾸 목을 얼리려고 그래."
따듯한 온기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서글펐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 감정은 동정이라기 보다는 동질감에 가까웠으니. 우현과 눈을 똑바로 마주한 순간, 그제서야 성규는 집안 가득한 위화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사진이 없다. 그리고 우현의 눈동자에는 추억이 없다. 성규는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찬물 말고 이거 마셔요. 방금 끓였으니 따듯할 거야."
성규는 우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꾸만 제 목을 녹이려는 이 남자의 의도는 뭘까. 오늘 처음 본 생판 남을 집에 데리고 와서는 더 이상은 목을 얼리지 말란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에게서 느끼는 동질감? 그것도 아니었다. 비슷했지만 묘하게 달랐다. 성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우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곧았다.
"왜 자꾸 나를 챙기려고 그래?"
"왜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그렇잖아. 우리 오늘 처음 만난 사이야. 내가 우연히 너를 보지 않았다면 만나지도 않았을, 그런 사이. 그런데 왜 자꾸 나를 챙기려고 그래? 왜 나를 붙잡았어?"
챙기고 말고 그럴 게 어디 있어. 그냥 처음 보는 순간부터 눈에 콱 박혔는걸. 그냥… 형을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어요. 우현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입은 웃으면서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 성규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괜히 심통이 나서 우현을 지나쳐 쓰러지듯 쇼파에 앉았다. 우현의 웃는 모습이 어머니께 웃어드리던 제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서. 괜히 짜증이 났다. 답답했다.
"기분 나빠요? 남자가 이런 말 하는 거?"
"…."
성규도 묻고 싶었다. 왜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왜 이 남자에게 나는 자꾸만 녹아내릴까. 결국 성규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은 무서웠지만, 우현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하나. 제 목소리는 두 번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둘. 저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계속 도망만 다닌 겁쟁이가 맞다. 셋. 그럼에도 우현은 나를 녹였다. 넷. 날 녹인 우현의 웃음 속에 드리운 그늘을 지워주고 싶다. 그리고 다섯. 우현에게 끌린다.
B
6.
"I don't know you…"
우현은 깜짝 놀라 뒤로 돌았다 뒤에는 성규가 쇼파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타의 갈색 선율은 공간을 부드럽게 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성규의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며 기타 선율과 공기에서 살풋살풋 춤을 췄다. 그의 목소리는 가을날 낙엽처럼 불안했지만 하얀 깃털처럼 가볍고 매끄러웠다. 깃털은 사뿐사뿐 춤을 췄다. 그 발소리는 공기를 울리고 그 울림은 우현의 귀를 타고 그의 가슴을 울렸다. 쿵. 쿵. 쿵. 뜨거워진 제 심장의 박동에 우현이 왈칵 눈물이 고였다. 가슴에 달콤한 향이 가득 차올랐다. 그 향은 분홍빛 같기도 하고 연노랑 같기도 했다. 오묘한 색의 향이 동글동글 뭉쳐 이슬이 되어 우현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이건 나를 향한 동정심일까, 아니면 동질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
노래가 끝났다. 거실은 어느새 촉촉해졌다.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성규의 얼굴에도 눈물로 가득했다.
"…."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우현이 샐쭉 웃엇다. 성규도 웃었다. 눈꼬리에 방울방울 매달린 눈물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도 서로를 향해 바보처럼 웃었다.
색은 연분홍 봄빛이었다.
DK@''@ |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독방에 기차했었던, 현성픽이에요. 다시 보니 마무리 부분이 너무 아쉬워서 약간 수정하고 올립니다. 컴퓨터에는 없고 휴대폰에만 있던 파일인데 도저히 열리지가 않아서 휴대폰 보고 하나하나 옮겨 적느라 힘들었는데 적으면서 작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좋았어요. 봐도 봐도 부족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옮겨 적느라 오타가 엉망..T^T 오타 정리 했어요 남아있는 오타 발견하시면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