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종대를 주제로 떠도는 이야기들이 듣기 싫어 가방을 챙겨 호기롭게 교실을 박차고 나왔지만 아홉 살의 내가 이 시간에 학교를 제외하고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교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요만치도 없었다. 갈 곳을 잃은 나는 결국 복도 신발장에 등을 기댄 채 실내화 코끝만 통통 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오늘 종대한테 신발 끈 묶는 법 가르쳐주기로 한 날인데, 학교에 오지도 않고. 한참을 종대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으니 학교에 나오지 않은 종대가 미워지기까지 했다. 나는 집에 가면 다음 날 종대한테 해줄 말만 생각해서 오는데. 종대는 내 마음도 모르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쪼그려 앉아있던 다리를 편채로 다리를 두드리고 있으니 내 위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주 무슨 일 있어? 왜 혼자 복도에 나와있고 그래. 어디 아프니? 아주 짧은 시간에 잠시나마 인기척의 주인공이 종대이길 빌었건만 따뜻하고 낯익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오자 단번에 종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 그래, 여주야. 선생님이야, 어디 아프니?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선생님의 질문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그런 내 마음을 선생님은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 대답 없는 내게 시선을 맞추고는 작게 웃어보였다. 여주, 종대가 많이 걱정되는구나?
걱정요? 그래, 걱정. 여주가 종대를 많이 걱정하는 것 같아. 다른 친구들은 종대에 대해서 나쁜 점만 보고, 나쁜 것만 생각하려 드는데 여주는 그렇지 않잖아. 종대를 도와주고, 이해해주고. 선생님은 모두 다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어. 그러니 선생님 앞에서는 뭐든 말해도 좋아, 여주가 종대를 이해하고, 종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선생님도 여주를 이해하고, 귀를 열어줄 수 있거든. 내 손등을 천천히 쓸며 말을 이어가던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선생님과 나 사이에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나는 고민 끝에 여태 내가 종대를 보며 느껴왔던 감정들을 유감없이 선생님께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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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도중에 왈칵하고 차오르는 눈물을 결국에는 참을 수 없어 끝끝내 훌쩍거림이 섞인 하소연이 끝난 후에야 저려왔던 다리를 풀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선생님은 그 어떠한 말도 일절 하지 않으셨다. 단지 뭐가 그리 즐거우신지 웃기만 하실 뿐 그 외에는 별다른 말 없이 교사 수첩을 펼쳐 종대의 사진이 붙어 있는 페이지에 집 주소를 내 연습장 끄트머리 한편에 또박또박 바른 글씨로 적어주시며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알았지, 여주야? 선생님이 말한 대로만 가면 돼. 종이 잃어버리지 말고. 무슨 일 생기면 공중전화나 파출소에서 전화 빌려서 종이에 적힌 번호로 선생님한테 전화 걸고. 네, 선생님 그렇게 할게요.
나는 선생님께 감사의 표시로 정중히 인사를 해 보이고는 종대의 집 주소가 적힌 종이가 혹여나 날아갈세라 손에 꼭 쥔 채 책가방을 고쳐 매고는 버스 번호를 중얼거리며 학교 앞 맞은편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서둘러 바삐 옮겼다. 처음이었다. 혼자서 버스를 타는 것도, 이렇게 멀리 가보는 것도,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밖에 있는 것도. 발이 닿지 않는 정류장 벤치에 앉아 다리를 휘적거리며 종대네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니 호기롭게 학교를 나설 때는 없던 두려움이 불현듯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내 열로 끙끙 앓고 있을 종대를 생각하면 굳센 마음이 생겼다.
- 아저씨 이 버스 타면 백사마을 갈 수 있어요?- 그럼, 갈 수 있지. 그런데 너 혼자서 가려고?- 네. 제 친구가 지금 많이 아프거든요. 저 거기 가서 종대 만나야 해요.
입으로 계속 중얼거리며 외우던 번호의 버스가 도착하자 무작정 올라탔다. 그런 내 모습에 기사 아저씨는 위아래로 날 한 번 슥 훑더니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이며 요금을 일러주셨다. 이거 오늘 새로 나오는 아바타 스티커 새로 사려고 했는데.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종대를 생각해 주머니 속에 고이 접어둔 분홍색의 천 원 짜리 지폐를 요금 통에 넣고는 거스름돈까지 챙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책가방을 품에 끌어안고는 종대네 집으로 출발하는 버스 창밖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니 알 수 없는 희열감이 들었다. 종대가 학교를 올 때마다 보고 있는 풍경들을 나도 보고 있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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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거장은 백사마을, 백사마을입니다. 생각지 못한 제법 긴 주행에 졸고 있다가 고요한 버스 안에 백사마을이라는 안내 방송이 울리자 다급하게 벨을 누르고는 하차했다. 그대로 잠에 빠졌다면 종대를 보지 못하고 꼼짝없이 다시 학교로 갔을 판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정류장 주변을 둘러보자 생소하고 낯선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지붕을 얹은 집이 한 두 채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한 쪽이 너덜너덜해 곧 끊어질 것 같은 집도 많았다. 이곳에 종대가 사는 곳이 있단 말이지.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던 건지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펼치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집 주소와 비교해가며 언덕길을 올라갔다.
365-4, 365-5, 365-6… 찾았다. 여기. 헉헉거리며 겨우 찾은 종대네 집은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주소가 적힌 종이와 집에 붙어있는 주소를 다시 한 번 번갈아보며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철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이 문만 열리면 종대가 나올 거야. 긴장감과 기대감에 상기되어 있는 얼굴을 제 양손으로 감싸며 기다리던 찰나 문이 열리고 그 앞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종대가 서있었다. 하얗고 깨끗하던 종대가 아닌, 피멍으로 인해 잔뜩 부어오른 얼굴의 종대가.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명 종대가 열감기 때문에 아프다고 들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라본 종대의 얼굴은 그늘이 진 듯 어둡기만 했다. 마치 처음 전학을 왔던 그날 처럼. 종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싶어 입을 떼려는데 종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여주? 여주… 여주야, 어떻게 왔어? 여기 오면 안 돼. 우리 집 오면 안 돼. 종대의 집을 찾아온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첫 째는 종대의 얼굴을 보고 충격에 빠졌고, 둘째는 종대가 내뱉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환영은 받지 못하더라도 여기 왜 왔냐는 소리는 안 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종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늘 하루를 모두 허무하게 만들 만큼 맥아리가 빠졌다.
- 종대야. 나 여기 어떻게 왔는데 네가 가라고 하면 어떡해.- ………- 학교 안 와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래서 너 찾아 왔는데 가라고 하면 어떡해.- 여주, 가… 여주야. 가.- 내가 어떻게 가, 종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