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둘이 있던 교실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심장소리가 오래된 선풍기 소리를 뚫고선 이내 주위를 가득 채웠다. 선풍기 바람은 너로 인해 달아오른 열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그해 여름
고3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에게 박우진은 그저 뒷자리에서 항상 자고 있는 춤추는 아이 정도에 불과했다. 적어도 4월까지는 말 섞을 일이 없었으니까.
짝이 됐던 5월 첫날도 짧게 “안녕.” 하고는 다시 잠을 자던 너였다.
짝이 되면서 박우진과는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엔 낯을 가린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우리 사이에는 장난이 오가기도 했다. 아주 친한건 아니었지만 어색하거나 불편한 사이는 아니었다.
어느덧 6월. 여름이 다가왔다.
“ㅇㅇ야, 어제 쌤이 나눠주신 현충일 자습 신청서!”
아, 깜빡했다. 가방 구석에 꼬깃꼬깃 접혀있던 신청서를 꺼내 ‘참가’에 체크를 하고 반장에게 건넸다.
“애들 많이 신청했어? 나 집에선 공부 안 해서 학교 와야 되는데.”
“너 나오려고? 애들 아무도 신청 안 했는데. 그날 월요일이라서 토, 일, 월 연속으로 쉴 거라고.”
헐 나만 나와? 자고 있는 박우진을 깨워 신청서를 걷고 있던 반장의 말에 다시 불참으로 바꿀까 하는 생각이 수천 번 머리를 스쳤다. 아니지 공부... 공부해야지... 공부는 원래 혼자 하는 거니까..
애써 나 자신을 다독이려는 내 모습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옆에서 지켜보던 박우진의 입이 움직였다.
“내 신청서 좀 다시 주라.”
그리고는 볼펜으로 불참에 표시된 원을 끄적끄적 지우더니 참가에 더 큰 원을 그렸다.
“야 너는 왜 나오게? 공부 안 해도 되잖아. 춤 연습 안 가?”
“그냥 나오게.”
이상한 고집을 부린다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의 반장이 떠나고 나 역시 똑같은 질문으로 박우진을 괴롭혔다.
“너 진짜 오려고? 왜 오는 거야? 연습은?”
“연습 가기 싫어서. 와서 잘 거야.”
그래?- 같이 있을 사람이 생겼다는 생각에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박우진도 그대로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현충일 당일, 학교에 도착해 반 문을 여니 저 뒤에 엎드려 있는 동그란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혹여나 박우진이 깰까 싶어 의자를 조심스레 들었다가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비 올 듯 꿉꿉한 밖의 날씨와는 다른 선선한 선풍기 바람 때문일까 왠지 기분이 들떴다.
혼자 수능 특강 문제집을 끄적거리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문제집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단 잠에 빠져있었을까. 목이 뻐근해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엎드려서 말똥말똥 날 쳐다보던 박우진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야 너 언제 일어났어?”
“아-까.”
“그럼 깨워야지. 잠자는 걸 그냥 보고 있으면 어떡해.”
“그러게. 공부하러 왔는데 잠이나 자서 어떡해 너.”
반박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네. 그러게 나 어떡하지. 괜히 얄미워서 박우진에게 투정을 부렸다.
“너는 집에서 자면 되지. 왜 온 거야?”
“너 온대서.”
예상치 못한 박우진의 대답에 크게 당황한 나였다. 박우진의 말과 동시에 단둘이 있던 교실은 정적이 흐르고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너 혼자 온대서 온 건데.”
내 심장 소리가 오래된 선풍기 소리를 뚫고선 이내 주위를 가득 채웠다. 선선하게 느껴졌던 선풍기 바람은 박우진으로 인해 달아오른 열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ㅇㅇㅇ 당황했다ㅋㅋ. 얼른 공부 마저 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박우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잠을 청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잠든 박우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선풍기 바람이 주기적으로 박우진의 머리칼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박우진의 한 마디에 흔들렸다.
.
.
.
함께 먹은 점심은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오후 자습이 끝날 때까지도 내 정신은 가출한지 오래였다.
자습이 끝나고 나오자 우중충한 하늘과 떨어지는 빗방울이 우리를 반겼다.
“헐 박우진, 비 와.”
“무슨 비가 이렇게 갑자기 오냐. 난 이래서 여름보다 겨울이 좋더라.”
“겨울은 춥잖아.”
“여름은 덥잖아. 나는 겨울에도 반팔 입어. 찬 바람 맞는게 좋아서.”
“자랑이다.”
우리는 그렇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서있었다.
우진아, 나는 그 때 여름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함께 할 수 있어서.
그해 여름
그날 이후에도 박우진은 툭 던지는 말과 행동으로 나를 흔들어 놓았다. 공부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 책에 투박한 글씨로 ‘열심히 해.’라고 쓴다거나, 선선한 선풍기 바람 대신 틀어진 에어컨 바람에 내가 가디건을 입고도 오들오들 떨면 박우진은 자신의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놓은 하복 와이셔츠를 건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 애썼다.
6월부터 땅을 적시기 시작한 장마가 7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갑작스레 내 마음을 적셔버린 짝사랑에는 진전이 없었다.
우리가 짝이 된 지도 두 달이 지났고 그 사이 또 자리 바꿀 시기가 찾아왔다. 짝이 바뀌면 예전처럼 한 마디도 안 하던 사이가 되는건 아닌지, 새로 바뀐 박우진의 짝이 여자 애면 어떡하지 많은 걱정이 앞섰다.
반장이 들고 있는 상자에서 신중히 쪽지를 고르고선 박우진이 쪽지를 고르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제발 우진이랑 또 짝 되게 해주세요-.
“나는 32. 너는?”
박우진은 대답 대신 제 쪽지를 내보였다. 아 6... 다시 생각해봐도 또 짝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바랄 걸 바라야지.. 좀 전까지 속으로 기도를 하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 새로운 자리로 책상 옮겨!”
반장의 말에 모든 아이들이 분주해졌다. 나도 섭섭한 마음에 박우진을 쳐다보지 않은 채 무거운 책상을 끌기 위해 일어났다. 손은 책상을 끌면서 눈은 박우진을 쫓았다. 책상도 안 옮기고 누구한테 가는 걸까. 새로운 짝을 찾으러 가는 건가. 아 몰라. 새로운 자리에 도착해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얼마 후 내 책상이 다른 책상과 부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벙찐 나를 보고는 웃으며 자리에 앉아 엎드리는 박우진이었다.
박우진 너 6번이라며. 엎드린 박우진의 어깨를 흔들며 어찌 된 일이냐는 표정으로 박우진을 쳐다봤다. 박우진이 웃으면서 내보인 쪽지에는 6이 아닌 31이 적혀 있었다.
“바꿨어.”
우리는 다시 한 번 짝이 되었다. 그렇게 그해 여름 내 옆은 항상 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