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가 싫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던 루한이 체념한듯 힘을 풀었다. 겨울이 끝난 이 시점에도 바람이 유난히 차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던 종인이 문득 돌아본 곳엔 여기저기 나무가 무너져 내린 작은 공터만 존재했다. 형이 모두를 지킨거야. 한없이 약해져 버린 그에게 해 줄 위로란 이 말 밖에 없었다. 결국엔 주저앉아 버린 루한의 모습에 종인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난 잘 모르겠어. 말을 흐리며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는 웃고 있었지만 울고 있었다.
*
“지상계에… 갔다 온 거야?”
텔레포트를 한 종인과 루한의 주변으로 회색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들이 사는 환계. 이곳은 아직 낮 이였으며, 언제나 봄이 였다. 잔잔한 호수 주변을 산책하던 태민이 둘을 발견하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분홍색 벚꽃이 잔잔히 부는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응. 가볍게 대답을 한 종인이 머리를 정돈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 일이 일어난 후 오랜만에 듣는 태민의 밝은 목소리에 루한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너무나도 지쳐보이는 모습에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태민이 둘을 궁전 정원에 위치한 테이블로 안내했다. 마치 올 걸 예상한듯이 차려져있는 세 잔의 예쁜 찻잔에 종인과 루한이 자연스럽게 앉았다. 정원에는 백색의 아름다운 히아신스가 한가득 피어있었다.
“사실, 들려 줄 소식이 있어.” “무슨 소식?”
히아신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찻잔을 손에 쥐고 물어오는 종인에 태민이 예쁘게 미소 지었다. 정말, 정말 좋아할거야. 진심으로 기뻐하는 목소리에 루한이 오묘한 빛의 차에서 눈길을 돌려 태민을 바라보았다. 재촉할 마음은 없었다. 천천히, 나른하게 차를 몇 모금 마신 태민이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드디어 그들을 찾았어.” “……어?” “모두들 환생을 했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민의 말에 잠시동안 고민을 하던 종인과 루한의 눈이 뜻을 이해하곤 놀란듯 크게 떠졌다. 이게 몇 백년 만이야, 그렇지? 이제서야 마음을 놓은듯 밝게 소리내어 웃는 태민에 루한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져 오는 것 같았다.
*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을 끄집어 냈을 때, 그 파멸의 현장엔 모든것을 잃어 버린 듯한 표정의 루한과 종인만 존재 했다. 환계, 쉽게 말하면 천계(天戒)인 하늘의 끝이라 일컫는 또 다른 세계에는 모든 차원을 지탱하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나무는 모든 세계에 없어선 안 될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날, 생명의 나무라 칭하는 그 나무에서 마치 열매처럼 열두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수 십 년간 모든게 평화로울 것만 같던 천계에 위험이 닥쳤다. 생명의 나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힘이 없던 대천사들은 힘을 모아 나무를 숨기고 그 힘을 열두명의 아이들 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들을 전설이라 칭했다.
생명의 나무에서 태어난 아이들 답게 각자 특별한 능력을 지닌 그들은 천계의 마지막 희망 이였다. 모두의 사랑을 받은 열두명은 무럭무럭 자랐고, 어느새 천계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질 정도로 성장 했다. 그 후로도 몇 백 년간 아무일 없이 잘 지내 오던 천계에 또 다시 위험이 찾아왔다. 신을 만만히 여긴 마계 악마들의 반란 이였다.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악마들의 중심에는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의 온갖 악을 끌어 모은듯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루시퍼가 당당히 서있었다.
천계의 천사들과 신들, 그리고 훌쩍 커버린 열두명의 전설들은 그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이미 시작 되어 버린 전쟁은 장시간 동안 이어졌다.
몇 년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열두명의 전설들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전쟁의 끝에 루시퍼를 봉인하는데 성공했다. 허나 기뻐할 수도 없을 만큼 천계의 모습은 참담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천사들과 신들이 소멸했고, 이미 힘을 전부 다 잃어버린 열 명의 전설들은 기나긴 잠에 빠져 버렸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머리를 붙잡으며 주저 앉은 종인이 주변을 둘러 보며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이 나간 것 처럼 울던 종인이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는 경수에게로 힘겹게 다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경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형, 형! 일어나봐, 응? 경수야!!!! 일어나, 제발!!!!!!!”
경수의 얼굴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소리치던 종인을 루한이 힘겹게 말렸다. 루한 또한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 얼굴 이였다. 하얀 옷은 이미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빨간 피들로 젖었고, 온 몸과 얼굴에 피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둘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유일하게 살아남은 대천사 태민은 열 명의 전설들을 옮겨 자신이 숨겨 놓은 생명의 나무 주변에 가지런히 눕혀주었다. 그리곤 가만히 생명의 나무에 손을 댔다.
아무도 쉽사리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참 눈을 감고 있던 태민이 나무에 댄 손을 힘없이 떨어뜨린 후, 루한과 종인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둘은 이미 체념한 표정이였다. 영원히 못 일어날 거란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 “아마 모두가 인간으로 태어난 터라 아직 자신의 능력을 모를 거야.” “그럼…….” “너희가 능력을 일깨워주기 위해 지상계로 가야해.” 열 명은,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났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아직은 인간의 몸이지만, 능력을 깨닫게 되면 전과 같은 전설로 변하는 거야. 차분히 이야기 하는 태민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루한이 들뜬 얼굴로 좋아하다 이내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우리를 기억 못할거 아니야.”
각자의 능력을 깨닫는 순간 전생의 기억도 모두 기억나도록 내가 도와줄게. 이건 나의 마지막 선물이야. 이상하게도 열두명의 전설들을 제외한 나머지 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대천사인 태민에게 유일하게 존재했다. 바로, 기억.
해사하게 웃어 보인 태민이 차를 한모금 마셨다. 잠깐 말을 나누는 사이에 식어 버린 건지 미지근 해져 있었다. 실감이 안나는지 아직까지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뻐 하는 둘의 모습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몇 백 년만에 보는 색다른 표정 이였다. 정원 위로 벚꽃과 따뜻한 눈이 섞여 아스라이 흩날렸다. 마치 축하라도 해주는 것 마냥 기분좋게 살랑이는 바람에 종인이 미소 지었다. 모든게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은 듯 아름다웠다.
그러니 그 열명을 부탁해.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태민의 여린 음성이 공중에 흩어졌다.
분명히 해낼 수 있어, 너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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