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18
w.규닝
18. 고해
밖에 나가지 마. 그것은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들어오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가장 많이 받아치고 있는 말이기도 했다.
개새끼는 감이 좋다. 그저 웃어보인 성규는 그의 말을 가뿐히도 무시했다. 일부러 집 앞 슈퍼에 나가면서도 한 두시간은 족히 걸었다가 집에 들어올 때면 현관문 코 앞에 서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우현을 맞이하게 된다 해도 상관 없었다. 유난 좀 떨지 마. 그렇게 말한 성규는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우현의 옆을 지나쳐 들어왔다.
한 번은 우현이 아프도록 키스를 해온 적이 있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새벽까지 하릴없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왔던 날, 처음으로 본 우현의 화난 모습은 새로웠다. 남우현, 왜 화가 났어. 그렇게 묻기도 전에 제 입을 틀어막은 우현의 입은 한참동안이나 벽 위로 성규를 몰아붙이고만 있었다. 물론 딱히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 성규는 저의 어깨를 세게 그러쥐고 있는 손 위로 가만히 자신의 손을 얹었다.
죽기 직전에 만난 사람 치고는 미치도록 아까운 구원이었다.
그냥 살까,하는 기대마저 갖게 만들어버린 그런 사람. 다시는 제 결정에 방향을 트는 일 따윈 없을 거라고 자부했던 그 때의 다짐을 뿌리째 흔들어와버리는 나쁜 구원자였다. 덜컹거리며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오는 기차는 어느새 어스름한 저녁 무렵을 달리고 있었다. 가로등 두어개가 밝히고 있는 창 밖을 내다보던 성규가 힘없는 고개를 등받이에 기대었다.
삼일 가량은 온기 없는 마룻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한달 반 만에 다시 찾은 전주 집은 그 때보다 더욱 녹슨 대문만이 성규를 반겼다.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장롱은 의외로 홑이불 몇 장을 뱉어 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기가 서린 마루 위에 얇은 이불을 깐 성규는 그렇게 꼼짝없이 삼일을 났다.
우현과 함께 들렀던 뒷마당에는 훨씬 더 많은 잡초가 자라 있었다.
상자를 묻은 곳에 해 두었던 작은 표식을 찾아 걸음을 옮겼었다. 단단한 흙은 그 동안 내렸던 비에도 불구하고 정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개새끼를 닦달해서, 깊게 묻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개새끼 한 마리는 잘 뒀다니까. 성규는 난데없이 터지는 웃음에 저도 모르게 제 입가를 가렸다. 그렇게 흙더미 위로 주저앉은 성규는 한참동안이나 실실거리는 웃음을 흘렸었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아서…."
표식 위에 올려 둔 마른 나뭇가지를 집어든 성규가 웃었다.
"눈물이 안 나와서 미안해, 엄마."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울어주지도 않는 아들이야. 성규가 나뭇가지로 작게 원을 그렸다.
"엄마 옆에 여기. 내 자리 만들어 주면 안 돼?"
묻었던 상자의 크기와 같은 원을 그려 넣은 성규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듣는 이 없는 고백을 시작했다. 여기, 나란히 누워서 자고 싶은데. 그렇게 그린 동그라미 위로 나뭇가지를 던져 놓은 성규가 천천히 깜빡이던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갑작스럽게 이런 부탁해서 놀랐지. 엄마. 조심스럽게 흙더미 위로 제 손을 얹은 성규는 그렇게 한참이나 또다시 말을 잃었다.
아무리 제 앞에 없는 사람이라지만 말을 꺼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둠이 천천히 내리고 있는 하늘 아래에서, 한시라도 빨리 털어놓아야 나중에, 하늘 가면 덜 미워할텐데. 하는 생각도 뒤따라 들었다. 성규가 억지로 물고 있던 입술을 떼었다.
"남우현은 나랑 만나기 전에 군입대를 신청했대."
왜냐면 엄마, 걔도 그렇게 살기 싫었대. 도망치듯이 가는 군대라는 말이 바로 그런 거였대. 그 새끼한테는 그게 그 때 할 수 있었던 단 하나뿐인 선택지였대. 나처럼…. 걔도 그 때는 그렇게 살았었다고 그러더라.
그 말을 하면서 얼마나 질질 짜대던지, 보기는 싫었어. 급기야는 또 다시 헤실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건 성규가 머릿속을 파고드는 우현의 얼굴에 풀어지려는 가슴께를 한 손으로 짚어보았다.
제 옷깃을 스치고 있는 바람이 찬 탓에 짚은 가슴도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여느때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은 쌔한 기분만을 안겨 주었다. 항상 무언가를 고백하려고 하면 이렇게 죄라도 지은 것처럼 빨리 뛰나봐. 작게 웃은 성규가 다시금 엄마,하며 운을 띄웠다.
나는,
그 전에 죽기로 결심했었어.
남우현을 만나기 전에 그랬어. 김명수가 입대하면 그렇게 소리없이 죽어버리면 되겠다. 제대하고 나면 나 같은 건 찾지 않아도 당연히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지독할만큼 소리없이. 어쩌면 내 전부였던 그 애를 보내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걸 알았어.
인정하긴 싫었지만 김명수는 나한테 미쳤어. 엄마도 알았으려나. 분명히 뭐가 돼도 될 게 확실한 그 아이가 나한테 미쳐 있었다는 걸 엄마는 알았을까 궁금하다. 내가 지금까지 그 애의 앞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도. 그러면서도 그 애가 밉지 않아 사실은 나조차도 미친 척 둘이 같이 행복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욕심 가졌었다는 것도. 엄마는 하늘에 있으니까 전부 다 알고 있지 않았으려나 싶어.
그래서 내가 죽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김명수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찾아낼거고, 나는 그게 싫어.
다시는 찾지 못하게 내가 죽어야 맞아. 끝이 미묘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적막한 독백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죽어야 맞다고. 그게 정답이라는 것을 끔찍하게도 잘 알고 있으며 이젠 그르칠 일이 없게 당신에게 고백한다. 성규가 목 끝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거야. 그렇게 말하는 성규의 속마음은 그와는 정 반대의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할 건데, 예정했던 것처럼 나는 진짜 죽긴 할 건데.
…죽지 않으면 안되는데 엄마.
죽기 싫어져서 힘들어. 더 살고 싶은 내가 싫어. 겨우 결정했던 내 삶의 방향이 더이상은 달라지지 말았으면 했는데, 나는 또 실패하고 있는 것 같아. 이미 나는 죽을만큼 죽기 싫어. 지금에서야 드는 내 욕심이 정말 딱, 그만큼 싫어 죽겠어.
울지 않으려 애쓰는 눈은 오히려 더욱 차가워져만 갔다. 부러 크게 뜬 눈에 차게 스미는 한기는 충혈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그렇게 벌게져오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꺼트린 성규는 제가 그려놓았던 동그라미를 지웠다. 그래 사실은, 명수에게 쓰려고 했던 삼개월을 우현에게 쓰게 된 순간부터 알았다. 나는 이미 죽기 싫구나 하는 것을. 일부러 관심을 돌려 봐도, 잘 보지도 않는 티비 프로그램에 애써 눈길을 돌려 봐도 녀석이 옆에 있는 것은 변하지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나를 자꾸 구원이라고 불러오는데, 그 새끼는.
"ㅡ정작 본인이 구원인 걸 모르나봐."
"진짜 씨발새끼지…."
진짜 진짜 좆같지. 그런데 제일 걸리는 건 그 좆같은 녀석이라는거야.
어떻게 하면 좋지, 이제 어떻게 등을 돌리면 좋지. 애초에 관심같은 거 주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내 욕심 때문에 이미 멀리 와 버린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잠시동안만 행복하고 싶었던 내 욕심을 넣어두기만 했었더라면, 우린 지금 달라졌을까.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달리던 기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성규는 아까까지도 짚었던 흙더미의 느낌이 선연히도 남아있는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많았다. 무심하게도 많은 인파는 저 혼자만 멈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느낌을 주며 바쁘게도 움직였다.
밤의 역은 회전목마같았다.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아래에 정해진 동선만을 걷고 있던 성규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저 잠깐 걸음을 멈춘 곳에도 가로등은 있었다. 잠시라도 어둠 속에 있도록 내버려두질 않은 회전목마는 잔인했다. 성규는 온갖 소음이 가득한 역 앞에서 한참동안이나 어두운 벤치를 찾아, 같은 자리를 도는 목마처럼 일정한 걸음걸이를 옮겼다.
*
「어디에 있는지만」
「아니면 뭐하고 있는지만」
그것만 알려줘. 연달아 보내던 문자의 마지막 글자를 완성한 우현의 손이 잠시동안 허공 위로 굳은 채 멈추었다.
그러다가 결국 다시 지워버렸다. 3일이 넘는 시간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결국 끝맺음 없는 문자 두 개만 전송시킨 우현이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렇게 재촉해버리면 더 안 올 것 같아. 차라리 말 없이 기다리는 편이 나을 거라고, 역효과는 내지 말자는 생각에 답답해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에도 연락을 참은 우현이 옥탑방의 대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건데 김성규. 우현이 한없이 식은 눈을 힘주어 감았다. 요즘따라 왜 그러는 건지를. 김명수와 무슨 일이 있는 것이라면 저한테라도 조금 말해줄 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서운함도 마저 밀려왔다. 나는 아직도 김명수의 발톱만큼도 중요한 존재가 아닌 걸까. 만약에 돌아온다면, 언제가 됐든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 날로 바로 입장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간 우현이 차갑게 언 손을 주머니에 구겨넣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홉시가 넘는 시간이지만 괜찮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등장할 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게 김성규였으니까. 느닷없이 집을 나갔던 것처럼 느닷없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노릇이다. 너는 나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거라고, 그저 평범하게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나라고 생각했다면 너는 진짜 오산이었다고. 돌아온다면 제일 먼저 소리치듯이 몰아붙이고 싶었다. 나한테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 너는 3일을 꼬박 밤 새워 기다리는 짓을 백번을 더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 씨발."
머리 끝까지 치미는 화에도 연락 없는 액정만을 수없이 껐다 키던 우현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김성규."
저 쪽 언덕 아래에서부터 터덜터덜 걸어올라오는 누구의 실루엣은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과 닮아 우현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언덕을 지나갔음에도 그 사람 하나하나는 우현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제가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랬을 것은 당연지사였고, 비로소 감이 오는 이가 언덕 위로 모습을 드리웠을 때에는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가슴에 단박에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은 성규의 이름부터 입 밖으로 내버렸다.
저만치 떨어진 가로등 아래를 지나던 실루엣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작게 읊조린 이름을 들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우현은 가로등 아래에 멈춘 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려 했을 때 안달이 난 걸음을 떼었다.
노랗게 비추는 가로등 빛은 그토록 기다렸던 성규의 얼굴을 그려내었다. 미처 성규라는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한 우현은 표정 없는 천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 반동에 성규의 몸은 제가 걸어왔던 길 뒷편으로 꺾여져 나갔다. 야. 지나치게 센 힘으로 저의 어깨를 조여오는 팔에 인상을 찡그린 성규가 물기 없는 목소리로 우현에게 말했다. 숨은 쉬어야지, 개새끼야. 그렇게 변함없는 목소리로 개새끼라는 타박을 뱉어오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우현은 한 손으로 끌어안은 성규의 뒷통수를 더욱 제 쪽으로 안아 넣으며 밭은 숨을 뱉었다. 저만치서부터 뛰어오느라 급한 숨소리는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조용한 골목 어귀 위로 울렸다.
잠시 후에, 잡았던 어깨에서 힘을 푼 우현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려 성규와 마주보았다. 끌어안은 우현 탓에 차갑게 얼어붙은 겉옷 위로 얼굴을 기대고 있던 성규의 얼굴이 가로등 빛 위로 완전히 드러났다.
"문자,"
"……."
"왜,"
"……."
"보고도."
성규의 얼굴을 보게 되니 입 안에 있던 문장들은 단어가 되어 끊겨 나왔다. 우현은 울컥 치미는 마음에 말조차 잘 나오지 않는 제가 싫었다. 왜 보고도 씹었어. 어딜 갔다 이제 왔어. 왜 말도 없이 나갔었어, 왜 이제서야 돌아왔어. 속으로는 끝도 없이 이어져오는 질문공세가 입 밖으로는 쉽사리 튀어나오질 않았다. 결국엔 막막한 제 입술을 꾹 깨문 우현은 미동 없는 성규의 표정에 저의 눈을 고정했다.
제일 먼저 마주하면 하고 말거라던 다짐은 물 건너 간 지 오래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런 저런 말들로 몰아붙일거라 다짐하던 우현의 머릿속은 깨끗하게 비워졌다. 역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다. 그런 건 천천히 추궁하면 되는 문제이며 자신에게 제일 급한 것은 눈 앞에 있는 천사일 뿐이라고. 그렇게 답은 커녕, 질문조차 제대로 뱉기 전에 성규의 어깨를 다시 한 번 끌어안으려 그의 팔목을 잡아당겼을 때였다.
"다시는 무식하게 기다리지 마."
방금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개새끼를 운운하던 목소리가 바뀌었다. 우현은 어딘가 모르게 감정 없어 뵈는 말을 듣자 다급하게 어깨를 감싸려던 손 동작을 굳혔다.
성규가 제 어깨 언저리를 배회하는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안 오면 안 오나보다, 그렇게 생각 하라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집 밖에 나와있으면서 애꿎은 사람 죄책감 들게 만들지 말고."
"…야. 넌 무슨 말을."
"기다려달라고 말한 적 없어. 멍청하게 몇날 몇일 기다리고 있던 건 순전히 너야."
그렇게 말해오는 성규의 입가는 의미 모를 웃음을 띠었다.
답답했던 표정이 반가움으로 물들었던 것도 잠시, 어이없게 굳어버린 우현의 표정은 성규의 말에 대한 허탈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말하려던 것마저도 멈추어버리게 만든 성규의 말은 우현에게 상처를 남기고도 남았다. 멍청하게, 몇 날 몇일이라고. 성규의 말을 곱씹던 우현은 짐짓 이상해지려는 기분을 느껴 가까이 다가섰던 것에서 한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작작 해."
"……."
"그런 멍청한 짓 좀. 작작 하라고."
묘하게 뚝뚝 끊겨오는 목소리는 은근한 억양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제게서 한 걸음 물러난 우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웃은 성규는 아마, 그 때부터 눈가에 힘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뭐하고 왔냐고 묻고 싶지. 나 돈 벌고 왔어."
우현이 하고 싶었던 물음까지 먼저 꺼낸 성규는 뜻밖의 이유를 꺼내어놓았다. …돈? 가만히 성규의 표정 변화를 살피고 있던 우현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득찼다.
"돈은 왜. 뭐가 부족해서?"
"뭐가 부족하냐고?"
"……."
"왜. 나는 항상 니 그늘 밑에서 살고 있으니까 돈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새낀 줄 알았어?"
순전히 의아한 물음을 뱉었던 우현의 말문이 막혔다. 한층 더 날카로워진 것 같은 눈초리로 저를 쳐다봐오는 표정은 단호했다. 우현이 다소 격앙된 성규의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왜, 나는 항상 뭣도 없는 놈이여야 해. 왜 나는 돈 같은 걸 바라면 안 되는 놈이여야 해."
"그런 걸 말한 게 아니잖아.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지가,"
"돈은 말야. 나는 항상 그렇게 벌었잖아. 너도 알지."
은근히 가벼워진 성규의 억양은 종래에는 비실거리는 웃음까지 섞여졌다.
그치? 너도 알잖아. 그렇게 재차 물어오는 목소리에 심란해지려는 마음으로 성규의 말을 경청하려던 우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돈을 벌었다? 김성규가 돈을 벌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불현듯 엄습해오는 지난 날의 김성규와 지금의 표정이 겹쳐보였고 성규의 표정은 잔인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자고 왔어. 오랜만에 돈 벌었더니 허리가 다 아파 죽겠다. 백만원 넘게 벌었으니까 많이도 했지. 오랜만에 그런 새끼들 상대하다보니까 역시 몸이 남아나질 않더라고. 넌 내 개새끼니까, 집에 들어가면 얼음 찜질 해줄거야?"
확인 사살.
무섭도록 끼쳤던 어떤 예감을 적중시키듯이 날아든 성규의 말은 확인 사살, 그 자체였다.
성규의 말에 우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허리 진짜, 엄청 아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칭얼거려오는 목소리는 저의 팔을 잡아오려던 우현의 손에 힘이 빠지게끔 만들어놓았다. 우현은 계속해서 저에게 얼음 찜질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늘어놓는 입을 그저 초점 흐린 눈으로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다.
뭐라는거야. 진짜 뭐라는거야 김성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어지지도 않는 질책을 입 안으로 씹으며 우현은 제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3일동안 기다렸더니. 집 안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고, 니 입에서 불려 마땅한 개새끼처럼 대문 앞만 지키고 있었는데 뭐라고 하는거야, 너는. 우현의 입은 무의식적인 물음을 던져 놓았다. 잤어?
"잤다는 게… 니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뜻인 줄이나 알아?"
다른 놈들한테 몸을 내줬다는 소리 말고도, 지금 나한테 그게, 무슨 뜻이 되고 있는지를. 그런 거 알기나 해? 우현은 여전히 제대로 터지지 않는 말을 뱉고 나서 입술을 물었다.
미안해. 생각 좀 하느라고 다른 곳 좀 돌아다니다 왔어. 그렇게 말 했어도 치밀었던 화를 풀어줄까 말까 했던 우현의 고민은 이미 물거품처럼 사라진지 오래였다. 역시 김성규는 저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어왔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이렇게나 하나도 모르겠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우현은 떨려오는 저의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어 성규를 쳐다보았다.
"대답 좀 해."
"……."
"대답 좀 하라고. 김성규. 지금 그거, 무슨 뜻이었어?"
"너 왜 그런 반응이야?"
"뭐?"
"왜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하냐고. 이런 거에도 그렇게 충격 먹을 만큼, 너 나 좋아했어?"
성규의 되물음에 우현의 입은 거짓말처럼 다물어졌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손을 쓸수조차 없는 김성규였다. 우현은 허탈함을 넘어선 표정으로 성규를 마주했다. 너를, 좋아했냐고?
"그게 지금 넌, 나한테 할 말이냐?"
"나 좋아했구나."
"……."
"진짜 그래? 몰랐는데."
"야. 너ㅡ"
"이 정도로 이런 반응 보여 줄거면, 나 죽은 다음엔 어떻게 살 건데?"
성규가 완전히 다물어진 우현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응? 재차 물어오는 성규의 목소리는 아득했다. 적어도 우현의 귀에 들리기엔 그랬으니까. 순간 우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까부터 잔뜩 이상한 말만 늘어놓고 있는 천사는,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잊게 해버릴 만큼 충격 뒤에는 더 큰 충격을 연속으로 안겨다주고 있었다. 죽어? 누가. 우현의 입가에 어이 없는 웃음이 서렸다. 죽어?
"씨발. 누가 죽어?"
"……."
"누가 죽냐고. 내가? 아님 니가?"
우현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욕에 자신에게마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씨발같은 말은 어디서 알아왔어?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고있어? 우현은 여지껏 눌러왔던 화를 제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에 저의 이를 아프도록 악물었다. 말을 아껴야 한다. 혹시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 화를 내고 있는 와중에도 머릿속 한 켠에서는 당치도 않은 일말의 희망을 생각한 우현은 그보다 더욱 심한 말을 잇새로 삼키며 성규를 노려보았다. 죽는다는 말은 취소해. 그의 눈은 말로 꺼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말을 담아내고 있었다.
"개새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이해력이 딸리나봐. 죽는 건 나라고. 한달 반 뒤에 명수가 입대하면 바로 뒤질건데, 나."
"……."
"그래서 김명수 제대하면 쓸 돈 벌러 나갔다 왔어. 걔가 보기엔 그렇게 안 생겼어도 작곡 공부 하고 있다? 예체능이래. 그런 거 돈 완전 많이 들잖아. 너도 알아?"
"……."
"형 노릇 좀 한 거야. 제대하고 나면 나는 이미 없을 텐데, 아무것도 안 해놓고 가 버리는 건 너무 무책임하니까. 어차피 죽을 몸 좀 막판에 더러워진다고 미련 남을 거 없잖아. 아무래도 상관 없었어. 아, 너 나 좋아한다고 했지? 그러면 한 번 해줄 수도 있어."
"……."
"죽기 전인데 뭔들 못해. 이제 진짜 상관 없으니까 말만 해. 하고싶어?"
성규는 이미 거칠 것이 없었다. 제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뱉어질 때마다 변하는 우현의 표정 같은 것도 이미 성규의 안중에는 없었다. 종래에는 작은 눈꼬리를 휘며 웃은 성규가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좋아한다며. 왜 선뜻 대답을 안해.
"너도 김명수랑 마찬가지야. 이제 다신 나 못 봐. 너랑 김명수 입대 날짜가 거의 비슷하더라고."
"……."
"명수한테 해줄 수 있는 건 돈 뿐이고,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그짓거리 한 번 해주는거밖에 없으니까 하는 말이야."
한 번도 못해보고 헤어지면 여지껏 좋아한 보람이 없을텐데. 자고 싶으면 자자고. 그것은 거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다.
천사의 입에서 연달아 나오고 있는 말들은 도무지 이해하기에 힘든 말들의 연속이었다. 더이상 받아칠 말들조차 나오지 않는 입을 멍하니 벌린 우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쁜 색으로 물든 성규의 얼굴에 초점 없는 시선만 맞추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가로등이 비춰내고 있는 얼굴은 뱉어내고 있는 말들과는 다르게 따뜻하고 또 잔잔했다. 당장이라도 제 입술을 갖다 대고 싶을 만큼. 딱 그 정도로 예쁜데, 지금. 너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냐고. 우현은 비아냥을 끝으로 입을 다문 성규의 눈만 꿰뚫어보듯이 쳐다봐왔다.
사실은 제게 했던 말들은 모두 흘려들어도 상관이 없었다. 한 번 해주겠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것들은 무시해버리면 그만이겠는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마음 한 켠에 걸려오는 말은 죽는다는 것. 나 죽은 다음엔 어떻게 살건데,하고 물어오던 아까의 목소리가 우현의 사고회로를 보란듯이 멈추어 놓았다. 우현이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그래서 진짜, 죽기라도 하겠다고?"
"……."
"대답해봐. 꼭 진짜로 죽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말하고 있잖아, 니가."
"……."
"방금 전 했던 말들은 니가 지금 흥분했으니까 대충 못 들은 걸로 쳐도 상관 없어. 자자느니 하는 건 진심이 아닌 거 아니까. 근데 뭐? 죽어? 너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우현은 채 완성되지 못한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어느새 성규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우현 쪽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랬다. 성규가 그랬던 것처럼 하고 싶은 말들만 모조리 늘어놓으려다가 입을 다문 우현은 제 눈을 있는 힘껏 노려보고 있다가 눈을 돌린 성규의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 내 눈 봐. 그렇게 말하는 우현은 억지로 성규의 고개를 돌려 저의 눈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성규는 여전히 시선을 비켰다. 다시 나, 똑바로 봐. 우현의 억눌린 목소리가 재차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렸다. 성규가 기어이 우현의 눈을 노려보다시피 쳐다본 후에 비웃음을 흘렸다.
"죽겠다고."
성규가 저의 앞을 막아섰던 우현의 어깨를 힘을 줘 밀어내었다.
"죽을 거라고. 두번 말하게 하지말고 좀 알아들어."
우현은 저만 남겨두고 멀어지는 발소리에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따라오지 마. 마지막으로 제게 남겨진 말은 끝까지 잔인했다. 성규는 넓은 보폭으로 우현을 등져 걸었다. 아무도 지나지 않아 고요한 언덕 어귀에는 바삐 멀어지는 성규의 발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왔다.
눈이 그친 계절에 맞은 일이었다. 함박눈이 정말이지 펑펑 쏟아져내리던 어느 겨울날 만난 천사는, 겨우 따뜻해지기 시작한 봄의 시작에서 죽음을 선고해왔다. 죽는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되면 정작 죽는 것은 저라는 것을 모르는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 미칠만큼 의미 없던 생을 지금까지 이어 붙여 온 것도 전부 다 너 때문인데. 방금까지 성규와 둘이 섰던 가로등 불빛이 미약하게 깜빡였다. 우현의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이런 말들만 늘어놓고 가 버린 주제에, 따라오지도 말라니.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싶다. 우현이 차마 감기지도 않는 눈을 뜨고 저의 발 끝에 시선을 두었다. 오지 않는 시간동안 진심으로 미쳐 버린 사람처럼 너의 부재만 생각하며 살아왔던 놈인데, 이젠 나보고 어떻게 하란 소린가 싶다. 우현은 어느새 멀어져 들리지 않는 발소리에 집중하려 애썼던 귀까지 이제는 멍해져 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우현은 점점 짧은 간격으로 깜빡여오는 가로등 빛 아래에서 한참동안이나 발을 떼지 못했다.
깜빡이는 불빛은 미묘한 스파크 소리만 남겨두었다. 우현은 제가 선 곳을 제외한 어둠 속으로 눈을 들어올렸다.
차라리 나를 구원하지…말지 그랬어.
놔줄 수가 없을 정도로 길들이지 말지 그랬어. 김성규.
* * * * *
그 날 이후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봄을 맞이하는 비는 한 번 내리기 시작해선 몇 날 몇 일을 끊이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그건 다행인가. 우현은 무서운 기세로 현관 문을 두드려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턱을 괴었다. 비를 싫어하는 김성규는, 그 탓인지는 몰라도 집 밖으로 전혀 나가는 일이 없었다. 물론 옥상에 잠깐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금방 제가 따라붙어 버리는 탓에 귀찮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현은 소파 발치에서 성열이 두고 간 큐브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성규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성규가 말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부러 말을 걸면 오히려 저만치 달아나버릴까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겠다고 생각한 우현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성규의 옆 쪽으로 당겨 앉았다.
거실 위로는 드르륵 거리며 큐브를 돌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큐브는 성규가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찾게 되는 심심풀이 장난감이라는 것을 알았다.
니가 아무리 그렇게 말했어도, 나 여기 못 나가. 알지. 그렇게 거의 협박 비슷한 어조로 부딪혀오는 우현에게 성규가 한 대답은 그저 응.하는 작은 수긍이었다. 어차피 쉽게 떨어져나갈 개새끼도 아닐 거라 예상은 했던 마당이라 쉽게 우현을 집 안으로 들인 성규는 그날부로 어딜가든 집요하게 따라 붙는 우현을 굳이 내쳐내지도 않았다. 담배를 피러 평상에 나가면 당연하게 따라 나왔고, 간단하게 찬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들르면 더욱 당연하게 따라붙는 녀석은 지독했다. 성규는 비스듬히 문 담배를 바닥으로 뱉어냈다.
"비 오니까."
"……."
"기분이 이상해."
그치. 그렇게 말한 성규는 돌리고 있던 큐브를 멈추었다. 그 날 이후로는 눈길조차 잘 주지 않던 우현에게 고개를 돌린 성규는 평소보다 더욱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현은 그런 성규에게 입을 맞추었다.
큐브 소리가 멈춘 거실엔 약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배경이 되어 어우러졌다. 오랜만에 찾아들었던 입술은 금방 떼어졌다. 우현이 성규의 뒷통수를 끌어안았다.
"그런 기분 들지 마."
반전을 남겨 두고 있는 여느 영화처럼 그렇게, 예고편 같은 말은 제발 하지 마. 우현은 그 날 이후, 2주가 넘는 시간동안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더욱 잘 웃기 시작한 성규를 보면서도 웃음이 나질 않았다. 오히려 웃음을 잃은 것은 우현 쪽이었으니까.
죽음을 예고한 사람을 곁에 둔 것 치고는 여유로운 날들을 함께 하고 있어서 불안했다. 우현은 다시금 큐브에 손을 대기 시작한 성규의 어깨를 끌어 당겼다.
미안 |
해요.. 연재가 늦는것도 미안하고 저번편에 답글 못달아드린것도 미안하고 ㅠ,ㅠ.....답글 안달아드린 적은 없었는데, 18편을 들고왔는데도 면목이 없어서 으휴..죽겠어요 방금은 또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어요 진심 더 바빠진거같아요. 최대한 빨리 모든 일 끝내고 올게요 12일까지는 좀.. 뜸해질거 같습니다 몇편 남겨두지도 않았는데 늦어지는 연재 미안합니다 그대들 고의가..아니어고....ㅜㅠ..아니여..아니에요 p.s 이천 칠년 마지막 겨울 바닥 위로 삼십센치 그 발목을 끌어내려 첫번째 연입니다. 이거 뜻이, 자살이었는데 그대들 알고 있었나요? 대표 명탐정 두 분 푸리그대, 에몽그대가 얻어가셨던 힌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