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정의 05
(부제: You don't know my mind)
불꽃심장 - You don't know my mind
관계(關係) 명사
1.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
2. 어떤 방면이나 영역에 관련을 맺고 있음. 또는 그 방면이나 영역.
3. 남녀 간에 성교를 맺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
힘겹게 벽에 지탱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었다. 한꺼번에 많이 먹었던 수면제 탓인지 손도 발도 둔한 것 같았고 속도 쓰렸다. 그러다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차가운 병원 복도에 기대 앉아있는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날 안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닥이 이렇게 찬데. 춥지도 않아요?"
"가지가지로 속 썩이네, 진짜. "
"...집에 안 갔어?"
"갔지. 근데 잠이 와야지. 이러고 있을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올걸."
"미안해요, 늦게 와서."
네가 왜 나한테 사과를 해. 김지원에게 지금까지 했던 모진 말들이 생각났다. 나는 너한테 이렇게 상처밖에 안 주는데 넌 뭐가 좋다고 나한테 잘해 줘. 지원아, 너는 왜.
"어어? 왜 울어요, 왜 울지."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그래요?"
"미안해..."
"미안하면 뚝. 뚝 하라니까. 뚝해요, 뚝. 착하지."
"아까, 아까..."
"알아. 알겠으니까 뚝 해."
"나보고 어쩌라고 자꾸 울어."
울지 말라는 김지원의 말에 손을 올려 눈가를 더듬자 물기가 묻어났다. 그런 멍청한 내 모습을 지켜보던 김지원은 날 벽에 기대 세워놓고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냈다. 내 사과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내 눈물 닦기에만 열중하는 김지원때문에 눈물이 더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눈가를 닦아 주던 김지원은 결국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듯 날 끌어당겨 안았다. 가만가만 내 등을 쓸어주는 김지원에 눈물을 그치려고 노력했다. 훌쩍이던 내가 조용해지자 내 어깨를 잡아 날 떼어내 얼굴을 살피던 김지원이 멈춘 내 눈물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
"혼내려고 했더니 어디서 벌써 혼나고 왔어?"
"수면 유도제였기에 망정이지, 그게 진짜 수면제였으면 어쩔 뻔했어."
"...미안."
"봄아."
"...응"
"넌 내 환자이기도 한데 그 전에 나한테 아주 소중한 동생이야. 알지."
"당분간 약 처방은 안 해 줄 거야."
"...오빠!"
"마음의 병이야. 치료를 하려고 해야지 곪는 대로 두면 어떡해. 이제 너도 살아야지, 봄아."
약이 없으면 잠들지 못 한다. 혼자 잠들려고 했던 시도들은 잠에 들 때마다 악몽을 꾸는 덕에 포기한지 오래였다. 내 간절한 표정에도 송윤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말에 힘들게 그쳤던 눈물을 다시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있으니까. 선명하게 다가오는 아이의 죽음을 그동안 애써 부정하고 있었음을, 놓아주지 못 했음을. 나보다 먼저 눈치채고 있었던 송윤형의 말에 배를 감싸안고 울음을 토했다.
날 기다리고 있던 김지원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오는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기껏 힘들게 달래놨더니 또 울려놨다며 내 앞에서 안절부절 못 하는 김지원에 금방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
.
.
퇴원을 했다. 데리러 온다는 김지원, 김한빈, 김진환을 모두 거절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집까지 못 데려다 줘서 미안하다고 머리를 쓰다듬는 송윤형도 겨우 보냈다. 와봤자 시끄럽기만 하지. 그리고 쉬라며 무조건 집에 데려다 줄 사람들이기에 극구 거절했다. 분명 집에 들어가면 악몽을 꿀 게 뻔했다. 악몽을 또 꿀 바엔 차라리 잠을 자지 않는 쪽을 택했다. 다른 사람들과 잠자리를 가지기엔 몸이 힘들었고 그렇다고 김지원과 하기엔 흔들리고 있는 내 마음이 무서웠다.
택시에 올라타 작업실로 향했다. 예전엔 작업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오랜만에 들어와서 그런지 낯선 작업실이 이상했다. 그동안 좀 오지 않았다고 먼지가 쌓인 것 같은 작업실을 팔을 걷어붙이고 정리했다. 몸을 조금이라도 혹사시키고 싶었다. 청소를 끝내고 쉴 틈 없이 바로 앉아 곡 만들기에 집중했다. 생각나는 대로 가사를 쓰고 건반을 두들기며 음을 계속해서 만들었다.
의자에 풀이라도 바른 듯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입맛도 없고 잠에 들지 않기 위해 커피만 내내 달고 살았다. 잠을 자면 또 악몽을 꿀 것이고 아마 나는 견디지 못 할 테니까. 그렇게 나흘이었다. 나흘을 한숨도 자지 않은 채로 작업에 몰두했다. 혹시 또 걱정할까 봐 김진환과 가끔씩 연락은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 찾아낼 게 뻔했다. 아마 전부 내가 집에 있는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나흘을 밤 새운 결과 곡이 완성되었다. 눈만 감으면 정말 기절하듯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상태라면 꿈이고 뭐고 바로 잠에 들 수 있을 거였다.
.
"뭐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어요?"
"왜 여기 있냐고, 어떻게 알았... 김진환이네."
"왜 클럽 안 와요?"
"내 마음이야, 비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정신력으로 붙잡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차를 몰고 가고 싶었지만 이대로라면 무슨 일이 나도 크게 날 것 같았다. 차를 박는다든지 졸면서 운전을 한다든지. 택시에 내리는 순간 잡히는 손목에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김지원이 서있었다. 김지원한테 집주소를 알려 준 기억이 없었는데 생각하자마자 떠오른 김진환의 얼굴에 인상을 찌푸렸다. 점점 깊숙이 내 사생활로 들어오는 김지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은 불안했다. 그래서 더 모질게 굴었다. 김지원에게 내뱉은 모진 말은 더 날카롭게 나에게 돌아와 훨씬 나를 아프게 할 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흘을 밤을 새웠더니 신경이 잔뜩 날카로웠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몸을 눕히고 싶은데 김지원이 문 앞을 막고 있었다. 그런 김지원을 무시하고 김지원에게 등을 보인 채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김지원은 그런 내 손목을 꽉 잡아 저지했다.
"어디에 있었냐고 묻잖아요."
"도대체 네가 그게 왜..."
"...왜 그래요? 괜찮아요?"
"궁금한... 건데..."
"...봄아? 한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을 혹사시켜 정신력으로 붙잡고 있었더니 몸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내 손목을 붙잡은 김지원의 손을 뿌리치려 하자마자 머리가 띵했다. 김지원에게 목소리를 높이던 걸 멈추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런 내 모습에 놀란 김지원이 휘청이는 내 허리를 감쌌다. 김지원의 얼굴이 두 개로, 세 개로 보이더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아졌다. 눈앞이 하얬다. 몸에 힘이 풀려 쓰러진 나를 김지원이 안아들었고 따뜻한 품에 안기자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
눈을 뜨자 보이는 흰 천장과 집만큼 익숙한 병원 향에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나 또 쓰러졌나보네. 그러다 내가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를 떠올렸다. 되짚어본 기억에는 김지원에게 차갑게 말하는 내가 있었고 그런 내 말을 듣고 있던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던 김지원이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김지원의 얼굴을 제대로 못 봤는데 아마 좋은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김지원을 찾으려 두리번 거리자마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엎드려 곤히 자고 있는 김지원이 보였다. 역시나 수척해진 김지원의 얼굴에 마음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김지원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간지러웠는지 뒤척이는 김지원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냈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뒤척이는 김지원에 숨을 죽였다. 김지원이 깨지 않았으면 했다. 오랜만에 본 얼굴이 수척해져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김지원이 자고 있는 시간만큼 내 마음대로 김지원의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으니까. 계속 잠들어 있었으면 했던 내 바람과는 다르게 김지원은 잠깐의 뒤척임 후에 눈을 떴다.
"괜찮아요?!?"
"..."
"사람이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도대체 어디서 뭘 한 거예요?"
"요즘 시대에 영양실조가 말이 되긴 해요?"
바보 같은 게 자기 꼴은 신경도 못 쓰고.
"내 몸이 이렇든 저렇든 신경 쓰지 마."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퉁명스러운 내 말에 상처라도 받은 듯 인상을 구기는 김지원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이불을 끌어올려 덮었다.
"신경이 안 쓰이게 해 주던가."
"지켜보고 있어도 잠깐 눈 돌린 사이에 손 쓸 수도 없이 아파버려서."
"왜 항상 나는 한 발 늦는 걸까, 왜 나는 옆에 있어 주지 못 하는 걸까."
"애타 죽겠는데."
처음 차분하던 말투와는 다르게 점점 격양되어 가는 김지원의 말투가 말하지 않아도 온 몸으로 자신을 봐 달라고 말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돌아가려는 몸을 애써 저지했다. 참아. 네가 무슨 자격이 있어, 한봄.
"네가 싫어하니까, 내가 다가가는 걸 불편해 하니까. 그래서 나도 그냥 입 다물고 있으려고 했는데."
"...김지원."
"안 되겠어요. 못 참겠어."
"혼자 아픈 거, 그거 이제 그만해요."
"말 하지마, 안 들을 거야. 하지 마, 너."
김지원이 무슨 말을 할 지 알 것 같았다. 사실 말을 하지 않아도 매일 나를 보는 그 눈으로, 격한 관계 중에도 부드럽게 키스해주는 그 입술로, 다정하게 나를 쓰다듬어 주는 그 손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김지원이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김지원의 마음에 기뻐할 새도 없이 김지원의 고백을 거절해야 했으며 상처받는 김지원에 아마 그 수십 배, 아니 수천 배로 상처받을 테니까. 그래, 결국은 내가 상처받는 게 무서웠다. 더 이상 상처 받기도, 상처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지원아, 제발.
듣지 않겠다며 이불을 끌어올리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평소였다면 금방 물러났을 김지원이 오늘은 달랐다. 등지고 옆으로 누워있는 날 힘으로 돌려 눕힌 김지원이 나와 눈을 맞췄다.
"들어요."
"안 들을 거라니까."
"좋아해. 한봄, 좋아한다고."
김지원의 고백에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내가 김지원을 좋아하는구나. 생각보다 많이, 어쩌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구나. 그렇기에 김지원의 고백을 더 못 들은 척 했다. 내가 좋아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너는 나 같은 거 말고 예쁘고 착한 여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시 돌아 누우려고 했으나 내 어깨를 꽉 잡고 놔주지 않는 김지원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알고 있잖아요, 내 마음."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른 척 해요, 왜."
날 올곧게 바라보는 김지원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눈을 내리깔았다. 나의 시선을 따라가 눈을 맞춘 김지원에도 계속해서 눈을 피하기만 했다. 한참을 날 빤히 바라보던 김지원이 이내 몸을 일으켰다.
"사실 받아줄 거라 생각은 안 했는데."
"뭐, 상관없어요. 난 말했어,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각오해, 한봄. 지금처럼 병신마냥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는다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