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문이 무겁게 당겨졌다가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닫힌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본디 고요하기 마련인데 안쪽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따로 휴가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는데.
"이제 와?"
"어. 오늘 쉬는 날이야?"
"아니, 출장. 한 일주일은 못 올것 같아."
"그래."
그런 일을 가는 당일에 준비하면서 말하는구나. 그는 캐리어에 옷을 하나씩 접어 넣으며 건조하게 말했다.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으면서. 난 입고있던 겉옷을 옷걸이에 걸고 화장실로 향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뒤에서 팔을 잡아당겨 몸을 돌게하였다. 나는 아무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바로 입을 맞추었다. 내 팔을 잡았던 손은 허리로, 다른 손은 이미 등 뒤로 넘어가있었다. 옷가지가 하나, 둘 떨어지고 아침의 찬 공기가 살에 직접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히지도 않았다. 나를 벽쪽으로 몰아서는 저의 옷도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몇 번 걸리적거리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최악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민망해할까 어설프게라도 연기를 했을텐게 이런 상황에서는 말하는 것조차도 싫었다. 그도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허리짓만 하더니 이내 작은 신음과 함께 빠져나갔다.
그리고 저는 곧장 화장실로 가는데. 눈 앞에 보이는 벽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그벽이 뿌옇게 변했다가 이내 다시 맑게 보였고 뺨에는 눈물 한 줄기가 그대로 흐르고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대충 입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그대로 집에 계속 있었다면 정말 둘 중 하나는 죽지 않았을까. 내 상황과는 달리 밝고 따뜻하기만한 햇빛이 역겨웠다.
Same Old Love
[매니저님, 제가 오늘 몸 상태가...]
액정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힘이 없어 볼품없는 소리가 났다. 기분도 그렇고 아침에 있었던 일로 허리도 좋지 않아 급하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입을 열어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힘겹게 전송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노태현씨가 새로 왔기 때문에 인원은 충당할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쉬라는 내용이었다. 사람 좋은 매니저는 나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물론 나도 거짓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가게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착한 언니처럼 대해준다. 정산이 안맞으면 쉽게 짜증을 내지만 좋은 사람인건 분명하다. 내가 일을 쉽게 관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매니저에게 답장을 보내고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집 근처 카페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데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언제 출발하는지 확인도 하지 못하고 나온 터라 언제 들어가야 마주치지 않을지도 가늠이 안갔다. 창가 너머로 지나가는 연인들이 보이면 이따금 생각했다. 나는 왜 그를 떠나지 않고 상처 받으며 옆에서 머무르고 있는걸까.
나는 분명 정이 많아서 관게를 끊는 것에 약하거나, 의리로 누군가를 만날 사람은 아니었다. 도대체 뭐가 나를 붙잡고있는걸까. 그동안 만난 시간이나 내가 썼던 돈 등에 대해서 보상이라도 받고싶은가. 만약 그 보상이 사랑이라면 이미 늦었는데. 생각이 깊어질 수록 우울감만 가득했다. 뭐가 문제인지. 원인이 나인지 그사람인지 생각하는 경계선도 흐릿해질쯤 익숙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해요?"
"어, 노태현씨..."
"...울었어요?"
"아니요, 이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그는 내 볼에 손을 살짝 올려 좌우로 내 얼굴을 살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걱정이 담겨있다는게 느껴지니 괜히 코끝이 찡했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눈도 맞추지 않으니 그가 먼저 말했다.
"오늘 몸 안좋아서 쉰다고 들었는데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집에는 들어가기 싫어서..."
"그럼 우리집에라도 갈래요? 열쇠 줄게요."
"네?"
"밖에서 이러고 있으면 몸 더 상해요. 난 상관없으니까 우리집 가서 좀 쉬고있어요."
"아뇨, 그건 너무 실례..."
"내가 걱정돼서 그래요."
왜 노태현씨가 나를 걱정해요. 우리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집에 막 들어가라고 해요. 하지만 노태현은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내 손에 저의 집 열쇠를 쥐어주었다. 다시 돌려주고싶어 쳐다보기라도 하면 단호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되려 '움직이기 힘들면 같이 갈까요?'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의 이유도 목적도 없는 친절함에 헛웃음이 났다. 노태현은 그런 내 웃음조차도 따라 웃더니 본인이 주문한 음료를 건넸다. 점점 쌀쌀해지니까 마시라고, 못먹겠으면 버리라면서.
나는 무거운 머리를 느리게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카페의 문을 열어 아파트 방향으로 걸으며 그에게 손으로 인사했다. 그는 자리에 서서 한동안 나를 보는 듯 하더니 거리 꽤 벌어지자 다시 가게로 향했다. 손에 들려있는 음료와 열쇠를 보니 다시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다정하게 챙겨주는건 당신이 할 일이 아닌데.
Same Old Love
"일어났어요?"
"벌써 가게 마감했어요?"
"매니저님도 오늘 컨디션이 안좋았는지 일찍 정리하자고 하더라고요. 아무것도 못먹었죠?"
"네, 근데 별로 생각 없어요."
"아예 안먹으려고요?"
그래요. 노태현은 담백한 대답과 함께 입고있던 겉옷을 정리했다. 몸을 조금씩 일으키니 나는 그의 거실 소파에서 잠에 든 것 같다. 앉아있던 상태에서 잠이 들어 온몸이 쑤셔오는데 특히 허리가 심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있었다. 그사이 노태현은 방으로 들어가 흰 티와 반바지를 챙겨나왔다. 그리고 내게 건네며 턱짓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찬장에 칫솔 새거 있어요."
"어차피 옆집인데, 괜찮..."
"아까는 집 가기 싫다고 했잖아요. 불편하면 가도 상관없는데, 집이 더 불편한 거 아니었어요?"
"맞는 말만 하시니까 할 말이 없네요."
"씻고 나와요."
저렇게 웃으면서 정곡만 찌르면 뭐라고 대답해. 나는 그의 말대로 옷을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깔끔하게 정리된 집이다.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도, 소파 위에 있는 쿠션도 그리고 찬장에 있는 면도기와 수건 등 흐트러진 것이 없었다. 강박증이 있나싶을정도로 깨끗해서 쉽게 손을 대기 힘든 공간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툭툭 털며 밖으로 나가니 소파에 앉아있는 노태현이 보였다. 그는 소파 손잡이에 턱을 괴고 리모컨을 쥐고있었는데 한 채널에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온 나를 보더니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냐고 물었고 없다는 내 대답에 바로 TV를 껐다. 노태현과 살짝 거리를 두고 소파 끝쪽에 앉으니 살풋 웃는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드라이기를 가져와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안 건드릴테니까 편하게 앉아요.'
노태현은 작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고 나를 쳐다보았다. 마실거냐고 물어보는 눈빛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일어났을 때는 입맛이 없었는데 씻고 정신이 좀 드니까 한 잔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간단하게 안주를 만들어서 한 캔, 두 캔 들이키는데 평소보다 잘 들어가고 빨리 취하는 것 같았다. 저녁에서 새벽 사이에는 일을 하니까 마시지를 않고 쉬는 날에 마신다고 해도 내가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 취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안주도 맛있고 왠지 같이 있으면 편한 사람과 함께 마셔서인지 금방 알딸딸해졌다. 노태현은 내 눈 앞에 손을 몇 번 흔들더니 말했다.
"취한 것 같은데 괜찮아요?"
"완전 괜찮죠..."
"눈 풀렸어요. 가서 잘래요?"
"아뇨... 한 캔만 더 마시고요..."
"내일은 일 나가야,"
"노태현씨. 내가 매력이 없어요?"
"...난 매력 있다고 생각해요."
"아, 진짜요? 다행이다. 근데 남친이라는 놈은 왜 나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니 자기 급하다고 바지 내리고 넣고 싸면 다야? 어차피 출장 가서도 하고 올거잖아. 내가 모를 것 같냐고..."
나는 맥주 한 캔을 쭉 들이킨 다음에 손에 힘을 잔뜩 주어 캔을 찌그러트렸다. 그리고는 허공을 노려보며 되는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노태현은 가만히 턱을 괴고 나를 보다가 내 옆으로 붙어 앉았다. 그리고 내 뒤로 손을 짚어 상체를 내 쪽으로 숙였다. 새로운 캔을 따고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보았다. 그가 처음 가게에 왔을 때 눈을 마주쳤던 것처럼. 내가 먼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또 끼부리려고요?"
"네."
"노태현씨도 문제야, 왜 그렇게 막 잘해주고 그러냐고요."
"기분 나빴어요?"
"아니 나 남자친구 있는 거 다 말했는데 자꾸 끼부리고 그래요-"
난 그냥 아플까봐 걱정이 돼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살살 쓰다듬으면 그게 걱정인가요, 노태현씨. 나는 허리에 얹어진 손 위로 내 손을 포갰다. 그는 내 손과 나를 한 번씩 바라보았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있었다. 그래, 오늘은 술 기운을 빌리자. 내가 먼저 입을 맞추었고 곧장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숨이 들뜨기 시작했다. 취기가 점점 올라 시야가 흐릿해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등 뒤에 닿은 부드럽고 푹시한 촉감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안기고 일어난 다음날 당신이 내 옆에 누워있으면 나는 반할 수 밖에 없을 텐데.
---------------------------
댓글로 반응 남겨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