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환을 내게 주세요 !
03
"진짜 개맛있다."
"아니 미친놈아, 천천히 먹으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떡볶이의 떡을 세개씩 집어 입에 넣는 김재환의 팔을 붙잡았다. 진심으로 화나게 하지 마라. 내 표정에 김재환이 얄밉게 눈을 깜빡였다.
종례가 더 늦게 끝나는 사람이 쏘기로 한 떡볶이는 오늘 내가 쏘게 됐다. 종례 질질 끌기로는 교내 1,2위를 다투는 담임들을 둔 나와 김재환만이 할 수 있는 내기였다.
"아 맞다, 재환아 나 이번주에 너네집 못 가."
"...뭐냐."
"그냥... 그 날 친구 생일이라. 미안."
"너한테 친구가 어딨냐? 남친 때문이면서."
"...미안."
재환이가 뻘쭘해 할까봐 나름 찾는다고 찾았던 변명이었는데, 물론 너가 속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결국 또 내 이유로 약속을 깼다.
부모님끼리 친해 서로 집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고, 여기저기 둘이 돌아다니는 걸 못 마땅해 했던 선배는 너와 하는 내 모든 일과를 싫어했다.
남사친의 존재라는 게, 특히나 재환이처럼 가까운 남사친은, 남자친구로서 당연히 거슬릴 수 밖에 없다는 게 나와 재환이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오케. 인정."
"...다음에 꼭 볼래. 혼자 보면 뒤진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재환이가 나에게 짜증을 낸다거나, 서운해 한다거나, 내 남자친구를 욕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너보다 그 선배가 우선이라고 착각을 했나보다.
날이 갈수록 재환이와 등하교를 같이 하는 일이 줄었다. 그게 얼마나 싫었는지, 너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지금도 가끔 생각하곤 한다.
김재환을 내게 주세요 !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너에게 첫남자친구가 생겼다. 잘생긴 건 별로 모르겠는데 그냥 너는 좋다더라. 취향, 참. 꼭 지같은 것만 좋아해.
"재환, 너도 축구 뛰지?"
"노노, 약속 생겼어."
"야 오늘 한국고인 거 못 들었어?"
"아 진짜 미안. 급한 약속이야. 꼭 이겨라, 어? 지면 알지? 형 화낸다."
"형 같은 지랄하고..."
나와 밥 한 톨 먹는 것조차 싫다고 징징대던 그 잘난 남자친구님이 오늘은 기꺼이 허락을 해주셨는지,
[오늘 집 같이 갈래?] 오후 12:57
[떡볶이 내기] 오후 12:57
점심에 와있는 너의 카톡을 보고 바로 오늘 잡혀있던 축구 친선경기에서 빠지기로 했다.
"...미안."
물론 그 떡볶이는 그냥 미끼 정도. 솔직히, 진짜 마음 같아선, 맨날 깰 약속 왜 잡냐고 원망하며 화도 내고 싶었다. 너 온다고 집에 과자랑 아이스크림도 잔뜩 사다놨는데.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친구 생일을 챙긴다고 삐그덕대며 웃는 너에게 화를 내는 건 또 안 되더라.
"오케, 인정."
내가 싫다고 화내면 뭐 어쩔 건데. 미안하다고 죄인처럼 고개 숙인 너한테 간장 묻힌 떡볶이를 먹여줬다. 내 벌은 이걸로 끝.
내가 늘 이래서 나보단 그 사람 편을 드는 게 맞다고 너가 착각 했는지도 모르겠다.
날이 갈수록 김여주와 등하교를 같이 하는 일이 줄었다. 그게 얼마나 싫은지, 너가 알았으면 좋겠다.
김재환을 내게 주세요 !
일은 고2 여름방학에 터졌다.
재환이네 가족과 우리가족이 같이 가기로 계획 되어있던 여름휴가가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보나 마나, 선배는 당연히 결사반대 의사를 밝혔고 나는 그냥 그게 맞는 줄 알았다. 재환이가 끼어있으니까. 그냥, 재환이랑 같이 가는 게 싫다고 하니까.
나는 그 사람을 설득할 의지조차 없었다. 언제나 이해해주고 늘 오케해주던 재환이를 또 기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남자친구라도 가족여행에 무슨 간섭을 하느냐고 대판 싸우고도 남았을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안 간다고 했잖아."
"가족들 다 가는 여행인데 너가 뭐라고 빠지겠다는 거야? 무슨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기 싫다고 안 가면 돼?"
"그냥 좀 이번만 빼달라고!"
엄마한테,
"김여주."
"..."
"진짜 적당히 해."
그리고 집에서 뛰쳐나온 나를 따라 나온 재환이한테,
"뭘 적당히 해."
"남자친구 핑계대면서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그냥 남친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 거 모르겠냐?"
"니가 뭔데 남 그릇이 크다 작다야."
"..."
"주제 넘지 마."
"..."
큰 상처를 줬다.
"내가 빠질게."
"...뭐?"
"미안하다는 소리도 이제 그만하고 그냥 넌 그런 사람인가보다, 생각할게."
"...야."
"남친 설득해보려고 노력은 해봤는지 진짜 묻고싶은데,"
"..."
"니 대답이 너무 뻔해서,"
"..."
"그래서 내가 또 실망할까봐 그건 안 물을래. 우리엄마한테 내가 잘 얘기할테니까 니가 여행 껴."
"...아니,"
"걔랑 헤어질 때까지 나한테 아는 척 하지 말고, 웬만하면 헤어지지도 마."
"김재환."
내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뒤돌아 휑 가버리는 녀석의 뒷모습에 꾹 참고있던 눈물이 터졌다. 재환이가 그렇게 화난 걸 본 건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날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정말로 재환이랑 다시는 예전처럼 지내지 못 할 것 같아서,
아는 척 하지 말라는 그 말에 너무 상처를 받아서.
다 내가 잘못했는데 여태 내가 먼저 재환이한테 미안하다고 다가가본 적이 없어서.
재환이가 내 생일날 나 닮았다고 사준 돼지인형에 얼굴을 묻고 연신 미안하다며 울었다.
불과 두 달 전이었을 재환이 생일이 그제야 생각났을 땐 세상이 떠나가라 엉엉 울었다.
"..."
"..."
학교에서 나를 피하는 재환이를 보면 선배는 둘이 무슨 일 있었냐며 걱정하는 척, 내심 좋아했다.
나는 선배를 좋아했다. 어떤 사람인지, 재환이와 이렇게 된 것도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다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선배와 계속 만났다.
"오늘도 혼자 와?"
늘 같이 하교하다가 가끔은 집에 같이 들어와 저녁도 같이 먹던 재환이의 발길이 어느 순간부터 뚝 끊기자, 엄마도 슬슬 신경이 쓰이는 듯 했다.
아마 이모한테 듣는 재환이 이야기까지 종합해보며 우리 사이가 많이 틀어졌음을 어느정도 짐작했을테니 자세한 설명은 않기로 했다.
오전 7: 33 [얘기 한 번만 하면 안 될까?]
오전 11:02 [재환아ㅠㅠ]
오후 3:19 [오늘 진짜 화나는 일 있었는데]
1 오후 7:51 [너 아니면 내 얘기 누가 들어줘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나는 언제나 이해해주고 늘 오케해주던 재환이보다 언제나 반대하고 늘 싫다하던 선배의 편에 서는 게 맞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 재환이를 저버렸다.
김재환을 내게 주세요 !
싫었다.
너가 그 사람 때문에 이모한테 안 부리던 성질을 부리고, 나한테 주제니 뭐니 상처되는 말들만 해대는 게 싫었다.
학교가 끝나고 나면 재잘재잘 그 날 있었던 일들을 풀었던 너에게 나는 늘 네 편이 되어줬다. 비록 못 돼 처먹은 너가 조금 더 잘못한 일이더라도 나는 네 편에 서고 싶었다.
그랬던 나에게 너가 주제를 넘는다고 한다.
내 주제가 뭔데.
"걔랑 헤어질 때까지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말고, 웬만하면 헤어지지도 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감당 못 할 그 말들은 이미 입 밖으로 나간 후였다.
다 거짓말인데 그 중에서도 헤어지지 말라는 말은 진짜진짜 거짓말. 이거 진심으로 들으면 진짜 죽을 때까지 원망할 거야.
눈이 시뻘개지도록 눈물을 참고있는 너를 등졌다.
"김재환."
뒤를 돌아 집으로 향하며 찔끔 비집고 나온 눈물을 서럽게 닦았다. 진짜 짜증나.
"요즘 걔가 안 보인다?"
"누구."
"김여주."
학교에서 만나는 애마다 묻는 너의 행방에 딱히 할 대답이 없다. 사귀던 사이도 아닌데 좀 떨어져있을 수도 있지.
별 생각없다는 듯이 축구로 화제를 돌리면 대부분은 더이상의 질문없이 축구 얘기에 여념들이 없었다.
그와중에도
[오늘 진짜 화나는 일 있었는데] 오후 3:19
너한테 오는 카톡을 천천히 읽으며 속으로 답장했다.
[또 누구야 오빠가 혼내줌] 오후 3:19
핸드폰을 주머니에 꽂아넣고 평소엔 듣지도 않는 수업에 집중했다. 그래야만 네 생각이 덜 난다.
널 화나게 한 건 누구였을까. 담임? 버스기사? 급식? 반장?
오늘 잠들기 직전까지 나를 징하게 괴롭힐 고민 하나가 금세 맴돌았다.
안녕하세요 옴뇸이에요... 글이 많이 슬프네오 ㅠ_ㅠ
며칠 전에 이 글 쓰면서 찌통 째니 때문에 저까지 눈물이 찔끔...
빨리 학식 재환이 보고싶어요 ㅠㅠ
참 그리고 암호닉 신청에 대해 말씀해주신 분들이 계신데 저는 정말 언제든 환영이고 영광입니다 !!
장꾸님 이미 머릿속에 입-력-
다음편 '그 때, 우리는 下' 을 들고 금방 찾아올게요 !
(이번 부제가 원래 '저버리다 上' 이었는데 괜히 바꿨을까요 헤헤 지금도 고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