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비 오네.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던 윤기가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봄비가 가져다주는 왠지 모를 울적함. 태형도 따라 창문을 바라보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아침 일찍 조용히 씻고 밖에 나가던 지민이 생각났다. 전날 무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박자를 반 정도 늦춰 춤을 췄던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고 자신에게 이야기하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분명 연습을 하러 간 게 뻔한데. 방에서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고민하다 작년 이맘때 외국에서 같이 맞춰 산 가디건을 꺼내들고 망설임 없이 입었다.
"어디 가?"
"저 연습실 가려고요."
"밤에도 비 온다는데 따뜻하게 입지."
"괜찮아요. 저 갔다 올게요."
생각보다 빗줄기가 굵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춤추고 있겠지. 너에게 불러 주고 싶지만 엄두가 잘 나지 않고 생각만 하던 노래들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들어가기도 전에 크게 틀어진 음악이 제 귀를 압도했다.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는 지민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춤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쉬지도 않은 건지 젖어있는 하얀 티셔츠와 가슴팍과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일부러 큰 소리로 헛기침을 냈고 바로 시선을 자신에게 돌린 지민이 환하게 웃으며 음악을 멈췄다.
"뭐야? 늦잠 잘 거라고 하더니."
"그냥, 숙소에 있으면 할 것도 없잖아. 개미 응원하러 왔지."
"너 지금 나 보고 개미라고 했냐?"
베짱이는 아니니까. 태형이 지민에게 까만 봉지를 내밀었다. 안에는 달콤한 초콜릿과 감자 과자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덤으로 이온 음료와 탄산음료까지. 금세 자리에 앉아 이야기 주제들을 정해놓지도 않았지만 마구 떠들어댈 수 있는 둘이었다. 태형은 휴대폰을 꺼내서 지민에게 그간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여 주며 어떤 사진을 인화할지 의견을 물었고 지민은 먹고 있던 비스킷을 입에 물고 있다 대답을 하는 바람에 과자 반 조각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아까 것보다는 이게 더 나은 거 같아."
"…"
"왜,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
대답 없던 태형이 지민의 입가 주변을 손가락으로 털어 주었다. 언제 봐도 적당히 통통한 입술에 괜히 제 마른 입술을 축이게 되는 건 덤인 건지. 지민은 전에 느끼지 못한 어색한 분위기에 태형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아, 뭐 하냐고.
"너 근데 왜 자꾸 저기 봐? 누구 오기로 했어?"
"어? 아. 정국이 오기로 했어."
"전정국? 왜?"
"노래 작업한 거 있는데 봐 주기로 해서."
그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습실 문이 열리고 정국이 외마디를 외치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형!"
"요. 전정국."
"어, 태형이 형도 있었네요."
원래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정국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민의 옆으로 다가가 노트북을 들이밀었다. 태형도 같이 화면에 눈을 옮겼고 이미 셋은 오늘도 다른 날과 다를 것 없이 여전히 음악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좀 있으면 발매되는 곡부터 자신들이 준비한 곡까지. 장르와 멜로디 라인, 가사와 무대에 서게 되는 상상까지. 너무나도 변함이 없었다.
"저 그러면 남은 부분만 좀 만지고 올게요."
"야, 정국아. 이거 가져가."
"이거 뭔데요?"
"쓰레기."
"아! 장난 쳐요?"
해실하게 웃으며 장난을 치는 지민과 정국을 번갈아 보던 태형은 이상한 이유로 오늘만은 같이 웃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문이 닫히고 지민은 태형에게 물었다.
"우리도 이제 숙소 갈래?"
"…그래, 그러자. 아까 나 나올 때 슈가 형이 그랬는데 밤에도 비 온다고… 아, 아! 미친. 잠깐만."
"놀래라. 뭔데."
"너 잠깐만 여기 있어!"
순식간에 혼돈이 온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태형은 이마를 짚고 서둘러 연습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큰일 났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태형은 계단을 세 걸음으로 뛰어올라 가까스로 정국의 개인 작업실 앞에 멈춰 서고 멈추지 않는 숨소리를 애써 침착하게 보살폈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 안에서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예요?
"저, 전정국. 난데."
"태형이 형? 들어와요."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땀이 자꾸만 흘렀다. 정국이 앉아있던 의자 옆에 있는 작은 쓰레기통만 보게 되었다. 정국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 의자를 돌려 태형을 마주 보았다.
"형. 왜? 무슨 일 있어요?"
"그… 아까 지민, 지민이가… 버리라고 한 봉지 어디 있어?"
"에? 그거? 버렸죠. 여기."
"나, 나 거기에 지갑을 놔둔 걸 깜빡해서…"
"아, 진짜요? 엄청 가볍던데. 이거 맞죠."
"어, 맞아. 고마워, 그… 나랑 지민이는 이제 숙소 갈 건데…"
"그래요? 먼저 가요, 저는 할 게 더 남아있어."
그래? 어. 그래, 알았어. 쉬엄쉬엄해. 까만 봉지를 손에 쥐고 힘껏 힘을 준 태형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작업실 밖으로 나와 아까는 상반되게 터덜터덜 처절하게 계단을 내려가며 주변을 살폈다. 봉지 안을 살피고 안에 들어있는 구겨진 작은 카드 하나를 꺼내어 열었다.
"…다행이다…"
낮게 읊조린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혼잣말을 하던 태형은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한편, 계속해서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할 정국의 작업실은 아주 고요했다. 의미 없이 두 눈만 깜빡거리고 있던 정국은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살펴보다 갤러리 어플을 눌렀다. 최근 사진 한 장, 그 사진에는 태형이 확인하던 카드가 담겨있었다.
"오늘… 고백하려고 했었던 건가?"
차갑게 식은 미소로 정국은 휴대폰을 책상 끝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눈을 감았다. 미안한데,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정국은 알 수 없는 허밍을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