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목요일에 있던 수능시험을 치르고 나서 목적없이 방황하기를 몇일째 반복하다가, 몇몇 친구놈들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기에 나도 그냥 얼떨결에 알아보기로 했고, 재미있게도 친구들보다 더 빨리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면 꼭 해보고 싶은 편의점 알바자리. 새벽타임을 맡게 되었다. 어차피 낮에 할 일도 없고 시급도 세니까 그냥 당장 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제가 첫 날이었다. 점장님이 이것저것 할 일을 모두 알려주셨고, 계산 하는 법, 정리하는 순서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려주셨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외워야 할 것이라며 종이를 한장 주시고 가셨다. 수능이 끝나고 공부를 하도 안해서 바보머리가 되었는데 외우는 거라니. 본능적으로 몸이 거부했지만 조심스레 종이를 펼쳤다.
음.. 바로 그것. 담배 위치였다. 꽤 예전부터 써오던 종이인지 위치가 바뀔때 마다 수정테이프로 지워진 자국이 있었다. 점장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새벽이라 손님들도 얼마 없고 혼자 여유롭게 노래를 들으면서 위치를 외우고, 3시 쯤 새 물건들이 들어와서 받아두고 정리하고 청소하고 허기진 김에 컵라면 하나 사먹고 핸드폰으로 영화 다운받아 보고 천국이 따로 없었다. 물론 자세가 불편해서 조금은 뻐근했지만 이만하면 정말 최고인 것 같다. 어떻게 시간은 또 갔는지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곧 교대할 시간이 다가왔다. 명쾌한 종소리를 들려주며 다가오는 다음 파트 알바생 형. 팅팅 부었지만 이쁜 웃음으로 나에게 인사한다. 첫 알바 어땠냐며 간단하게 묻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나가고, 그 사이에 다시 한 번 더, 종소리가 울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말끔한 정장차림에 어울리는 깔끔한 외모. 솔직히 내가 여자라면 호감을 충분히 살 만한 인물이었다. 음료수 냉장고에 가서 무엇인가를 하나 집어들고 내 쪽, 아니 정확히는 카운터 앞에 서서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레종 맨솔 한갑 주세요."
아.. 계산이 아니었다. 솔직히 누가봐도 청소년은 아니었는데 지갑을 열면서 민증을 보여준다. 대충 눈으로 슬쩍 보고 뒤를 돌아 레종 맨솔을 찾는다. 레종...레종..레... 외운걸 실전에 쓰려니 잘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휙- 휙- 가르키며 찾고 있는데
"손에서 두시방향 위로-"
느긋한 목소리로 위치를 알려주는데 정말 감사했다. 아니, 사실 조금 창피했다. 이래뵈도 암기력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내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아.. 오늘 처음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내 말이 흐리멍텅하게 끝나자 비웃는 건지, 아니면살짝 그냥 웃은건지 르겠지만 내게 딱 한마디를 하고 사라졌다.
"이젠 안까먹겠다.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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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독방에 조각글처럼 남기려했는데 에피소드식으로 글잡에 잠깐잠깐 남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