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어쩌다보니 학교에서 만나면 인사하기로 했어.
라고 말했다간 어마랑 이모 둘이 어디까지 앞서 나갈지 눈에 훤했기 때문에 대답을 뭉뚱그렸다.
"나 오늘도 저녁에 들어온다-."
"기집애가, 진짜."
"다음 달까지만 봐줘!"
괜히 축제 준비하는 학생회 애들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아침마다 고생이다.
앞치마를 벗으며 한 마디하려고 신발장 쪽으로 걸어오는 엄마를 피해 얼른 집을 나섰다. 이제 곧 4월인데 아직도 좀 쌀쌀하네.
[기상청님] 오전 7:37
[오늘 춥나요?] 오전 7:37
[나 뭐 입지] 오전 7:38
오전 7:40 [개더움]
[구라청 컨셉?] 오전 7:41
오전 7:41 [ㅇㅇ]
통학러의 서러움.
분명 같은 1교시인데 나는 이미 집에서 나왔고 옹성우는 집에서 바깥 날씨를 묻고 있다. 즉, 이 새끼는 아직 옷도 안 입었다는 소리.
창 밖을 확인했는데 롱패딩 입은 사람하고 반팔 입은 사람이 동시에 지나갔다고, 혼란스러워서 자휴(=자체휴강)각 잡혔다고 주절거리는 옹성우를 쿨하게 무시했다.
엄마, 보석같은 딸이 이렇게 살아요.
"..."
"..."
셔틀 줄 쪽으로 걸어가다가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눈에 띄어버린 사람.
김재환.
일단 무시하고 있던 옹성우와의 카톡 대화창을 다시 켜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녀석 앞을 지나칠 것이다.
아니 뭐 인사하기로 하긴 했는데 이렇게 바로 만날 줄은 몰랐지. 눈도 안 마주쳤는데 먼저 막 건드리면서 안녕! 하는 건 좀 그래.
[와랄라라랄랄라아라라] 오전 7:51
[와ㄹ랄ㄹ라라라] 오전 7:51
[ㅁㄴ아^멍리ㅏ?] 오전7:51
[?] 오전 7:52
[오구 우리 삐삐가 막 짖네] 오전 7:52
[닥쳐 걍] 오전 7:52
다행히 김재환을 지나쳐 줄 맨 뒤에 섰다. 잠깐 바쁜 척하느라 켰던 옹성우와의 카톡창을 다시 날리고 버스에 올라탔다.
제발 남아있는 창가자리 있게해주세요.
관광버스의 제 맛은 역시 창가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생각을 정리하는 맛이다. 거창해보이지만 내가 정리하는 생각이란 오늘 점심 메뉴 정도.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자리를 확인하고 맨 뒷자리 창가자리를 택했다.
잠들었다가 못 일어나면 좆되는 자리. 아무도 깨워주지 않아서 갑자기 자다 말고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랑 지리산 가는 자리. 정신 바짝 차린다.
"나 이어폰 놓고 왔는데."
"...?"
"뭐 듣냐?"
편하게 의자를 끝까지 눕히고 눈 좀 붙인 채 점심 메뉴를 곰곰이 스캔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이어폰 한 쪽을 빼가는 웬 놈에게 놀라 눈을 떴다.
또 김재환.
갑자기 자리를? 굳이 옮기기?
대꾸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는동안 김재환은 이미 노래가 좋다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눈을 붙였다. 아니 뭐하냐고.
"뭔데."
"너 왜 나 보고도 인사 안 해?"
"엥~ 누가 인사를 안 했다고 그랭. 못 본 거징."
"카톡하는 척하면서 그냥 지나치던데."
"그 노래 좋지."
급하게 말을 돌리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 눈을 감았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괜찮아. 오케.
"저희는 오늘 해발 약 1,915m 정도되는 지리산의 천왕봉에..."
"...?"
"다왔다고."
"...아 진짜 죽을래."
아 진짜 좆된줄 알았다. 시발. 진짜 자다 말고 등산하는 줄.
내 귀에 대고 지리산 어쩌구 속닥이는 김재환의 목소리에 놀라 깨곤 녀석의 어깨를 치며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제발 졸업하기 전까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 우리학교 셔틀의 전설로 전해지는 '자다 말고 지리산' 일화.
뭐가 그렇게 웃긴지 경박하게 깔깔거리며 웃는 김재환이다. 그와중에 웃음소리도 쓸데없이 여전.
"아니 진짜 어떻게 그렇게 눈이 똥-그래져? 그렇게 놀랐어?"
"너가 자다 말고 '해발' 소리를 들어 봐. 안 놀라나."
셔틀에서 내리고 각자 건물로 향하는 동안에도 혼자 발까지 동동 구르면서 웃어대는 김재환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저 새끼에게 '자다 말고 지리산' 축복을 내려주소서.
"오늘 수업 몇시에 끝나?"
"그건 왜?"
"집 같이 가려고."
"..."
1시.
집에 같이 가자며 훅 들어오는 김재환에게 자연스럽게 답했다.
꼭 우리 고딩 때 같다, 미처 붙이지 못 한 뒷말은 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내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던 김재환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아마 본인과 끝나는 시간이 많이 다른 모양이지.
"수업은 1시에 끝나는데 일 있어서 5시 거 탈 거야."
"오케오케."
갑자기 어깨를 방뎅이마냥 씰룩인다. 춤추는 건가.
수업 잘 들으라며 먼저 자기 건물로 들어간 김재환은 혼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랬다.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가까워질 수도 있나? 김재환의 친화력이 좋다기엔 원래 친했던 사이고, 원래 친했던 사이라기엔 근 2년간 서로 쌩까던 사이였다.
마치 꼭 2년 전 우리 모습이 그 모습 그대로 현재까지 닿아있는 듯 했다.
뭐, 그래봤자 아직 나는 김재환 바뀐 번호도 모르고... 또... 번호도 모르고...
모르는 게 번호밖에 없네. 아무튼.
"야, 나 다 봤다-."
"뭐야, 갑자기."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옹성우가 몸을 바짝 밀착해온다. 일단 떨어져.
뭘 봐서 이렇게 호들갑인지 이미 다 알 것도 같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앉을 때마다 적응 안 되는, 화날 때 앉으면 진짜 전기톱 찾게 되는 책걸상 일체형 책상에 말이다.
"실음과 박재환이랑 같이 시시덕거리면서 등교하는 거."
"김재환이야."
"늦어가지고 택시 타면서 들어오는데 너가 웬 남자랑 행복하게 그러고 있더라니까."
"어엉."
"그래서 어떤 놈인가 보는데 와-, 너가? 박재환을? 김여주가? 박재환이랑?"
"김재환이라고."
박재환은 누군데. 마린보이 박태환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 거 아니야. 셔틀에서 우연히 만난 거임."
무덤덤하게 전공책을 꺼내 폈다. 내가 김재환과 원래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옹성우에게는 더 이상한 대답이다.
원래 모르는 사인데 셔틀에서 우연히 만난 거, 그거 뭐 어쩌라고.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이미 외모로 학교 유명인사였던 김재환 이름이 우리과에서 여러번 들먹여질 때마다 딱히 관심있게 들은 적도, 동기들 말에 공감한 적도 없다.
못생긴 표정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옹성우를 툭 쳤다.
24시간을 그러고 고민해봐라, 답이 나오나.
김재환을 내게 주세요!
"하암-."
월요일은 진짜 죽을 맛이다. 1교시 수업의 여파로 하루가 하품만 하다가 지나간 느낌까지 든다.
4시반 쯤 학생회실에서 빠져나와 캠퍼스 벤치에 앉아서 5시까지 시간을 좀 때웠다. 이 시간 셔틀은 좀 막히니까 가자마자 저녁 먹고 영화 한 편 조지고 잠들면 딱이겠군.
[오늘도 고맙] 오후 4:47
[알면 잘해] 오후 4:48
[선배들 지금] 오후 4:52
[야식 뭐 먹을지 고민함] 오후 4:5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후 4:52
[야식은 집에서 먹을게요] 오후 4:52
고생해라, 성우야. 축제 준비로 이미 10시 퇴근이 확정된 성우를 잘 보우하여 주시오며...
학생회 애들의 안타까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다 피곤하네.
1,200원짜리 비타오백 하나를 쿨내나게 결제해 기프티콘으로 쏴주고 일어나 기분좋게 셔틀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시대의 쿨녀는 나야.
"..."
"뭘 그렇게 생각해?"
셔틀버스 앞에서 혼자 멀뚱히 서있는 김재환이 보인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바닥만 보고 멍을 때리고 서서 내가 다가온 것도 모르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김재환."
"깜짝이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했는데 너가 못 들은 거잖아."
아니 사람 얼굴 보고 이렇게 놀라면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돼. 생김새 때문에 사과하는 건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김재환을 지나쳐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역시 맨뒷자리가 최고지.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와 내 옆에 자리하는 김재환은 작게 콧노래를 흥얼 거린다.
빈 자리 많은데 좀 떨어져 앉지? 나 다리 꼬고 앉을 건데? 편하게 가고 싶은데?
손으로 훠이훠이하며 녀석을 쳐다보니 김재환이 이내 아차하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낸다. 그치? 너가 생각해도 좀 떨어져 앉는 게 좋겠지?
"번호 좀 주라."
"...엉?"
"폰 번호."
한 손에 쥐어져있는 내 폰을 턱으로 가리키며 폰 번호를 요구한다.
아니, 갑자기? 왜?
"5시 다 됐는데 애는 오지도 않고, 나 5시 거 타려고 수업 끝나고 연습실에서 연습도 하다 왔는데."
"..."
"번호가 있어야 어디쯤이냐고 묻기라도 하는데 그러지도 못 하고..."
갑자기 입술을 쯉 내밀고 중얼중얼 한탄을 늘어놓는 김재환의 볼이 짱구처럼 볼록 튀어나왔다. 그래서 아까 그 표정으로 셔틀 타있지도 않고 서있었나.
안 오면 혼자 타고 집 가면 되지. 집 모르냐고.
의아한 내가 여전히 멀뚱멀뚱 저를 쳐다만 보고 있으니 나를 따라 눈을 꿈벅거린다.
"빨리이-."
"01012345678"
"..."
못 들었으면 땡.
난 분명 말해줬음.
마음의 준비하라고 공일공까지 붙여서 말해줬음.
다시 한 번! 제발! 아까보다 더 빨리 말해도 알아먹을 수 있는데 진짜. 한 번만!
귀를 손으로 모으고 침을 사방팔방 튀기며 다시 한 번만 말해달라고 칭얼거리는 김재환에 웃음이 터졌다.
진짜 여전하다.
정말 친했던 친구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도 매일 만났던 것처럼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재환이와 여주의 에피소드는 과거든 현재든 정말 많아요
댓글 하나하나 다 열 번씩은 읽어본 것 같아요 T^T
앞으로 쭉 같이해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