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한) 연하 박지훈이 보고싶어서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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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팔목을 쥐고 날 바라보던 박지훈은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내 팔목을 놔주고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잡혔던 팔목을 어루만졌다. 약간 얼얼했다.
"가요, 선배."
녀석은 먼저 앞서서 카페를 나갔고, 나도 이내 녀석을 따라나갔다.
이 짧은 시간 내에도 내가 박지훈에게 휘둘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선배, 어디 살아요?"
"나 학교 앞에. 여기서 가까워. 안 데려다 줘도.."
"데려다 줄게요."
내 말을 자연스럽게 끊어낸 박지훈은 학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도 마지못해 녀석을 발걸음을 맞춰 따라 걸었다.
어색하다. 할 말이 없어.
인적이 드문 곳이다 보니 더 정적이 맴돌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집이 가까워서 다행이지.
먼 곳이기라도 했으면 벌써 숨이 막혀 저 세상 갔을거다.
"나 다 왔어. 여기까지만 데려다줘도 돼."
"..알았어요. 조심히 가요."
"..응, 너도 조심히 가."
"네. ..아 선배."
"응?"
"야간 아르바이트는 하지 마세요. 위험하잖아요."
그대로 멈춰서 박지훈을 바라봤다.
당황스러워하는 날 보고 박지훈은 씨익 웃으며,
"혜지 선배한테 들었거든요."
"아.."
"그럼 갈게요."
박지훈은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렇게 멀어져갔다.
나는 이게 박지훈과 나의 마지막 대화였으면 하고 바랐다.
*
그 이후로 나는 뭐라도 맞은것마냥 하루종일 박지훈 생각에 시달렸다.
그냥 그 애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뭐로 새겨놓은 것 마냥.
과방 쪽을 지날 때면 그 애랑 마주치지는 않을까 긴장하기 일쑤였고,
그러면서도 혜지가 과방에 갈 때 은근히 따라 나서는 나 자신을 보면서 괴리감을 느꼈다.
"수민이는 1학년때 보다 더 자주 과방에 오는 거 같다야."
"하핳.. 그러게요.."
별로 친하지 않은 남자선배의 농담에 멋쩍게 웃었다.
나도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마음속 한켠의 검은 속내가 박지훈과 마주치고 싶다고 욕망이라도 뿜어내는 것인가.
미쳤지, 내가.
하지만 내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노력에 찬물이라도 끼얹듯, 박지훈은 한 번도 나와 마주치지 않았다.
다른 신입생들은 지겨울 정도로 마주치는데, 박지훈만큼은 절대 마주치지 못했다.
이제 이 짓도 그만해야지. 내 자신이 꼴보기 싫었다.
"혜지야, 나 먼저 갈게."
"가게? 알써 내일 봐~"
혜지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과방을 나서려 문을 여는데,
과방에 들어오려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비누향 같은게 훅 끼쳐왔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는 게 기대될 정도로.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오우 깜짝아. 수민 선배구나."
"아, 안녕."
"안녕하세요."
예상대로 나와 부딪힌 사람은 박지훈이었다.
박지훈에게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들었다. 이런거 하나하나에 신경쓰고 있다니.
박지훈은 나와 인사를 주고받고는 그대로 과방으로 들어갔다.
서운할 일도 아니지만, 뭔가 허탈해져 나도 그대로 문을 닫고 과방을 나갔다.
왜 맨날 난 쓸데없는 걸 기대하고 있는 거지. 미친 게 틀림없다.
정신차려야지, 김수민.
달칵-
"아, 선배."
정신차리자고 다짐한 그 순간, 바로 뒤에서 다시 박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로 뒤를 돌아 그를 쳐다봤다.
"응?"
"밥 사주세요."
저 말을 하고는 히히 하고 웃어보이는 박지훈의 얼굴은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스무살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뭐에 홀린듯,
"..그래."
***
"뭐 먹고 싶어?"
"음.."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박지훈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게 그렇게 심하게 고민할 일인가. 약간 귀여워보여 그 애를 보며 살짝 웃었다.
"어, 선배 웃는 거 처음 본다."
"헉, 그래..?"
"응 처음 봐요. 아 선배, 그럼 저 쌀국수 사주세요. 저기 저 집."
박지훈이 가리키는 식당은, 우연일지 몰라도 내가 가장 자주 가는 좋아하는 식당이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여기가 제일 맛있더라구요. 싸고."
"나도. 여기 제일 자주와."
하긴, 뭐 음식점 취향쯤은 일치할 수도 있겠지.
내 맞은편에 앉아 수저를 세팅하는 박지훈을 바라보다가 또 문득 카페 일이 떠올랐다.
박지훈은 그 카페는 어떻게 안 걸까.
"아, 근데 너 그때 그 카페.."
"아, 카페요? 어떻게 알았냐구?"
"..응. 아는 사람 잘 없는데.."
박지훈은 턱을 괸 채로 나를 바라보더니 또 특유의 웃음을 짓는다.
"그냥 가다가 찾았는데요."
너무나도 단순한 대답.
절대 그냥 가다가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싶어서 그냥 넘겼다.
박지훈과의 식사자리는 예전처럼 그렇게 마냥 불편하지는 않았다.
거의 박지훈이 얘기를 주도해나가는 편이기도 했지만, 확실히 나도 이제 녀석이 편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보면 볼수록 그렇게 나쁜 녀석 같지도 않고..
조금은 가까워져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
"11000원 입니다."
후배한테 밥 사주는 건 거의 박지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카드를 꺼내서 종업원에게 건네주려는데,
갑자기 내 손을 막는 다른 손.
"농담이에요 선배. 제가 살게요."
내가 놀라서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박지훈은 종업원에게 자기 카드를 건넸고,
정신을 차린 다음엔 이미 계산이 다 끝난 후였다.
식당을 나온 나는 어이가 없어 박지훈을 다그쳤다.
"..뭐하는 거야? 밥 사달라ㅁ.."
"농담이라니까요."
"..."
"선배 돈 없잖아요."
순간 뭔가 머리를 한대 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박지훈의 표정은 그저 무표정이었다.
이번에 박지훈의 밥을 사 주면 몇일 동안은 제대로 된 끼니를 때울 수 없었던 내 사정을 훤히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듯한 그런 표정.
나는 고개를 떨궜다. 잠시나마 녀석을 좋은 애라고 판단했던 내가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누구 놀리는거야?"
"..놀리는 거 아니에요."
"맞잖아.. 어디서 들은 건진 모르겠지만, 너 진짜 그러면 안됐어."
"..."
박지훈을 한번 노려보고는 그대로 녀석을 앞질러 걸어갔다.
박지훈은 날 쫓아오지 않았다.
*
그 이후로 나는 박지훈을 다시 피해다녔다.
사실 피해다닐 것도 없지. 원래 내가 생활하던 대로만 돌아가면 녀석을 마주칠 일은 없었다.
녀석과 나는 정반대의 유형이니까. 겹칠 경로도 없었다.
녀석을 떠올리기만 하면 기분이 나빠졌다. 짜증이 밀려왔다.
언제나 모든걸 다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그 눈빛이 싫었다.
날 쥐고 흔드는 듯한 행동, 말투 다 짜증났다.
그런 녀석에게 잠시라도 흔들렸던 내 자신이 제일 열받았다.
혜지는 요즘 내가 기운이 없어 보인다며 술을 사주겠다고 했다.
사실 술을 즐겨먹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같은 날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알겠다고 했다.
둘이서 자주 갔던 포장마차에서 만나기로 하고, 먼저 가 혜지를 기다렸다.
"어서오세요."
혜지가 올 때가 됐다 싶어 들어오는 손님을 쳐다보는데,
내 표정은 순간 굳었다. 박지훈이 들어오고 있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녀석의 시야에 내가 들어오지 않게 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맞아 떨어지는지 녀석의 발걸음이 내 쪽으로 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쉰 녀석이 내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너 자리 아니야."
"맞아요. 혜지 선배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에요?"
"..."
"오늘 선배 만난다길래 나도 좀 끼워달라 했어요. 미안해요."
"...너 볼 기분 아니야."
"아는데, 할 말 있어서요."
박지훈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그 표정을 보니 또 녀석을 마냥 내칠 수 만은 없는 나였다.
그제서야 박지훈과 눈을 맞췄다.
"미안해요. 그 때 그러려고 그런게 아니라.."
"둘 다 와있었네!!!"
박지훈이 무언갈 얘기하려던 참에, 혜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흔들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혜지를 보며 박지훈은 작게 '나중에 얘기해요' 라고 속삭였다.
"글쎄, 김수민 얘가 요즘 뭐 초상이라도 난거처럼 학교 다닌다니까? 안쓰러워서 볼 수가 있어야지."
"..."
"얘가 조용하기는 해도 우울한 애는 아닌데, 걱정됐다니까. 야, 요즘 무슨 일 있냐?"
혜지가 오자마자 분위기가 풀어졌다.
혜지의 걱정에 나는 아무일도 없다고 대충 답하고는 힐긋 박지훈 쪽을 봤다.
턱을 괴고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박지훈에 사레가 들렸다.
"켁..켁..!!"
"괜찮아요?"
박지훈은 빠르게 내게 물을 따라 건네줬다.
박지훈이 건넨 물을 마시고는 쪽팔림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누가봐도 지금 나 박지훈 의식하고 있어요. 이 상태였다, 나는.
"그래서, 지훈이는 요새 연애 잘하고 있고?"
"..아, 헤어졌어요."
"..."
박지훈의 말에 물을 마시다 말고 녀석을 힐긋 올려다봤다.
녀석은 그저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술을 들이켰다.
"뭐?! 언제?!"
"저번 달에요."
"헐, 꿈에도 몰랐다 야."
박지훈이 여자친구과 헤어지든 말든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란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왜인지 자꾸만 더 듣고 싶어졌다.
왜? 질려서? 아님 다른 사람이 생긴건가?
온갖 물음을 쏟아내는 내 마음의 소리들이 비참해졌다.
*
"혜지선배 집 알아요?"
"응, 근데 멀어서..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재워야할 거 같애."
"알았어요."
술버릇이 잠자기인 혜지는 벌써 벽에 기대서 쿨쿨 자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다 둘만 되버린 분위기에 나는 다시 긴장하고 있었다.
박지훈은 술을 한 모금 더 들이키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말은요."
"..."
"선배랑 같이 밥 먹고 싶었는데, 핑계가 없어서 밥 사달라고 한거에요."
"...뭐?"
"근데 선배한테 얻어먹기는 또 싫었어요. 그래서 내가 산거에요."
"..."
"그 때 한 말은 미안해요. 그건 나 미워해도 돼요."
살짝 풀린 눈으로 말하는 박지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무슨 뜻일까. 지금은 정신이 알딸딸해서 잘 이해 못하겠다.
나와 밥을 먹고 싶었다는 건 뭐고.. 나한테 얻어먹기 싫었다는 건 뭐지?
안그래도 띵한데 머리가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 미워할거에요?"
박지훈이 날 똑바로 쳐다봤다.
술 때문인지 그런 박지훈 때문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녀석의 한 마디에 내 기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술김이라서 확실하진 않지만,
나는 박지훈에게 끌리고 있다.
그걸 인정한 순간 나는 고개를 들어 박지훈을 쳐다봤고,
박지훈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