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야, 난 가끔 꿈을 꿔. 무슨 꿈? 네가 갑자기 사라지는 꿈. 변백현, 나도 가끔 꿈을 꿔. 무슨 꿈인데? 널 떠나는 꿈. 도경수. 난 꿈 잘 안 꾸거든. 별 도경수변백현 햇빛이 잘 드는 이른 아침이였고, 엄청나게 어려워서 비난을 받았던 작년 국어 A형 모의고사를 풀었다. 그리고, 채점을 매다 색연필을 떨어뜨렸다. 정적이 가득한 교실에서 색연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곧 수능이 가까워져 신경이 날카로워질대로 날카로워진 주변 자리에서는 볼멘 소리가 터져나왔다. 뒤에 앉아있던 공부는 포기한지 오래인 박찬열이 어슬렁어슬렁 비어있는 옆자리에 앉았다. 백현아, 몇 등급? 마지막 문제까지 동그라미로 마무리하고선 박찬열의 어깨로 올라온 손을 쳐냈다. 오, 또 만점이야? 우리 백현이 이러다가 서울대 가는 거 아냐? 만점이라는 소리에 백현은 머리가 아려왔다. 한숨을 푹 쉰 백현은 찬열이 만져 잔뜩 흐트러진 시험지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이제까지 모든 소문은 듣지도 않았다. 편의점 알바를 하는 강남 학원가 앞에서 들은 소문이 문제였다. 그것도, 거의 죽치고 있는 최상위권 학생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 이번에 도경수도 수능 친다며? 며칠 전 고가의 에너지 드링크를 떼거지로 계산하다 들은 말이었다. 아, 도경수. 도경수라는 존재는,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상위권 학생들이라면 모두 알았다. 머리도 좋고, 외모도 특출나고, 심지어 집안도 좋다. 키가 작다는 게 조금 흠이지만, 도경수는 완벽했다. 현재 나이로만 하자면 고3이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완벽했다. 그가 손만 대면 주식은 올라갔고 무너져가는 회사에는 손만 대도 금방 인공호흡을 한 듯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백현의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도 그랬다. 사실 대기업의 계열사라 자동적으로 생기가 돈 거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 꼬맹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성숙해서 탈이야. 계열사에 확인 차 방문했던 도경수는 들리는 소문과는 다르게 유약한 소년이라고 했다. 물론 외모만 보자면 그렇다. 입을 연 순간, 아직 사회에 발도 들이지 못한 나이치고는 심각하게 현실에 찌들어있다고 아버지는 회상했다. 그런데 그 '도경수'는 수능을 보지 않았다. 특출난 재능, 그리고 넘치는 재력.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음에도 정작 대학교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수험생들은 기뻐했다. 도경수가 수능을 보면 자신의 등수가 한 단계씩 밀려나는 것과 같다. 도경수는 대학교 출석 대신 외국의 저명한 학회에서의 논문 발표로 아홉 시 뉴스에 간간히 얼굴을 비췄다. 그 도경수가 수능을 본단다. 수능 출제자들과 비슷하다면 비슷하지 절대로 뒤쳐지는 성적은 아닌 도경수가? 만날 리는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담은 됐다. 그 대단한 도경수가 같은 수험장이고, 같은 수험실에 옆 자리인 수험생은 참 불쌍하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야 말았다. " 안녕, 변백현. 나 알지? " " 켁! " " 어, 체하면 안 될텐데... " 도경수는 뉴스나 기사 사진에서 봤던 것과 같이 단정한 얼굴이었다. 분위기도 굉장히 묘한 분위기였다. 그동안 알바를 하면서 본 강남의 텐프로들보다 키도 작고 어깨도 좁았지만, 그의 손짓과 몸에 자연스레 배인 동작 하나하나는 꽤나 고급스러워 괜히 기가 죽었다. 당황스러워 먹던 주스를 뱉어내자 손수건을 내미는 손길이 각이 잡혀있어 떨떠름하게 손수건을 받아들어 입가에 묻은 녹차를 닦아냈다. 도경수는 뉴스에서만 보던 굳고 딱딱한 표정이 아닌, 조금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손수건에서 나는 시트러스 향이 녹차의 그윽한 향과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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