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美
w. 리조트
"안녕히 가세요."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편의점엔 또다시 적막이 찾아든다. 학교 앞 인파가 많은 분수대에 위치한 편의점이라지만 생각보다 손님이 많지 않았다. 옆 건물 편의점과의 경쟁에 밀려 파리의 방문이 더 잦은 듯한 진열대를 정리한 뒤 폐기처리 삼각김밥을 뒤적였다. 전주비빔밥 없네.
구미가 당기지 않아 점심을 포기하고 계산대 의자에 대충 널브러졌다. 일 주일 동안 이렇게 거른 식사만 해도 족히 열 끼는 넘은 듯 했다.
"또 굶는다 또."
한 손엔 두꺼운 전공 책을, 다른 한 손에는 햄버거 봉지를 들고 남준이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봄 날씨에 알맞은 두께의 니트 아래로 딱 맞아 떨어지는 깔끔한 슬랙스는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그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켜주었다. 호석과 함께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남준은 2년동안 단 한번도 전교회장의 자리를 내어준 적이 없었고, 그의 기질은 대학교에 올라와서까지 빛을 발해 과대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호석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된 남준은 내가 드문드문 끼니를 거르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고선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햄버거를 사와 종종 한적한 편의점을 찾아오고는 했다. 정호석처럼 365일 붙어 다닌 정도는 아니었으나 학창시절을 함께한 남준은 나에 관한 것이라면 호석 못지않게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가 잘해주는 것이 단순히 전교 회장으로서 베푸는 사무적인 예의 때문이라 생각했었지만 호석과 함께했던 시간 속 남준은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기승을 부리던 대인기피증도 남준 덕분에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고, 현재는 그저 낯을 많이 가리는 정도까지 나아질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훌륭한 심리치료사인 듯 싶었다.
"배가 안 고파서."
"주면 먹을거면서."
"먹다 손님 들어오면 어쩌려고."
"여태껏 그런 적 있었냐?"
"...아니."
멀쩡한 생김새와는 달리 은근 허당끼가 다분한 남준이었다. 오늘도 강의실을 나오다 학생증을 또 잃어버렸다며 툴툴대는 목소리를 깔끔히 무시하고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꺼내 세팅을 했다. 향기로운 기름냄새가 오감을 자극한다.
야무지게 포장을 벗기고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어, 저거 전정국 아니야?"
"누구?"
익숙한 이름인데.
창 밖을 보며 아는 체를 하는 남준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버스킹을 하는 사람 몇몇이 분수대 앞에서 앰프의 볼륨을 조절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벤치에선 누군가 목을 푸는 듯 입을 연신 뻐끔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올해 새로 동아리에 입부한 정국이었다. 슬기 선배가 차기 회장 유력후보라 강력하게 어필하던 그 춤 잘 추던 정전국, 아니 전정국인가.
"너 쟤 어떻게 알아?"
"우리 작곡 동아리 이번에 보컬로 오디션 봤어. 아는 사이?"
"우리 동아리에도 들어왔길래. 그쪽 동아리 회장님의 눈에도 들었나보네. 노래 잘 하던?"
"음색 좋더라, 망설임 없이 뽑았지. 얼굴까지 반반한데 저 정도면 거의 아이돌 급이네."
준비를 마친 커다란 앰프에선 반주가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버스킹 위치가 편의점 바로 앞이라 의도치 않게 공연을 관람하게 된 셈이었다. 굳게 닫힌 유리 출입문이 무색할 정도로 정국의 맑은 노랫소리가 편의점 내부에 울려퍼졌다. 평소 즐겨 듣던 노래였다.
잔잔한 선율 위로 청아한 목소리가 겹쳐 원곡과는 또 다른 생경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봄과 어울리는 선곡에 정국의 앞에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 관객들이 하나 둘 씩 군집했다.
식사를 끝내고 빈 포장지를 남준이 버리는 사이에도 공연은 계속되었다. 어느새 군중 속 하나가 되어 본분을 잊은 채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다음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한다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남준이 넋을 놓고 있는 나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쯧, 혀를 차며 쿨하게 자리를 떴다.
"쟤 성격 아무도 모르더라. 신비로운 놈이던데. 암튼 나 간다."
평소 같으면 손이라도 흔들어 줬을 테지만 이미 온 신경이 정국 쪽으로 집중되어 있던 터라 그가 당긴 출입문의 종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정면을 응시하던 정국의 시선이 건물을 빠져나가는 남준에게 잠시 머물다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정확히 나를 보고 있는지조차구분이 잘 가지 않았지만 마지막 곡이 끝날 때 까지 그의 눈빛은 이쪽으로 시종일관 고정되어 있었다.
짧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흩어질 즈음이 되어서야 미적거리며 다시 계산대로 향했다. 늘 지루했던 가게를 홀로 지켰던 평소와 달리 뜻하지 않은 구경거리 덕분에 어느새 시계는 퇴근 3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이 지옥같은 무료함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심기일전하여 편의점 조끼를 벗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별안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오세..."
정국이었다.
"...요"
너무 티 나게 당황했나. 예상치 못한 얼굴에 놀랐으나 애써 관심없는 척 시선을 바닥으로 옮겼다.
음료수 코너로 말없이 발걸음을 옮긴 정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나나 우유 세 개를 양 손에 들고 와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
"...?"
"아."
하마터면 계산하는것조차 망각할 뻔 했다. 급히 정신줄을 부여잡고 바코드를 찍었다. 2+1 행사상품이라 바나나우유 두 개 가격만큼의 숫자가 화면 속을 채웠다.
얼굴 기억하려나. 아는 척 해야 하려나. 반말하면 이상하게 보겠지 등등. 영업 시간 손님을 대하기보단 온갖 쓸데없는 잡생각만이 머리 속에 들어찼다.
어색한 공기의 흐름 속에서 애써 굳어있는 입을 열려는 찰나 난데없이 바나나 우유 한 개를 눈앞에 들이민다.
"이거."
"...?"
"...."
"어...지금 2+1 행사중이라 하나는 그냥 가져가셔도 되는데...요"
"에?"
"네?"
의사소통에 입력오류라도 났는지 서로의 입에서 멍청한 탄사가 튀어나왔다.
작동을 정지한 로봇마냥 그렇게 한참을 둘다 굳어있다 먼저 정적을 깨뜨린 건 정국 쪽이었다.
"댄스 동아리 선배. 맞으시죠?얼굴 뵌 것 같아서요."
"아...아..네..맞아요."
"버스킹 하다가 눈이 마주쳤길래,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김여주라고 합니다.."
유례없는 극존칭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나나 우유를 손에 쥐어준다.
우유곽에 응결된 차가운 물방울이 손바닥을 적셨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럴게요."
긍정의 뜻을 표했으나 불편한 기색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서먹서먹하기가 한 여름의 폭염을 능가할 정도로 숨이 막혔다.
이따 봬요, 순식간에 사라진 빈 자리엔 정국의 향수냄새가 그의 흔적을 대신하여 편의점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그저 누군가의 향기라 생각하고 잊어버리기에는 정국에게서 맡았던 냄새가 평소 정호석이 쓰던 것과 같은 제품이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채 버려 심장 한 켠이 또다시 일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친절을 베푼 정국 때문인지, 머릿속을 잠식하여 떠날 생각 않던 호석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탁한 머리속을 비워내고자 정국이 주고 간 바나나우유를 뜯어 한 모금 들이켰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인위적인 바나나 향이 혀 곳곳을 툭툭 건들며 다녔다. 콜라로 식도의 기름기를 없애기엔 부족했는지 순식간에 벌컥벌컥 들이켜 한 곽을 비우고는 깔끔하게 쓰레기 통으로 골인시켰다.
한꺼번에 차가운 것을 들이켜 놀란 신경에 머리가 아파온 것은, 그 다음이었다.
연노랑 햇살을 머금은 바나나우유는 이상하게도 정국의 웃음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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