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씨, 잠시 이야기 좀."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닌, 간만에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든 팀원들이 컴퓨터에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반면에 드디어 올게 왔다는듯 울상을 지어보이면서 애써 표정을 숨기려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는 여주였다.
회식 때 감히 막내가 다른 반장님들께 대드는 사고를 쳤으니 권경위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도 모르겠는데, 오늘 출근하자마자 갑자기 서투른 솜씨로 커피를 타서 나에게 주시질 않나, 뜬금없이 당 충전하라며 달달한 초콜릿을 내밀지 않나.
안그래도 반장님들이 그렇게 떠들어댄 턱에 권경위님과의 아무것도 아닌 이 사이도 눈치가 보이고 불편했다. 그런데 이렇게 더 티나게 나를 챙기는 의미가 뭘까. 뭔지 몰라도 이상함이 분명하다, 지금이라도 경계해야한다 하며 머릿속의 비상벨이 점점 울려갔다.
주신 커피는 “먹으면 저녁에 잠을 못잘 것 같아.”하는 핑계로 바로 옆에 앉은 성우에게 커피를 내밀었고, 뜬금없던 초콜릿은 애써 서랍 저 깊숙히 박혀버렸다. 이렇게 최대한으로 선을 지키고 있는데 이야기좀 하자니, 이건 다르게 둘러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조금씩 민현의 눈치를 살피던 여주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로 와요.”
네. 짧게 대답을 마치고 종종 걸음으로 회의실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에 속으로 못마땅해하던 민현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저렇게 ‘나 눈치보고 있어요’ 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면 미워할 수가 없잖아.
‘강력계 1팀에 황형사, 여자친구 볼 때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니까.’
식당에서 우연히 들어버린 한마디, 부러움에 칭찬이 섞인 나쁘지않은 의도의 말이었지만 민현은 그 한마디에 꽤나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누구보다 공과사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라보는 눈빛에서 부터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들킬줄은 몰랐으니까. 그래서 경찰서 내에서는 더 엄하고 냉정하게 여주를 대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서운함을 느낄꺼라 생각했지만 그런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여주의 모습이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자신은 이렇게 노력중인데,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것도 아니고 아주 빼내다못해 그 자리에 턱하니 눌러 앉으려 하다니. 이제 현빈의 사소한 행동에도 예민해져버린 민현이었다.
전혀 신경쓰지않는듯 신경쓰는 민현의 곁눈질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주를 따라 들어간 현빈을 뒤로 회의실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회의실의 투명한 창문사이로 두사람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대화소리가 전해질리 없었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건 현빈이 사랑에 빠진 눈빛을 하고 있다는거. 그리고 그 눈빛이 정확하게 여주를 향해 있다는거. 같은 남자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현빈이 사랑에 빠진 눈빛이라면, 같은 수컷을 경계하는 민현이 눈빛이 창문을 타고 느껴졌을까. 이야기를 주고받던 현빈이 그 눈빛을 느끼기라도 한건지 창문에 달린 블라인드를 내려버렸다.
내려진 블라인드는 그 뒤로 두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대화를 하는지, 분위기가 어떤지 전혀 알 수 없게 했다. 마치 두사람 사이를 가려버린것처럼.
***
“살인사건 발생. 모두 회의실로 집합하세요.”
간만에 일어난 사건에 모두들 한동안 잠잠하다 했다며 익숙하게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처음 겪어보는 살인사건에 다니엘이 신기하듯, 긴장한듯 눈을 반짝이며 회의실에 간단한 음료를 세팅하고 있었다.
권경위가 새로 들어온 뒤 처음으로 하는 사건 브리핑에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듯 성운과 지성이 의자에 등을 붙히고는 뒤로 편하게 기대어 팔짱까지 꼬았다.
“아침 8시경 한 아파트에서 살해된 여성과 자살로 추정되는 남성이 집에 쓰러져있다며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신고자는 옆 집에 거주하는 여성으로 피해여성이 아파트 반상회에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않자 이상함을 느꼈고, 문이 열려있어 집으로 갔다가 사건현장을 목격했습니다.
피해 여성과 남성은 고등학교 동창 사이라는것 이외에는 아직 제대로 조사된 바가 없어서 조사가 필요해보입니다. 일단 지금 사건현장 감식 중에 있으니 현장검사부터 먼저 갑시다.
조사할 지역이 나눠질 수 있으니 승합차 말고 승용차로 가죠. 윤형사-옹성우, 하형사-다니엘, 저랑 여주랑 이렇게 나뉘어서 이동할게요.”
빠르게 브리핑이 끝났고 곧바로 이동하자는 움직임에 현빈이 빠르게 자료들을 챙겨들었다. 그를 따라 나머지 팀원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혼자 자리에 앉아있던 민현이 조용히 한손을 들어보이며 현빈에게 질문 했다.
“나는?”
“피해 여성과 남성이 무슨사이인지 조사가 필요하다는 브리핑 못들었어? 남아서 휴대폰 조회 신청이나 해.”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의자에서 일어나고 있던 성우와 다니엘이 그대로 얼어버렸다. 표정에 감정을 잘 들어내는 일이 없던 민현마저 싸늘한 눈빛으로 현빈을 바라봤다.
“그거 내 전문인데, 내가 남아서 자료지원해줄게.”
“아니요. 제 지시대로 하세요.”
어색한 차 안에서 여주가 계속해서 한숨만 내쉬었다. 자신의 지시에 분명 반발할거라 예상했는지 현빈은 지시를 따르라는 말만 남긴 채 곧바로 회의실로 나가 차로 이동했고 반장이 무슨 독재자냐, 반장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등의 반발은 현빈에게 통하지 않았다.
차에서 숨쉴틈없이 화를 내뱉고 있을 윤선배, 하선배. 그리고 어떡하지- 만 연발하며 눈치보고 있을 성우와 다니엘. 마지막으로 가장 베테랑이 현장이 아닌 지원을 맡다니, 본인도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있을 황선배. 모두가 걱정되어 조수석에 앉은 여주가 계속해서 한숨을 뱉어냈다.
“무슨 걱정있어요?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제가요? 자신이 한숨을 내쉬고 있다는것 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여주가 깜짝 놀라 현빈을 바라봤다.
아니, 근데 그걸 몰라서 묻는거에요? 마음같아서는 현빈을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수도 없어 다시 한숨만 내쉬는 여주였다.
그뒤로도 ‘노래 들을래요?’, ‘어떤 노래 좋아해요?’ 등등의 질문과 단답이 이어졌고 결국 그 질문을 듣지않기 위해 억지로 잠에 빠져드는 여주였다.
언젠가 슬프게 눈물 흘리던 그 날 처럼, 말 소리가 묻힐정도로 많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 오늘은 집 들어가려고 했는데...”
모처럼 집에 들어가려 했는데 우산도 없이 장대같이 쏟아지는 이 비를 뚫고 집에 간다는건 무리였다. 결국 손을 내밀어 따갑게 내리붓는 비를 느끼던 여주가 아쉽다는듯 손을 턴 뒤 경찰서를 향해 뒤를 돌았다. 결국 오늘도 숙직실 신세구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뒤를 돈 여주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굵은 빗소리에 바로 뒤에 민현이 있다는것도 몰라서 정면으로 마주친 민현이 당황스러운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고개부터 푹 숙인 여주였다.
반면 그런 여주에게 눈길을 떼지 않던 민현이 자신의 손에 들린 우산은 조심스럽게 여주를 향해 내밀었다. 하지만 그 우산을 그저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자, 직접 여주의 손에 우산을 쥐어주는 민현이었다.
“비맞으면 감기걸려.”
우산 보다 더 든든하게 살짝 웃어보인 민현은 여주가 말릴틈도 없이 곧바로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민현의 어깨는 빠르게 젖어들어갔다. 하지만 왜인지 우산만 손에 꼭 쥔 여주는 그런 민현을 바라보기만 했다.
***
눈앞에 펼쳐진 사건 현장은 왜 같이 우산을 쓰지않았을까, 왜 민현과 그렇게 어색했을까 하는 생각을 저멀리 날려버릴만큼 잔인했다.
반항할 틈도 주지않은듯 남자의 목이 깊게 그여진 칼자국은 새빨간 피들을 뱉어냈다. 그리고 여자의 가슴에 꽂힌 피가 묻은 칼.
그 잔인한 현장에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살인사건 현장에 애써 나오는 구역질을 참아내려 주먹을 꽉 쥐던 현빈이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간 다니엘이 무심하게 툭툭- 등을 두드렸다.
그리운 반장님도, 민현도 없는 통에 자신이 최고참이 되어버린 성운이 지구대 경찰에게 먼저 다가가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지성과 성우가 시체들을 살펴보는걸 확인한 여주는 조용히 성운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외부인 침입같아요. 저기 울고 있는 저 사람이 남편인데 출근하는 차가 도로 CCTV에 시간대별로 다 찍혀있어요. 알리바이가 확실한거죠. 그리고 사건 당일 아침에 현관문 도어락이 고장나서 열쇠로 문을 열고 닫았다고 하더라구요. 도어락을 쓰다보면 습관적으로 문을 그냥 닫기만 하니까, 열려있던 그 틈에 외부인이 들어온것 같아요. 문에 침입을 위해 도구를 사용한 흔적은 없거든요.”
수첩에 빠르게 메모를 하던 성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제대로 수사를 해봐야알겠지만 그 판단이 대충 맞는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체를 조사하던 성우와 지성도 특이점을 발견하진 못한듯 빠르게 현장조사를 마쳤다.
“외부인 침입 가능성에 집중해서 범인 착출하고 빠르게 사건 마무리 합시다.”
곧바로 도착한 경찰서에서는 회의실에서의 회의도 아닌, 더이상 생각해 볼것도 없다는듯 각자 자리에 대충 모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을 지어버리는 현빈의 말에 상황적으로 봤을 땐, 외부인 침입 가능성이 가장 높긴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결론을 내리는건 좀 이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 여주가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여주만이 아닌듯 했다.
“아니. 외부인 침입으로 결론내리기엔 너무 일러.”
“뭐?”
“ 외부인이 아파트 11층까지 들어와서 살해할 가능성도 낮을뿐더러, 문이 열린건 어떻게 알고 강제적으로 열려는 시도의 흔적도 없고. 여러 가능성이 있는데 외부인으로 결론을 정해두고 본다기엔 사건의 의문점이 너무 많아.”
반박할 수 없는 민현의 말에 현빈이 기분나쁜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사람 사이에 일어난 불길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마저 뜨겁게 만들었다.
저번과 다르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민현의 모습에 올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현장에 가보지도 않은 네가 뭘 알아.”
“뭘 아는지는 들어보고 판단해.”
그럼 그렇지. 민현이 이유 없이 그럴리 없다는 생각을 하던 지성을 선두로 모두가 말없이 서류를 챙겨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다른 팀에서도 혼자 남겨진 현빈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시선에 결국 현빈도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황민현이라고 보는 초롱초롱한 눈빛과 어디한번 해보라는 경계어린 눈빛 아래 민현이 익숙한듯 브리핑을 시작했다.
“피해 여성과 남성의 관계성을 조사해 본 결과, 둘은 내연관계에 있었음이 휴대전화를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카드 내역에서 인터넷을 통해 소형 카메라 즉, 몰래카메라를 구입한 내역도 발견되었습니다.”
“크으- 역시. 남편이 알고있었네.”
“남편이 범인이라면 그 모든 상황이 정황상 딱 들어맞지만, 남편의 알리바이는 어쩔꺼지? 출근 길 CCTV가 다 찍혀 있어.”
현장조사를 나가있던 동안 지원을 담당했던 민현은 피해자들과 남편을 조사하며 알아낸 정보들로 현빈과는 전혀 다른 추리를 했다. 그에 다른 팀원들은 늘 그래왔고 그만큼 인정받았던 민현이기에 크게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민현의 말에 마지막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보는 현빈에게 민현이 비수아닌 비수를 날렸다.
“그래서 다시 현장 재.조.사 해봐야지.”
***
간만에 민현의 옆자리인 조수석에 앉아 제대로 신이 난듯 웃으며 조잘거리는 여주를 민현이 그저 예쁘다는듯 바라봤다.
“그렇게 좋아?”
“응. 완전 오랜만이잖아요, 이렇게 둘이 나오는거.”
“그러네.”
다시 현장 재조사를 나가보겠다며 나갈 채비를 하는 민현의 옆에 졸졸졸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강아지같이 민현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여주였다.
물론 모두의 예상대로 현빈이 이를 제지하려 했지만 늘 현장조사를 나가는 여주를 막자니 명분이 없고, 그렇다고 반장인 자신이 첫 조사도 아니고 재조사에 나가기도 애매했으며 더더욱 민현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본의 아니게 현빈과의 대립이 점점 심화되는것 같아 마음이 쓰였지만 사건은 어떤일이 있어도 제대로 수사되어야하기에 오늘일에 대해 크게 마음쓰지 않겠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본인도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둘이 함께 나오는 외근에 민현 자신도 설렘을 감추기가 퍽 어려웠다. 하지만 아직 조사는 시작도 안한터라 그저 머리를 쓰다듬기만 하며 그 마음을 겨우겨우 감췄더랬다.
“빨리 조사 끝내고 농땡이나 칠까?”
“진짜요? 황민현이?”
“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거야.”
나도 너 만큼 둘이 같이 있고 싶고 그렇다구. 그런 자신의 속을 알리가 없는 여주의 눈빛이 놀라움에서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변했다.
“귀엽게-“
그리고는 민현의 주차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차 시동이 꺼지자 마자, 민현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놀리기 시작했다.
“어쭈?”
“우쭈쭈-“
귀여운건 본인이면서 자신을 귀엽다며 볼을 꼬집는 행동에 어이없다는듯 귀여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힘없이 여주에게 자신의 볼을 내어주며 잠자코 당하고만 있던 민현이 여전히 한쪽 볼은 여주에게 잡힌 채 체념했다는듯 자신의 안전벨트를 먼저 풀었다.
“어딜 도망가,”
그리곤 어딜 도망가냐는 여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어버린 민현이 부드럽게 여주의 얼굴을 감싸안고 빠르게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미처 감지 못한 여주의 수줍은 두눈이 깜박였다. 가지런히 두 눈을 감고 있는 모습 마저 섹시해 가까이 바라볼 수가 없어서 스르르- 여주도 눈을 감았다.
부드럽지만 평소의 민현과는 다른, 뭐랄까 조금은 끈적한 느낌에 몸의 힘이 풀려갈 때 즈음 민현이 살짝 아쉽게 먼저 입술을 떼었다. 두 사람 사이로 조금 가파른 호흡이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