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남편
삐빅, 탁.
주말인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과, 금세 깨어난 태형이 알람을 끄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품에 안겨있는 여주를 깨우려는데 꼭 감긴 눈 밑으로 속눈썹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태형이 팔베개를 내어 준 반대 쪽 손으로 속눈썹을 살짝 떼어냈다.
"..."
그리고 나서 다시 여주를 바라보는데 잠투정을 부리며 태형의 품을 더 파고든다. 태형은 순간 가슴 부근이 저릿한 느낌에 몸이 굳었다. 깨워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태형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여주는 그저 태평하게 새근새근 숨을 내쉰다.
더 가까이 안겨 온 여주 덕에 태형의 시선에는 여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안겨 자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니. 자신도 모르게 여주의 머리를 손으로 살살 쓰다듬던 태형은 외부 모임이 있을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하게 꾸몄던 여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매일 아침마다 자신에게 보여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에 조금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
"..."
여주는 자신의 머리에 닿는 온기에 천천히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평소보다 가까운 태형의 가슴팍에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여주도 태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태형도 여주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토닥이듯 여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일어나."
다행이 잠시 뒤, 태형이 평소처럼 여주를 깨웠고 자연스레 반대쪽으로 뒹굴어 태형에게서 등을 돌렸다. 곧 태형이 일어나는 소리와 뭔가를 줍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자는 척을 멈추고 몸을 일으키는 여주다. 손에 뭔가가 닿아 쳐다보니 자신이 매일 안고 잠드는 인형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자신의 무드등 옆쪽에 놓여있어야 할 인형이, 태형과 여주의 사이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인형을 꼭 쥔 여주가 아까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여주를 깨우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던 태형과 의외의 자리에 있는 인형. 묘하게 이상한 것들이 많은 아침이었다.
오물오물.
숟가락으로 밥을 한껏 입 안으로 넣은 여주가 열심히 입을 움직인다. 남준과의 첫 미팅 후, 여주는 다짐한 것이 있었다.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일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남준이 해 준 말들은 여주가 충분히 생각 할 시간을 가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시작하며 조금씩 무엇인가가 나아지고 있었다. 아직 크게 변화된 건 아니지만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이 줄었고, 좀 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배워나가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전보다 관심이 가는 것들이 많아졌고, 기쁨과 여유로움이라는 것도 정말 오랜만에 느낀 여주다. 그 덕분인지 어제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던 글을 세 줄이나 써냈다. 여주에게는 아주 감격스러운 일이었으므로, 밥 맛까지 좋아졌다. 식탁에 앉아 야무지게 밥을 먹는 여주에게 깔끔한 옷차림의 태형이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
"먹을래?"
여주는 제대로 딱 마주친 눈을 무시하기가 좀 난감해서 가볍게 물었다. 당연히 태형은 싫다고 할테니. 그러나 여주는 식탁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태형에 당황했다. 이럴 애가 아닌데. 태형은 말없이 주방으로 걸어와 밥을 덜곤 여주의 맞은 편에 앉았다.
"..너 아침 안 먹지 않아?"
"아예 고칠 생각이 없나봐?"
"뭐?"
"나한테 안겨서 자는 거."
여주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훅 하고 들어오는 태형의 공격에 잠시 말을 잃었다. 여태 아무 말 없던 태형이 이러는 게 여주는 황당했다. 게다가 아까는 진짜 남편처럼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으면서. 정작 당사자인 태형은 태연히 젓가락질을 하며 밥을 먹는다.
"아니..갑자기?"
"니가 알아서 고칠 줄 알았지. 뭐든 혼자서 잘 하잖아, 너."
"..."
여주는 방금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기분이 태형의 말 몇 마디에 착 가라앉았다. 한 침대를 쓰면서 짧은 말이라도 대화가 늘어나니 좋은 관계까진 아니라도 보통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여주는 태형의 태도가 어이없었다. 사실 태형은 심술을 부리는 중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음기 하나 없이 우울하더니, 남자로 추정되는 출판사 직원을 만나고 나서는 뭔가 밝아진 분위기를 풍기는 여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뭐?"
"너는 나한테 사과 할 생각 없어?"
여주의 말에 이번엔 태형의 표정이 딱딱해진다. 순식간에 얼어버린 분위기 속에서, 여주와 태형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신경전을 이어나갔다. 한동안 이어지다, 태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주도 눈이 시릴만큼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말없이 핸드폰과 지갑을 챙긴 태형이 집 밖으로 나간다.
과거의 일을 들추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순간의 욱 하는 마음과, 언젠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에 말을 꺼낸 여주다. 금세 비어버린 맞은 편의 의자를 멍하게 쳐다보던 여주는 다시 찾아올 것만 같은 우울감에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 방금 태형에게서, 그 때의 시린 눈빛을 봤던 여주다.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상처가 덧나는 듯 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아..죄송해요."
오랜만에 남준과 미팅을 하는 날이었다. 밝은 낮 시간에 조용한 카페에서 여주와 마주보고 앉은 남준은, 오늘따라 어두운 여주의 표정에 걱정스럽게 물었다. 여주는 자꾸만 떠오르는 옛날 생각에 좀처럼 남준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 사과하는 여주에게 남준은 괜찮다며 싱긋 웃어보인다.
"기분이 어떻게 맨날 괜찮아요. 기쁜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는거죠."
"..."
"날씨도 매일 다르잖아요. 그렇죠?"
여주는 남준의 말들이 고마웠고, 남준에게 미안했다. 남준의 입장에서는 작가에게 새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얻어가는 일이 목적인데, 저번에 이어서 이번 미팅에서도 힘들 것 같아 보여서. 여주는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하지만 남준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주에게 부담이 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 그리고 어제 메일로 보내주신 거 읽어봤는데 느낌이 전이랑 조금 다른 것 같았어요."
"어떤 느낌이요?"
"작가님이 전보다 주인공에 더 공감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분량은 얼마 안 되지만."
"아.."
여주는 남준의 말에 작게 탄성을 뱉었다. 남준의 말이 맞았다. 여주는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속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었다. 우울증이 있는 주인공이 어떤 사건들로 인해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이 주요 내용이었는데, 사실 그것은 여주가 이뤄내고 싶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무의식 속의 욕구였다. 혼자 잠시 생각에 빠진 여주에 남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개인적인 안 좋은 일 있으신 건 아닌지.."
"..아."
"걱정돼서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여주는 남준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쓸데없이 자신에게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반쯤은 멍한 상태로 남준과의 미팅을 끝냈다. 이번에도 데려다 주겠다는 남준의 제안을 거절하고 여주는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기억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도망치듯 집에서 나온 태형은 차 키를 놓고 온 것을 깨닫곤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들어 여주에게 자꾸만 피어오르는 알쏭달쏭한 감정들에 대해 정리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는데 또 다시 큰 트러블을 만들어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나간 독한 말과 눈빛에 여주가 상처받는 게 그대로 보였지만 미안하다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다 알 수 있는 여주의 감정이었는데 몇 년 전에는 왜 전혀 알아채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부탁 하나만 하자.'
'무슨 부탁?'
'담배 냄새 풍기지말자, 제발. 나 진짜 싫어해.'
결혼생활이 막 시작되었던 때, 지금보다는 훨씬 관계가 좋았을 때. 여주가 태형에게 부탁한 것은 담배냄새를 집 안에 풍기지 않는 것이었다. 태형은 그 말에 담배를 절반까지 줄여 거의 끊다싶이 했었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 앞 벤치에 털썩 앉은 태형의 손에는 새 담배 한 곽이 쥐어져 있었다.
"..."
하얗고 긴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였다. 라이터의 불을 켜는 탁탁 소리가 참 오랜만이었다. 깊게 들이마신 연기에 태형은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복잡한 생각이 한껏 얽혀 까맣게 변해버린 태형의 마음과는 반대로, 뽀얀 연기가 태형의 주위를 맴돌다 사라졌다. 마치 순간의 도피는 계속될 수 없다는 듯이.
"..."
거의 반을 다 태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태형은 집으로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주는 외출을 한 것 같았다. 목이 메여와 몇 번 기침을 하니 담배 냄새가 풍겼다. 몸을 돌려 옆으로 누우니 여주의 인형이 보였다. 곧 천천히 눈을 감은 태형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띠리릭, 탁.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에 태형이 천천히 눈을 떴다. 곧장 거실의 욕실이 열리는 소리에 자연스레 여주가 귀가한 것을 안 태형이 몸을 일으켰다. 뭐라도 대화를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욕실 문을 열고 나온 여주의 눈가가 빨갛다. 태형이 말없이 지나치려는 여주의 손목을 잡는다.
"김여주."
"..."
"울었어?"
"..."
"왜 울.. 아니, 너 잘 안 울잖아."
태형은 혼란스러웠다. 여주를 처음 봤던 12년 전에도, 결혼생활을 시작한 2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여주가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태형에게는 그야말로 너무나 생소한 상황이었다. 머릿 속의 수많은 물음표들을 다 꺼내지 못하고 당황스러움만을 표현하는 태형을, 여주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
더 큰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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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는 아마.. 과거 이야기..?
여러분
둘이 화해하려면 아직..
2년이라는 시간이 짧진 않으니까요 ㅎㅎ
그래도 과거 이야기 다 나오면 좀 더 흥미진진해질거에요!
항상 고마워요 독자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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