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달빛
새벽. 이 두 글자가 시작되는 때에 감수성이라는 세 글자가 내려 앉기 시작한다. 아주 깊은 잠에 빠져 붕 뜬 몸으로 허우적 거리거나,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거나. 또는 하얀 종이에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까맣게 채워 맨 위 서랍장에 담아둔다. 그들에게 '왜' 라고 묻는다면,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그들은 그것이 그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수성이란 그런 것이다. 저가 새벽의 손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 남들도 자신과 같은 '미련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동이 트기 직전, 가장 어두운 하늘에 이끌리 듯 창가에 다가간다. 하늘이 어두운 만큼이나 빛나는 보석들이 무수히 박혀 있다. 그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채워지고 채워져 더이상 채워질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보름달. 절정에 다다른 보름달이 힘껏 내뿜는 빛은 가로등이 무색하게 도로를, 그리고 수많은 집들을 한꺼번에 비춘다. 덩달아 그녀의 깨끗한 갈색 눈동자까지도.
똑똑, 두어번 두드려진 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야경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달빛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그녀는 여리고 위태로우면서도, 그 분위기가 꽤나 고혹적이었다. 그 탓에 잠시 넋을 잃고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려 방 안으로 발을 들인다.
" 잠이 안 오십니까? "
넓은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는 목소리에도 그녀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던 그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같이 창 밖을 바라본다. 위로는 어두운 하늘이, 밑으로는 빛나는 도시의 야경이 대조되어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혹시 건물과 가로등 불빛들이 너무 밝아서 잠이 안 오시는 건가. 하지만 고개를 돌려 내려다 본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답도 얻을 수가 없었다. 그저 살짝의 암울함만 느낄 수 있을 뿐.
색으로 표현하자면 짙은 회색. 무(無)도, 그렇다고 유(有)도 아닌 딱 그런 색이었다.
" 정국. "
" 네, 아가씨. "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줄만 알았던 입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콤하면서도 고고한 온기를 터뜨렸다. 그는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블랙홀의 만유인력에 붙잡혀 헤어나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당겨지고 있었다.
" 달빛은 진실 만을 비춘다는 말 알아요? "
뒤이어 던져진 그녀의 질문은 머릿속을 물음표로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다. 예상치도 못한 것은 물론, 들어 본 적도 없는 낯선 문장에 그는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다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덧붙여지는 말들의 계기가 된 것은 확실했다.
" 다른 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이 문장은 정확하게 기억나요.
누구한테서 들은 말인지, 어떤 책에서 읽은 글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맴돌아요. "
" ..... "
" 저는 지금까지 이 말이 그냥 동화나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여담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달빛에 서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그녀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그녀의 두 눈동자가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달빛이 말해주었다. 절벽 끝, 바람만 불어도 떨어질 것만 같이 위태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그는 홀린 듯이 절로 손을 올렸다. 너무 힘들어 보여서, 괴로워 보여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아서. 곧장이라도 버팀목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손은 계속해서 그녀를 향했다.
그리고,
" ... 저 좀 꺼내주세요. "
아슬하게 일렁이던 눈물이 떨어짐과 동시에, 결국 품어서는 안 될 꽃을 품에 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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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이른? 시간이라 많이 안 계시겠지만
새벽이라 감수성을 주제로 끄적여 본 글입니다!
제대로 써 보는 빙의글은 처음이라 많이 허술하지만
그냥 이런 글도 있구나, 하고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뒷 내용을 구상해서 장편으로 연재할 지, 그냥 단편으로 끝 낼 지는
반응과 제 의지에 따라...
그럼 모두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