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密會
03
「도련님, 저는 정말로…」
「내가 된다 하지 않느냐.」
호석이 잔뜩 겁을 먹은 채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찌어찌하여 황궁 앞까지 호석을 잘 구슬려 데려오기는 하였으나 막상 장엄한 황궁의 문과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들을 보자 그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차마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형이야 코흘리개 시절부터 매일 제 집 드나들듯 다니던 곳이었으나 호석에게는 넘어서는 안 될, 제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아니 되겠습니까…?」
「내가 어제 너를 거두었을 때 너에게 무어라 이르더냐.」
「…….」
「내가 어디를 가든 내 옆에 있거라.」
그제야 호석이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걸음을 옮기자 등 뒤편에서 호석 특유의 자박자박 걸음 소리가 났다. 호석의 발걸음은 마치 나비 같았다. 가벼웠으나 우아했고 봄을 닮은 사랑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문을 통과하니 양 가에 서 있는 경비병들이 목례를 하였는데 그것에 또 겁을 먹은 것인지 제 등 뒤로 바싹 따라붙는 호석의 온기가 느껴져 태형이 슬쩍 웃었다.
*
호석은 모든 것이 무서웠다.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펼쳐지는 모든 일들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리고 태형을 따라 입궐하였을 때, 눈 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호석은 자기가 지금 사람 사는 세상에 와 있는 것은 맞는가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으니, 겁을 먹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어제는 영의정의 저택을 보고 놀랐건만 황궁은 그보다 더했다. 영의정의 저택은 황실의 색인 붉은색과 금색을 절제하고 연못에 연꽃과 오리들을 띄워 우아하고 진중한 멋이 묻어나왔다면 황궁은 너무나도 화려하고 휘황찬란하여 그것을 표현할 말조차 찾기 힘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나라 안의 궐이라기보다는 이 황궁 전체가 황제의 자그마한 소국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규모는 방대했다. 황제가 자리하고 있는 본궐까지는 문을 들어서고 나서 조금을 더 걸어야 했는데, 걸어가는 길에는 다리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자그만 개울이 흘렀다. 흐드러지게 핀 각양각색의 꽃들이 푸르른 녹음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그 화려함을 더했다. 연회는 준비가 끝난 듯했다. 황실의 우아한 금빛을 뿜는 비단이 황제를 중심으로 양 가로 앉아 있는 신하들의 머리 위에서 펄럭였다. 황제의 가장 가까운 오른편인 태형의 자리 하나만이 비어 있었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뜩 차려져 있는 처음 보는 음식들에 호석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태형이 자리에 앉으며 제게 생일 축하 인사를 의례적으로 건네어 오는 신하들에게 미소를 띄었다. 아직 황제는 오지 않은 듯했다.
「도련님, 신선들이 사는 곳 같습니다….」
「나와 함께 지내다 보면 드나들 일이 많을 것이다. 너무 놀라지는 말거라.」
태형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호석의 시선은 가장 위쪽에 위치해 있는 황제의 자리였는데, 간신히 얼굴만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고급스러운 짙은 갈색의 목재로 이루어진 용상은 번쩍거리는 금빛들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두 다리를 뻗고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랬다. 저곳에 앉는 사람은 누구일까, 황제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호석의 머릿속에 쉴새없이 궁금증들이 떠올랐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때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호석의 귀를 강타했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호석이 그 뒤에 들려오는 내시의 고함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하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역시 자리에서 일어선 태형이 호석에게 낮게 속삭였다. 고개를 숙이고 황제와 눈을 마주치지 말거라.
용상에 앉을 줄 알았던 정국은 용상을 지나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타고 한 발짝 한 발짝 신하들이 있는 아래쪽으로 다가가는 정국의 오른편에는 늘 그랬듯 짙은 보랏빛의 비단을 두르고 부채로 얼굴을 전부 가린 윤기가 자리했다. 그리고 언제나 황제의 곁에 있지는 않지만 황제의 두 번째 최측근이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늘 황제의 왼 편에 서는 황제의 호위무사 지민 역시 황제의 곁에 있었다. 그 뒤로는 상궁들과 나인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황제가 아래쪽으로 내려오자 호석은 황제를 자세히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듣기로는 나이가 어려 외모는 앳되었다 했으나 나이가 어림에도 풍겨나오는 기운이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호석이 조심스레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작달막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한 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확실히 앳되어 보였는데, 태형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린 듯 보였다. 자기가 본 사람 중 손에 꼽을 만큼 수려한 외모였고, 당당히 어깨를 펴고 제 밑에 고개를 조아린 신하들을 내려다보는 투명한 눈동자에서 황제의 위엄과 권위가 호석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미소를 띄지 않고 굳게 다문 입술과 곧게 펴진 눈썹에서 황제의 품위가 그대로 느껴졌다. 타는 듯이 붉은 곤룡포와 흰 편인 살결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모두들 연회에 와 주어 고맙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짐이 몸소 계획한 연회이니만큼, 모두들 즐겨 주길-」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바라오.」
호석이 홱 고개를 숙여 시선을 제 발끝에 고정했다. 등줄기에 냉수를 뿌린 듯 서늘한 느낌이 골을 타고 머리를 울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눈앞에 저를 바라보던 황제의 차가운 얼굴이 아른거렸다.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황제는 결코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라 들었는데, 목을 치라 명하시면 어떡하지.
「예, 폐하-.」
황제가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저에게로 가까워오는 발걸음에 호석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세차게 바람이 부는 것마냥,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떠는 호석을 눈치챈 태형이 진정하라 호석을 달래었으나 그 떨림은 멈추지를 못했다. 황제가 태형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호석의 몸이 흔들리며 제 앞에 놓여 있던 사기잔을 손으로 치고야 말았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한 자락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진 궐내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아무 말도 않고 호석을 바라보고만 있는 황제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본 태형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송구합니다. 이 아이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태형이 되물었으나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윤기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부채가 살랑거렸다.
「두 번 말하도록 만들지 마라.」
호석이 덜덜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 호석이라, 하옵니다…」
정호석. 황제가 천진한 목소리로 호석의 이름을 짓씹었다. 아직은 풋풋한 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였으나 그 목소리는 호석의 귀를 아프게 강타했다.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감조차 잡히지를 않았다.
「고개를 들어라.」
「폐하, 이 아이는 아직-」
「내 두 번 말하도록 하지 말라 했을 텐데.」
호석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깊고 짙은, 투명하고 새카만 그 눈동자에 어린 광기가 자신을 옭아매어 단단히 붙잡아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를 끌어당기는 듯한 깊음에 빠져버릴 것 같다고 호석은 생각했다. 정국이 슬쩍 웃었다. 눈은 제게 똑바로 고정된 채 입꼬리만이 양 볼을 움푹 패며 말려올라간 그 웃음은 아이의 순진함을 담고 있었으나 동시에 소름끼치는 광기 역시 담고 있었다.
「연회를」
고요한 궐에,
「시작하라.」
황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태형은 연회 내내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음식들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황제가 호석에게 지어보였던 그 미소가, 그것을 미소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꾸만 눈 앞을 맴돌았다. 황제와 태형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왔던 친우 사이였으나 십오 년이 넘도록 한 번도 그토록 오금이 저리는 표정을 짓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건만. 황제의 표정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과도 같았으며, 곧 죄인의 목을 내리칠 망나니의 광기와도 같았다.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태형은 황제의 새카만 눈에 번들거렸던 감정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욕망이었다.
황제는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제 쪽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며 호석을 향해 눈길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태형은 생각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아직까지도 미미하게 손을 떨고 있는 호석이 안쓰러웠다. 태형이 따뜻한 미소를 만면에 띈 채 제 곁에 서 있는 호석의 등을 토닥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도련님, 저, 저는-」
「괜찮을 거다.」
「…….」
호석이 조심스레 태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포근한 미소가 자신을 감싸안고 어루만져주는 듯 했다. 순간 태형에게서 남준이 겹쳐보인 호석이 흠칫하여 제 눈을 비비적대었다. 하지만 제 눈 앞에 있는 이는 태형이었고, 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
태형은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저히 황제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호석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단 괜찮다고는 했으나 태형은 누구보다도 정국을 잘 알았다. 전정국은, 황제는. 결코 제 장난감을 손에서 무사히 벗어나도록 놓아둘 위인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쩌려는 거냐, 황제…….」
와아와아, 내 님들 안녕.
주말이에요. 좋다 좋아!
너무 늦게 밀회를 들고 온 것 같네. 미안해요, 딴짓하느라ㅠㅠ
모두 잘 지냈죠?
아 참, 나 선물 받았어요. 암호닉 '가오나시' 님, 감사드립니다 :)♡
감춰둘 내용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