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에게 된통 깨진 후 회사 근처 술집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제 몸도 가누질 못해 하이힐을 손에 잡고 맨발로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걸어 집까지 왔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자동센서 조명이 들어왔다. 너무 힘들어 입구에 주저앉아 가만히 있었다. 몇분 지나지 않아 금방 꺼지는 조명을 손을 흔들어 다시 켜고 기다싶이 소파에 앉았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무거운 몸을 옆으로 뉘였다. 리모컨이 있었는지 티비가 요란스레 켜지는 소리가 났다. 캄캄한 거실에 비해 티비 속엔 눈부신 조명아래 춤추고 노래하는 빛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부드럽지만 강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고 그의 춤사위가 눈에 비추었다. 아, 첫눈에 반한다는 거란 이런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나도 스르르 잠에 들었다.
어김없이 출근준비를 하고 있었다. 치마에 셔츠를 입고 화장도 하고 그러다 문득 티비에서 봤던 그 남자가 생각이 났다. 평소 가수든 배우든 관심이 없던 터라 그의 이름을 알아내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알고보니 그는 데뷔3년차의 가수였다. 그가 너무 보고싶어서 한마디라도 하고 싶어서 그를 만나기위해 팬싸인회라는 것을 응모했다. 운 좋게도 뽑혀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풋풋한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오빠 멋있어요' '사랑해요오빠!' 라며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해보였다. 나는 내 순서가 다가오자 어찌할주를 몰랐다. 그냥 한번 실제로 보고싶어서 온건데 무슨 말을 해야할까 하고 고민했지만 내 발이 한걸음씩 옮겨질때마다 떨리는 마음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다음 분 오세요."
스탭이 나를 불렀다. 그의 앞에 섰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가만히 굳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내가 들고있던 앨범을 가져갔다. 그리고 환히 웃으며 내게 물었다.
"이름이 뭐에요?"
나에게 말을 걸자 갑자기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그의 앞에서 울지않으려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는 아무말 없이 펜을 집었다. 싸인이 끝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그였다. 용기를 냈다.
"좋아해요..."
그동안 말하고 싶었던 말이 나오자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도 내가 왜이러는지 이해가 안됬다. 그냥 내 마음을 말한 것 뿐인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몰랐다. 그가 내 말에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나를 보았다.
"고마워요. 좋아해줘서."
그 때 일은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그가 내게 고맙다고 한게 진심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눈을 마주쳤다는게 정말...
여느때와 같이 다들 상사의 눈치를 보며 일을 하고 있었다. 선배들이 오늘 회의실에서 미팅이 있다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무슨 미팅인지 여자선배들이 화장을 고쳐대고 옷 매무새를 다듬는 등 평소 잘 보일 사람이 없다며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 나는 팀장님에게 영업부에 전할 서류를 잔뜩 받고 간신이 시야를 확보하며 마케팅부 사무실을 나섰다. 영업부 김팀장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비타민음료를 받고 우리 부서로 향했다. 비타민음료를 보니 그의 얼굴이 떡하니 프린트되어있었다. 그 일 이후로 일에 집중을 못하다가 팀장에게 또 엄청나게 깨져 간신히 마음을 다 잡았었는데 또 그때처럼 마음이 아려왔다. 이상하게도 마케팅부 앞에 여사원들이 바글바글했다. 바로 앞부서인 기획부여사원들은 다 온것같았다. 마침 기획부 팀장이 나와 여사원들을 불러 우리 부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팅실 앞에는 우리부서 여사원들이 바글바글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옆자리인 박찬열사원에게 물으니 그가 왔다고 했다.
"레..레이가 왔다구요?"
"이번에 새로 우리회사 모델하기로 했나봐요. 게다가 우리 팀장님 학교 후배라는데요?그래서 얼굴도 비출겸 왔데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 있던 머그컵을 깨뜨린 나는 허겁지겁 깨진 조각들을 손으로 집어 화장실로 향했다. 그가 너무 보고싶었다. 한번만 더.. 딱 한번만 더..
하지만 또 그를 보고 부끄럽게 울게될까봐 미팅실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쓰레기통에 조각들을 버린 뒤 손을 씻었다. 세면대로 흐르는 물이 붉은 색이었다. 손가락을 베여 물이 닿는 상처가 따끔거렸다. 휴지로 대충 감고 화장실을 나왔다. 피가 더이상 나오지 않게 다시한번 휴지를 감았다. 정신없이 가다보니 발 밑이 느낌이 이상했다. 까만 구두를 밟아버렸다.
"어떡해,죄송합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였다. 안절부절 어떻게 할줄을 몰랐다. 그가 날 기억할까?하는 생각과 동시에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지나치려는 나의 앞을 막고 서서 내게 말했다.
"그때 그분...맞죠? 그 후로 계속 생각나서...너무 신경쓰였어요. 왜 우신거에요?"
"그..그게... 그..."
또 창피한 모습을 보였다. 쥐구멍에라도 숨고싶은 기분이었다. 죄인처럼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뒤에서 그를 부르는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려다준다니까 먼저나가면 안되지~"
들어본 적 없는 팀장님의 온화한 목소리였다. 정말 그와 친한것 같았다. 팀장님이 그의 옆에 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어?여기서 뭐해요?"
"아,잠깐 화장실에 갔어요. 지금 들어가려구요 팀장님."
"그래.가봐요."
"잠깐만요!"
그가 내 팔을 붙잡았다. 팀장님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어색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형,이 분 나랑 이야기할게있어서 잠시만 자리 비워도 되지?"
"어..어?"
"금방 보낼게 형."
회사안에 있는 카페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나는 계속 휴지를 감은 손만 만지작거렸다. 진동벨이 울리자 그가 커피와 함께 밴드를 가져다 주었다.
"이거 발라요. 이것도 마시구요. 얘기해줘요 왜 그랬는지.."
"그..그냥..팬이라서 그런거에요. 처음 봐서..하하.."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웃지 않았지만, 이 상황이 참 창피했다.
"내 앞에서 그렇게 운 사람은 처음이에요. 너무 신경쓰여요. 그냥 진심을 말해줘요."
그의 간절한 눈빛에 그냥 구구절절 다 이야기를 했다. 내가 처음 그를 보고 느꼈던 것들 그날 그를 보고 느꼈던 것들 전부 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을까봐 무서워서 그랬어요. 나는 정말로 좋아하는데 그냥 흘려들을까봐. 그냥 하는 말인 줄 알까봐 무서웠어요. 내 마음을..내가 용기내서 전한 내마음을 무시할까봐...아무렇지 않게 대할까봐 무서워서..그래서 그랬어요...그래서..울었어요...
정말 좋아해요.."
그녀가 좋아해요 라는 말을 웅얼거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티비에는 그의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그녀가 레이를 좋아하는건 명백한사실이지만, 레이를 만난 모든 상황은 꿈이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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