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있을 때 잘 하지 그랬어? Ver.3〈/em>
서로 다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웃고 떠들면서 즐거워한다.
운동장에는 각종 음식점과 놀이들이 즐비하게 나란히 서 있었고, 학생들은 그 사이를 조오힝무진 누비며 분위기에 한껏 취해 들떠있었다. 운동장의 입구, 정문에 커다란 현수막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 제 48회 수만 예술고등학교 축제'
여기는, 수만 예고의 축제 현장이다.
A. 동아리 VS 동아리
웅성웅성.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놓여진 의자에 앉아 저마다 서로 다른 기대감에 부풀어있다. 수만예고는 이름답게 학교도 일류, 학생들도 물론 일류로 유명한 고등학교였다. 입시생을 뽑는 기준들이 까탈스러운 만큼 전국 각지에서 내노라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예고 지망생들은 무조건 지망 학교의 1순위가 수만고라면 말 다 할 정도가 아니겠는가. 이에 맞게 수만고는 학생들의 개성을 더욱 잘 부각시킬 수 있는 활동에 아낌없이 투자를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들에는 동아리 활동이 있다. 수만고의 동아리라면 어느 동아리이던 빠짐있거나 모자란 동아리는 없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동아리를 꼽으라면 첫번째로는 댄스 동아리를 꼽을 수 있다. 이 동아리는 무용뿐만이 아니라 힙합, 재즈댄스 등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학생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춤 좀 춘다 하는 학생들은 지망 동아리 1순위로 댄스 동아리를 꼽는다. 그리고 그 못지 않게 유명한 두번째 동아리는 바로 영화 동아리이다. 일반 타 학교의 영화 동아리와 비교하는 건 이 동아리의 활동과 수상실적, 그리고 작품들을 보면 미안할 정도이다. 학교에서 가장 아낌없이 지원을 해 주는 동아리 답게 만들어 내는 영화도 수준급, 배우들도 수준급, 시나리오도 수준급의 영화다. 특별히 작곡 동아리와 보컬 동아리. 이 두 동아리와 연계해서 영화의 삽입곡과 OST를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세번째 동아리는 뮤지컬 동아리이다. 사실 세 동아리 중 가장 까탈스러운 동아리라고 할 수 있는 뮤지컬 동아리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수준급의 노래실력과 댄스실력, 그리고 연기력까지 필요하기 때문에 오디션을 자주 열어도 뽑히는 학생들의 수는 극히 적다. 까탈스러운 조건이 걸리는 만큼 뮤지컬 동아리도 역시 수준급의 뮤지컬을 만들어 내는데, 이번에 재미있는 소문이 하나 들려왔다.
댄스 동아리에서 나온 여학생이 영화 동아리와 뮤지컬 동아리의 합작인 뮤지컬 영화의 주인공으로 뽑혔다, 라는 재미난 이야기가.
- 야, 저 선배 오늘도 저런다.
- 와, 진짜 독하다 쟤도. 저 정도로 부탁하면 해 주는게 맞는거 아냐?
- 야, 그게 말이 쉽지. 댄스 동아리랑 뮤지컬 동아리랑 사이 안 좋은거 몰라?
- ....? 근데 왜 내 눈에는 그건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지? 쟨 그냥 귀찮은 것 같은데?
- 헐, 야. 저기 봐. 몇일 학교 안 나오더니 오늘 나왔나봐. 얘기 들었나본데?
저마다 몰려서 수군대던 학생들이 급히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은 매점의 안이 아닌 매점 밖에 있는 벤치였다. 이어폰을 끼고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빵을 먹고 있던 여학생과 그 옆에 나타난 한 남학생. 여학생은 그 남자가 나타나자 마자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고, 남학생은 여학생을 저지하며 여학생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학생은 무언가를 여학생에게 이야기 했고 여학생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또 다른 남학생 한 명이 다가갔다. 여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떴고, 남학생은 그 자리에 남아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새로 나타난 남학생이 서 있던 남학생을 부른 듯 남학생이 뒤를 돌았고,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났다. 숙적, 앙숙, 라이벌. 댄스 동아리의 부장과 뮤지컬 동아리의 기장. 두 사람이.
"김루한, 너 지금 뭐하냐?"
"어라, 이게 누구야. 얼굴 보기 힘들다는 오세훈님 아닌가? 나한테 볼 일 있어?"
뻔뻔한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는 루한의 얼굴을 보며 세훈이 속으로 욕을 곱씹었다. 저 능글맞은 얼굴과 말투, 자신과는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루한은 언제나 거슬리고 짜증났다.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투와 표정이 가식적이었다. 세훈이 욱하는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나 몇일 학교 안 나왔다고 되도 않는 짓거리 하고 다닌다며? 세훈의 질문에 루한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우리 여주 얘기 하는 거야? 세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리 여주?
"멍청한 너희 동아리에 들어가서 내가 항상 아쉬워했던 우리 여주가 댄스 동아리를 나왔어.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과연 이 상황에서 난 어떤 행동을 취하는게 맞는걸까?
1번. 그냥 내버려둔다. 2번. 당장 달려가서 낚아채온다. 네 생각에는 어때?"
멍청한 너희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머리회전이 좀 빨라서 말이지. 만장일치로 우리는 여주를 우리 영화에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기로 마음 먹었어. 이제 어차피 너희랑은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잖아? 루한의 말에 세훈의 입이 순간 꿀먹은 벙어리처럼 다물렸다. 따지고 보면 루한의 말이 맞았다. 저희 동아리 내부에서 일어난 내부분열로 인해 여주가 동아리에서 나가게되었고 부장인 저는 그걸 그냥 보고 있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루한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내 말이 맞지? 그러니까 비켜. 우리 여주 꼬시러 가야 하니까."
"김여주는 노래 못 해. 걘 항상 수행평가 최하점 이었어."
세훈의 말에 루한이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너희가 멍청하다는거야. 루한의 말에 세훈이 얼굴을 구겼다. 내가 고작 춤하나 잘 춘다고 저렇게 여주한테 목 맬 것 같아? 이 김루한이? 네가 모르는 거 하나 알려줄까? 김여주, 처음에 입학할 때 무용말고 노래로도 실기 봤어. 물론 이건 관계자 외에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쟤 매일 주말마다 학교에 나와서 음악실에 하루종일 쳐박혀서 노래만 부르는 애야. 이것도 몰랐지? 루한의 말에 세훈이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넌 일년 넘게 사귀었던 여자친구에 대해서 아는 게 뭐냐, 애송아.
네가 놓치고 만 애가 얼마나 대단한 애인지도 모르고, 지금 네가 만나는 애가 얼마나 영악한 애인지도 모르고.
두고봐. 곧 캐스팅 해서 축제날에 내가 쟤를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게 만들고 말테니까."
말을 마친 루한이 뒤돌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학교 안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퍽 즐거워 보였다. 뒤에 남은 세훈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김루한은 더 많은걸 알고 있었다. 저와 김여주가 지난 일년간 사귀었던 것 부터 김여주의 입학 실기 시험까지. 세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주가 나가고 난 후 여주의 빈자리에 선 것은 현재 제가 만나는 여학생이었으니까. 여주 본인도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 동아리를 나간 여주는 조금의 주눅듬도 없었다. 그저 무덤덤하게 학교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동아리 내부는 어수선했다. 정신적인 지주였던 여주가 나가고 나니 다들 의욕이 떨어진 얼굴을 하고는 했다. 몇몇 후배들은 다시 여주에게 돌아와 줄 수는 없냐고 물으러 갔다 거절을 당하고 온 듯 했다. 세훈 저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없었다.
영화가 끝나자 극장이 환호성으로 가득찼다. 선생님들과 어른들은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냈고,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었다. 영화는 성공적이었다. 보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게 학교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영화는 보는 내내 보고 듣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다. 특히 학생들은 주인공 여학생이 뮤지컬은 처음이라는 말에 감탄하며 놀라워했다.
- 영화의 주인공 두 분을 무대 위로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강당이 환호성과 박수로 가득찼다. 원피스를 입은 여주와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영화 속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두 사람이 무대에 서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여주 입니다. 안녕하세요, 김루한 입니다.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고 이것저것 영화에 관한 질문을 하던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하고 입을 열었다.
- 두 분께서 영화의 한 장면을 연기 해 주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즐겁게 즐겨주세요~
잠시간 무대 위의 조명이 켜지고, 아까 영화에 나왔던 노래의 전주가 흘러나오고 두 사람이 다정한 연인의 연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