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키 - 첫사랑 (Feat. 유주 Of 여자친구)
응급의학과 또라이 03
너를 처음 만난 건 스무 살 때였다.
스물의 황민현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그리고 스물의 이성경이는 참 밝고 철딱서니 없는 사람이었다.
학기 초에는 그토록 꿈꿔왔던 의대 입학에 하루하루가 신이 나기만 했다.
캠퍼스 생활에 적응하면서 그렇게 몇 주를 보냈다.
매번 강의실 두 번째 줄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너에게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갔다.
다음 시간에도 그리고 그 다음 시간에도 너는 늘 한결 같았다.
흐트러짐 없이 정리된 헤어와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한 번도 지각하는 걸 본 적이 없고 늘 본인과 어울리는 하얀 색의 텀블러를 가지고 다녔다.
항상 무표정으로 있다가도 교수님의 농담에 살짝 웃음을 머금는 네가 귀엽기도 했다.
과 행사가 꽤나 많았지만 민현이와는 친해질 기회가 많이 없었다.
멀리서 너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혼자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오티 때 예고한 대로 팀 수업으로 진행할게요. 팀은 제가 임의로 섞었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갑자기 심장이 막 뛰었다.
제발 같은 조가 되게 해달라고 속으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때의 나는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정말로 민현이와 한 조가 되었다.
조별과제를 좋아하는 대학생이 있을까 싶지만 나는 그랬다.
민현이와 같은 조라는 게 그냥 좋았다.
그 날 민현이는 체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민현이는 눈동자가 참 맑고 예뻤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인사라도 먼저 해야지 싶었다.
존댓말을 해야 하나 반말을 해야 하나 수십 번을 고민했다.
“저기... 안녕.”
“...”
뭐지...
내 인사가 마음에 안 들었나..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 황민현이야.”
“응?”
“이성경 맞지?”
네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엄청 놀랐다.
“... 응.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조심스레 너의 말에 대답했다.
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빨개졌을 내 얼굴이 그려졌다.
너는 목소리마저도 참 좋았다.
집에 가서도 자꾸만 네 생각이 났다.
일주일에 두 번 이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 너는 나에게 큰 존재가 되었고 온 신경이 너에게 쏠리고는 했다.
지금 와서 그 시절을 떠올려 보면 너를 생각보다 더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또 하루는 지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코앞이 자취방이라지만 9시 수업은 너무나도 버거웠다.
대충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겨우 강의실에 도착해서 숨을 골랐다.
비워진 너의 옆자리에 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안녕!”
그래서 괜히 더 밝게 인사했다.
“... 응”
“오늘은 알람을 못 들어서 좀 늦었어ㅠㅠ”
민현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냥 나 혼자 말을 했다.
스무 살이라 그런지 참 패기가 넘쳤다.
“물... 마실래?”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숨을 고르는 내가 신경이 쓰였나 보다.
“고마워.”
너는 자신의 텀블러를 내게 건넸다.
흰 티셔츠에 슬랙스, 오늘도 황민현은 황민현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티셔츠에 있는 꼼데 모양이 자신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감으로는 백만년 만에 맞는 듯한 토요일이 되었다.
실컷 자고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거의 12시였다.
역시 집순이에게는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닐 수가 없다.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대충 지갑만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편의점에 가서 이것저것 골라 담았다.
곧장 집으로 가려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황... 민현?”
정말 황민현이었다.
민현이는 머리에 까치집을 하나 지어놓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민현이도 이 상황이 어색했는지 머리에 있는 까치집을 꾹꾹 누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안녕”
낯선 황민현의 모습에 자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대놓고 웃어도 돼...”
귀가 미치도록 빨개진 네가 귀여웠다.
“아... 미안. 추리닝 잘 어울리는데?”
“...”
아 귀여워.
짜증나게도 귀여웠다.
짧았던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아”
“응?”
“... 머리 묶은 거 잘 어울려.”
맙소사...
그제야 질끈 묶고 있던 내 머리가 생각이 났다.
나를 스쳐 지나간 후에도 남아있는 황민현의 향이 또 한 번 너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사실은 내가 무슨 말을 한지 기억도 안 날만큼 떨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네고 도망치듯 집으로 갔던 것 같다.
항상 완벽한 줄만 알았던 민현이에게 인간미를 느꼈다.
푹 눌린 그의 뒷머리가 “나도 사람이에요!”라고 하는 듯 했다.
그래서 더 좋았고 설렜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던 벽이 아주 조금은 무너진 것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었다.
드디어 내가 미쳤나 싶었다.
우리 학교 총장님은 겉으로 보이는 활동들을 굉장히 좋아하셨다.
다른 학교와 차별화된 명문 대학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그래서 참여해야 하는 활동들이 굉장히 많았다.
괜히 찍혀서 좋을 게 없을 걸 알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참여는 대개 신입생들의 몫이었다.
아무도 지원자가 없으면 뽑기를 해서라도 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사다리 타기를 했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하필 내가 걸린 걸 알았을 때는 정말 좌절감이 앞섰다.
집순이인 나에게 주말을 헌납한다는 건 정말 끔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나 말고 뽑힌 사람은 옹성우였다.
또 가서 엄청 싸우겠다 싶었다.
“아... 진짜 거기를 너랑 같이 가야 되냐?”
“야 근데 나 주말에 여자친구랑 여행가기로 했는데...”
“그래서..?”
“민현이한테 물어보면 나 맞을까?”
“... 알았어 내가 갈게.”
뭐라고 말을 했는지 결국 황민현을 설득하고 만 옹성우다.
어쨌든 성우 덕분에 아는 사람이 서로 뿐이었던 우리는 계속 붙어 다닐 수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과에서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다른 지역까지 가서 교육을 듣는데 잠이 쏟아졌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잠에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는데 민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숨이 턱하고 막혔다.
“... 너 겁나 잘 자더라.”
피식하고 웃으며 일어나는 네 덕분에 부끄러움은 배가 됐지만...
또 한 번 설렜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들이 모인 밤에는 빠질 수 없는 게 술이었다.
민현이는 싫다고 했지만 내가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술을 마시러 갔다.
입이 댓발 나온 황민현을 끌고 가는데 그게 또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게 됐다.
“성경이라고 했나? 의예과에는 남자 많아서 좋겠다.”
아니, 남자 많아서 의예과를 갔나?
내 맞은편에 있던 사람의 말에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았다.
“마음에 드는 애 아무나 고르면 되겠다 넌”
그냥 넘어가나 했더니 또 한 번 내 신경을 건드렸다.
“아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웃자고 한 말인데...”
내 표정이 굳어있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웃자고 한 말에 아무도 안 웃으면 그건 웃자고 한 말이 아니지 않나?”
화난 표정의 황민현이었다.
그리고 민현이는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
뒤늦게 따라갔더니 저 멀리 벤치에 앉아있는 네가 보였다.
“야... 나 괜찮아 왜 니가 화가 나”
“... 아 미안해”
“누나가 욕 먹으니까 싫었구나?”
일부러 오바하며 장난을 치니 피식 웃고 만다.
“어 웃었다 황민현”
“근데... 너는 화 안 나?”
“니가 대신 화 내줬잖아. 그럼 됐지 뭐”
민현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지만 나는 정말 그랬다.
네가 대신 화를 내줘서 나는 정말로 다 괜찮았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렇게 꿈만 같던 주말을 보내고 나서 시간은 쉴 틈 없이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더 친해졌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바라는 건 큰 욕심이었던 걸까.
그때의 황민현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고백해오던 날, 나는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여자친구를 보면서 행복한 웃음을 짓는 너에게 내 마음을 고백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내 마음을 깊숙이 눌러 담아야만 했다.
학교생활도 처음처럼 행복하지가 않았다.
반복되는 실수가 일상이 돼버렸고 그게 나를 점점 지치게 했다.
과연 이 길이 정말 내 길이 맞나 싶었다.
알아야 할 것들이 끝도 없었고 한 번 혼이 나고 나면 그 후유증에 자꾸만 겁이 났다.
자신감도 자존감도 한없이 추락하고 있을 때 너는 내게 큰 자극이었다.
그 날 단호했던 너의 말들이 내 머리를 크게 울렸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오는 너에게 나는 내 마음 속의 얘기를 했다.
그리고 너는 아무 말도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포기할 거면 지금 포기해.”
“... 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때의 말투처럼 차가웠다.
“의사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 많아.”
“...”
“우리는 앞으로 더 힘들 일만 남았고”
“자신 없으면 그냥 지금 포기했으면 좋겠다.”
사실은 그냥 너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듣고 싶었다.
아니 그랬었는데 너는 한없이 냉정했다.
속상하고 화나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이게 네가 원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뒀으면 좋겠어.”
“...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때의 황민현은 내가 자기 때문에 아프고 있는 줄도 몰랐다.
너는 서툴더라도 자기만의 방법으로 그저 나를 응원했던 거다.
눈물이 났다.
너의 말이 모질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나를 생각해주는 게 느껴졌고 그 말들이 내 마음을 고쳐주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지금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이 날을 되돌아보고는 한다.
비록 쓰라린 짝사랑에 울고 또 울었던 내가 함께 떠오르고는 하지만 지금은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 됐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너는 나에게 가슴 아픈 짝사랑이기도 풋풋한 첫사랑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함께 꿈을 이루고 더 큰 꿈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중이다.
내 친구 황민현은, 그리고 내 남자친구 황민현은 나에게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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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돌아오게 됐어요 여러분..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어요ㅠㅠ 오늘 확인해보니 2편을 업로드 한지 약 1달이 지났더라고요. 기다려주신 독자님들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혐생은 언제나 힘드네요 정말로... 사실 그동안 글을 쓰려고 시도를 많이 했었는데 너무 안 써지더라고요. 속상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몇 번을 엎었는지 모르겠어요ㅠㅠ 여주에게 민현이의 말들이 아주 큰 힘이 된 것처럼 제가 예~전에 썼던 글들부터 독자님들이 남겨주신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힘을 얻었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지금 신알신도 150이 넘었더라고요. 더 좋은 글로 보답해야 하는데ㅠㅠㅠ 사실 저녁 11시 업로드가 목표였는데 길이가 길다고 뜨고 렉 먹고 자꾸 꺼져서... 인티에 문의해보려고 합니다. 결국 새벽 3시 반이 넘어버렸네요 흑흑 오늘 글이 아마 독자님들의 마음에 쏙 들지는 않으셨을 수도 있어요. 속상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더 노력할게요.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얘기를 안 했네요. 이번 화에는 민현이와 여러분들의 대학생활을 담아 보았어요! 아직 둘의 과거 이야기가 다 풀리지는 않았고요, 조금은 지루해질지 몰라도 필요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당. 표현을 잘 못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내심 여주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속은 따뜻한 민현이의 캐릭터가 느껴지셨나요?! 말이 길어져서 죄송해요. 평소보다 글도 길었는데 지루하지 않으셨길 바라며.. 남은 주말 잘 보내요♥ (지난 화 댓글에 남겨주셨던 소재들 잊지 않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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