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동안 여주를 끌어안고 있던 윤기가 몸에 힘을 풀고 서서히 여주를 놓아주었다. 곧 두 사람은 윤기의 집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담요에서 가만히 누워만 있던 설탕이가 느릿느릿 걸어나와 윤기의 무릎 위에 눕는다. 설탕이의 애교에 분위기가 조금은 풀리고, 윤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미안해. 피곤해서 좀 예민했어."
"..."
"오늘 하루종일 머리가 아팠어. 손목도 뻐근하고, 눈도 아프고. 여태 게임 내면서 이렇게까지 고생한 적은 없었는데, 유독 이번에 그렇네."
"..."
"너 만나려고 퇴근했는데, 정국이랑 같이 있는 걸 봐서. 기분이 좀 나빠졌어."
윤기가 설탕이를 살살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가만히 듣던 여주는 설탕이를 데려와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옆에 놓인 가방에서 파스와 손목 보호대를 꺼낸다. 윤기가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데도 여주는 별 말 없이 손을 내민다. 윤기는 여주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얌전히 올려놓는다. 여주는 윤기의 손목을 조심히 잡고 파스를 뿌린 뒤 손목 보호대를 둘러준다.
"아까 만나자고 했던 거, 이거 때문이었고."
"..."
"정국이는, 내일 형 생일이라고 해서 선물 고르는 거 도와줬어."
"..."
"정국이가 우리 카페 단골이니까 고마워서 옷도 하나 사줬어. 정말 사심 없이."
윤기가 바빠지기 시작한 때부터 자신과 있을 때 자꾸만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윤기가 신경쓰였던 여주는 윤기를 보지 못했던 몇 일 내내 보호대와 파스를 가지고 다녔다. 손목 보호대를 다 채운 여주가 걱정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윤기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여주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자신이 정말 섣불렀다는 걸 느껴 미안해진 윤기다.
"내일부터 설탕이 우리 집에 데려다 놓을게."
"어?"
"어짜피 오빠 집에도 거의 안 있잖아."
"..."
윤기의 생활 속에서, 여주가 자꾸만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쑥쓰러워 잘 표현하지 못할 때, 먼저 알아채고 다가와주는 여주가 고마웠다. 자꾸만 애정이 부풀어만 갔다. 곧 윤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려 결국엔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윤기에게 여주라는 사람의 의미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여주야."
"응?"
"사랑해."
"..."
설탕이의 털을 빗던 여주를 조용히 쳐다보던 윤기가 온 진심을 다해 건넨 말 한마디. 세 글자일 뿐인데 그 안의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들이 여주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말로 다 하지 못할 윤기의 감정이 전달되는 것 같은 벅차오름에 여주는 예쁘게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나도."
오늘과 같은 이 떨림은, 익숙해질수록 설레는 느낌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힘 내자!"
우렁찬 석진의 말에 사무실의 직원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대답했다. 우리의 슈가씨는 그저 묵묵히 화면만 바라보지만. 슬금 슬금 윤기의 자리로 다가온 석진이 윤기의 손목 보호대를 보며 눈을 빛냈다. 갑자기 닿는 손길에 움찔한 윤기가 석진임을 확인하곤 인상을 쓰며 손길을 걷어냈다.
"뭐야? 이런 거 신경 안 쓰던 놈이?"
"아 좀."
"여자친구가 사줬냐?"
"어."
습관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최종 점검을 하던 윤기가, 석진의 물음에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예전같았으면 큰 소리로 웃으며 놀려댔을 석진이지만, 요즘은 그저 흐뭇한 미소만 띄울 뿐이다. 몇 년째 알고 지내며 제대로 된 연애는 한 번도 안 하던 놈이 이러는 걸 보니 여주가 고맙기도 하고.
"저, 선배님. 이거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어, 뭐."
"여기서 이렇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윤기에게 혼나 눈물을 보였던 신입은, 오히려 그 날 이후로 윤기에게 더 다가갔다. 질문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시간을 더 투자해서라도 완벽에 가깝게 일을 처리하려 노력했다. 윤기는 드디어 정신이 들었구나 싶었지만 신입에게는 윤기에게 잘 보여야지, 하는 사심에서 나온 행동들이었다.
"어. 그렇게."
"이거 맞아요? 대박!"
"어 맞어. 잘했네."
윤기는 신입에게 미안한 감정도 좀 있고 하여 차근차근 가르쳐 주다 보니 결과도 꽤 괜찮아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박지민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기분같았다. 오랜만에 웃으며 잘했네, 하는 칭찬을 하자 신입은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다. 얼굴이 왜 빨개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뭐, 그랬다.
"게임 출시까지 하루 남았습니다!"
윤기의 시간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그 와중에도 매일 여주와 통화하며 애정표현을 주고받고, 설탕이의 하루를 보고받고. 이제는 완전히 사랑꾼의 모습을 갖춘 윤기다. 그 덕에 여주도 윤기를 만나지 못하는 시간동안 애틋함이 더욱 커져갔다. 몇 일 동안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한 윤기가 다크서클을 매달고 최종 마무리 작업을 했다. 눈이 건조해 뻑뻑하게 느껴질 찰나, 띠링 하는 메세지 소리에 핸드폰을 확인 한 윤기가 금세 씩 웃어보였다.
[딱 지칠 시간이다! 보호대는 잘 차고 있죠? 스트레칭도 틈틈히 해주기!]
[피곤하고 졸려]
[기운 차리고 내일 잘 끝내고 오면 뽀뽀 백번!]
뽀뽀라는 단어에 반응한 윤기가 자세를 고쳐잡고 기지개를 크게 쭉 폈다. 여기저기가 쑤신 몸과 달리,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성공적인 시작을 축하하며!"
"짠!!"
"짠짠짠!"
윤기의 회사 게임이 출시된 날, 설명회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직원들은 회사 근처 맥주집에 둘러앉아 자축 회식을 했다. 윤기도 기분 좋게 앉아 있었지만, 속으로는 언제 빠져나가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지금 나가자니 이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고, 이 자리가 금방 끝날 것 같진 않고. 여주는 너무 보고싶고.
"슈가님 여자친구 소개 안 시켜줄 거에요?"
"어?"
"맞아! 저번에도 쫓아내듯이 나가시고!"
"맞아요! 한번 보여줄 때도 됐잖아요!"
윤기는 친하게 지내던 후배 직원이 날린 돌직구에 당황했다. 물론 직원들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앞에서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야 한다니. 난감한 표정으로 석진을 바라보니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발개진 얼굴로 헤헤, 웃고만 있다. 평소대로 칼같이 잘라내고 싶었지만, 다들 술기운이 올라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야 술이나 마셔."
"진짜 치사하다!"
"맞아! 치사해요!"
"여자친구 소개시켜주면, 오늘 2차 면제!"
윤기의 귀가 솔깃할 제안이 들려왔다. 여주를 이용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3차까지 끌려갈 분위기라 윤기는 잠시 고민했다. 곧 알겠다며 여주에게 연락을 했고, 여주는 쉽게 알았다고 답해왔다. 과정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여주를 볼 생각에 윤기도 조금 들떴다.
20분 쯤 지났을까, 직원들은 취할 듯 취하지 않으며 분위기를 이어갔다. 거의 다 왔다는 여주의 문자를 확인한 윤기가 테이블 위의 물잔을 들어 물을 마시는데,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신입이 흐흐, 하고 웃으며 윤기를 바라본다. 살짝 눈이 풀린 것이, 취기가 꽤 오른 듯 했다.
"선배."
"어."
"저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윤기의 팔을 덥썩 잡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얼떨결에 일으켜진 윤기가 고!고!를 외치는 후배를 쳐다보다 지갑을 챙겨 술집에서 나왔다. 근처의 편의점에 도착하자 신나하며 아이스크림을 가득 고르는 후배를 바라만 보다, 조용히 계산을 하고 나와 다시 술집으로 향했다.
"아이고, 다리야."
"야. 거기 더러워."
"선배. 나랑 얘기 좀 합시다."
아이스크림은 윤기가 들고, 비틀거리며 먼저 걷던 신입이 술집 앞의 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갑작스런 행동에 윤기가 더럽다며 말려보지만, 신입은 눈에 힘을 주며 손가락으로 윤기를 가르키더니 이야기 좀 하자며 윤기의 말문을 막았다.
"진짜 나쁜 거 아는데.."
"..."
"저 선배 좋아해요."
"..야."
"나도 정리하려고 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여친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근데 정리가 마음대로 잘 되는 게 아니잖아요?"
신입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시한폭탄 급이었다. 윤기는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직원들이 다 있는 술집 안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 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이다, 생각했다. 신입은 점점 술이 깨는 듯 또렷해진 눈빛과 목소리로 윤기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선배는 칭찬도 해주고, 자상하고."
"..."
"그러니까 내가 자꾸만 더 가까워지고 싶어졌다구요."
"..."
"..나 선배 포기 못 해요."
"..."
"좋아해요."
윤기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음을 고백하는 신입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랐다.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지가 갑자기 묵직하게 느껴졌다. 마음에 없는 사람에게 받는 고백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받아들이지 못할 감정들이 무수히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윤기는 가만히 고개를 푹 숙인 신입을 바라보았다.
"..오빠."
"...여주야."
그 무거운 분위기 속으로, 여주가 들어왔다. 의도치 않게 마주하게 된 세 사람은 누구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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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슬픈 소식이지만 민집사는 곧.. 완결이 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께서 보내주신 많은 성원에 저도 아쉽기만 하네요 ㅠ..
그리고 새작에 대한 구상도 많이 변경되고 있어요.
애초에 계획했던 청춘물은 다다음 글로 미뤄졌고, 요즘 새롭게 꽂힌 소재를 먼저 연재하려고 해요. 기대해주시던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ㅠ
오늘도 너무 고마워요 독자님들 ♥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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