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이라고 하면 미련일까? 내가 적어도 김재환에게 느끼는 감정- 그 모든 것들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라고 한다면. 절대 김재환이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어서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고,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몇 년 전 김재환과 헤어질 때도, 김재환과 헤어지고 난 이후에도, 그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 일 분 일 초가 넘어갈 때도, 나는 그를 열병처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재환님, 제 전 남자친구 닮았어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의 팬사인회에 발을 들인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렇게 바래왔던 김재환 앞에 서있는 것, 전부를.
누구보다 애절했던 연애의 마침표 이후, 우린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더 김재환을 피했으려나. 나는 김재환과 엮일만한 모든 곳에 나가지 않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도 멀리했다. 우린 너무나 연결고리가 많은 사이였으니. 이별을 했다면 한 사람이 모든 걸 포기해야만 했다. 나는 그걸 자처했고. 김재환을 피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이사를 했고, 번호를 바꿨다. 김재환에게서 도망 치려 전력을 다했다.
나는 김재환과 친구로 지낼 자신이 없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김재환을 사랑하니까. 우리의 이별에 있어 약자는 나였다. 그렇게 내가 할 수있는 최선을 다해 김재환에게서 발버둥쳤지만 내 모든 것을 옥죄고 있는 건 김재환 하나였다.
“안녕하세요.”
김재환과 어떻게 다시 잘 해보려고 이 사인회에 나온 건 절대 아니다.
나는 단지, 이렇게 가까이서 널 마주할 수 있는 같잖은 명분이 필요했던 것뿐이니.
그렇게 갈망하던 네 앞에선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아, 네. 안녕…”
하세…요. 고개를 들어 날 마주한 김재환은 당황한 기색이 만연했다. 약하게 흔들리는 동공은 감출 수 없이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뿐이었지만.
김재환과 나는 옆 멤버들과 팬들이 사인을 받는 상황과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서로 한 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으니까. 김재환은 많이 변했다. 성격적인 면은 이제 남보다 못한 사이니 알 수 없다고 해도, 외형적으로는 확실히. 부풀어 터질 듯한 볼살은 어느새 홀쭉해졌고, 존경하는 분에게 선물로 받았다고 하루 종일 끼고 있던 묵주반지도 피곤한 탓에 퉁퉁 부은 손에 맞지 않게 됐더라. 그리고 이제 김재환은,
“뜬금없을지 모르겠지만,”
“제 전 남자친구 닮았어요.”
내 남자친구가 아닌 것도.
몇 년 만에 만난 김재환에게 다짜고짜 하는 말이라고는. 나도 모르게 나온 내 말을 주체할 순 없었다. 놈은 어느새 연예인이 다 됐더라. 표정관리를 하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사인에 열중하려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으니.
김재환을 불편하게 하려고 한 의도는 절대 아니었다. 단순히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가 김재환에게 말할 무언가라고는 그 질문 밖에 없었다. 요즘도 잘 지내? 따위의 질문을 건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 그렇구나.”
연거푸 코만 박고 사인을 하는 일에 집중하던 김재환의 손은 느려지다 이윽고 그대로 멈춘다. 혼잣말로 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 거리는 통에 카메라 플래시가 여러 번 터진다. 멍하니 그리던 사인을 응시하다 곧 손을 다시 움직이는 너는,
신기하네요. 손에 밴 듯 익숙해진 사인 종이가 점점 펜의 색으로 젖어들 때쯤. 김재환은 고개를 들며 말을 잇는다. 그리고 나와 다시 한 번 마주한다. 이번에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힘들진 않으시죠?”
“...”
“저를 보는 게.”
김재환은 착한 사람이다. 세심한 사람이다. 이별 이후로 나와 너는 많이 바뀌었지만 본연은 바뀌지 않는다.
덤덤한 말투. 어느새 정말 나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하고 있는 너. 나는 그 눈빛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화 속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 따위도 아닌데. 김재환의 눈빛은 내 모든 신경을 꽉 잡아버려 피를 통하지 않게 만드는 느낌이었으니까.
그 걱정스러운 눈빛이 나의 동공에 다다를 때쯤, 결국 가시가 박힌다.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듯 답답하고 아파 죽겠다. 내가 널 아직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넌, 정말 나를 잊었던 걸까. 김재환의 단순히 질문은 내 안부를 물은 것뿐이었을 수도 있었다. 아님 내게 여지를 담은 질문을 건넸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토록 그리웠던 너의 눈빛에서
나는 너를 다 잊었는데, 너도 맞지?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난 너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힘들지 않다고, 나는 너를 다 잊었다고. 응원해주려고 왔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고.
널 여전히 그리워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나는 너를 …”
ㅡ 자, 넘어가실게요.
끝까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라도 했으면 좋았을까? 그 질문에 죽을만큼 힘들다고 말했다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재환아. 이제 널 볼 일은 없을 거야.
마지막으로 너를 바라보고 있는 내 눈빛에서 느낄 수 있길 바라며, 김재환에게서 돌아섰다. 넌 나를 잡을 수도, 내가 널 잡을 수 있는 명분 따위 이제 없다는 걸, 서로 잘 알고 있는걸. 나도 알고 있어.
여전히 힘들다면. 그렇다면.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