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홍아. 여기 숨어서 밖에 조용해질 때까지 절대 나오지마."
"왜 자꾸 나 두고 가려그래! 싫어, 난 형이랑 갈래!"
눈물을 가득 담은 큰 눈망울로 어렴풋하게 마지막임을 알면서도, 준홍은 대현에게 애원하듯 떼를썼다. 꼭,꼭...살아서 다시 만나자. 준홍의 가엽기 그지없는 작은 손에 대현의 큰 손이 포개어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 다잡아 보지만 대현은 준홍을 떼어내고는 옷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준홍아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집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잿더미로 변해버린 도시. 열려진 문 밖은 마치 지옥의 입구 같았다. 대현이 모든걸 포기하고 나오자 쾅쾅 소리치던 큰 굉음이 멎더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는 대현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 * *
사람 목숨의 값어치는 얼마나할까. 지금 내 손에 잡혀있는 이 남자의 값어치는. 아니면, 저기 죽어가는 동료를 뿌리치고 도망치는 여자의 목숨은. 전쟁이라도 난 듯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준홍은 잠깐 동안 사색에 잠겼다. 사방에 쓰러져있는 시체를들은 사람들에게 짓밟혀져 마치 쓰레기와도 같아보였다. 그렇게 힘들게 도망쳐봤잔데. 준홍은 시끄럽게 울려대는 경고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총구를 겨눴다.
탕-. 단 한 발. 여자의 피가 솟구치며 앞서 도망가던 사람들의 등에 수놓아졌다. 탕-.탕-. 총성이 울릴 때마다 시체가 한 구씩 늘어갔다.
"살, 살려주세요.."
준홍에게 목덜미를 잡혀 잔뜩 겁에 질려있는 남자의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총질을 하던 준홍이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대현 어딨어."
"네?그게 누구..."
아, 여기선 이름으로 안 부른댔지. 그럴줄 알고 사진을 가져 왔는데..
[삐-삐-삐- GATE-3 출입구 봉쇄. GATE-3 출입구 봉쇄. ]
요란한 싸이렌 소리와 함께 준홍이 있는 구역의 문이 모두 봉쇄된다는 경고가 나왔다. 신경조차 안쓰이는지 준홍은 자켓 안을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사진 한장을 꺼냈다.
"여깄다. 11년 전 사진이긴 하지만, 비슷할거야."
남자의 작은 눈이 순간 커졌다. 앞의 사진 속엔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앳된 얼굴이 있었다. 지금과 전혀 다름없는 얼굴로 여느 또래 학생들 다운 밝은 모습의.
"...코드네임 M15..제 담당 실험체입니다."
실험체. 준홍의 얼마 없는 기억속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인 그가,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단어로 불리고있었다.
"그래서 어딨는데."
"그,그게..."
타앙-. 남자의 멍청하게 벙찐 얼굴 위로 붉은 피가 비처럼 떨어졌다. 준홍의 크게 휘청인 어깨 위로 흘러나오는 피가 얇은 셔츠를 물들였다. 씨발..준홍이 욕을 뱉으며 총성이 난 곳으로 발걸음을 뗐다. 몇 걸음을 걷다가 손에 쥐고있던 3발 남은 싸구려 권총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벽 뒤쪽에 숨어 잔뜩 진을 쳐놓고 기다리는 인체실험의 결과물들한테 총따위는 간지러운 수준일테니. 살아있는 무기들 사이로 무장해제한 채 들어가면서도 얼굴만큼은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