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연, 정수연
" 도와줘 "
비에 쫄딱 맞았으면서 몸은 또 상처 투성이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문 앞에 서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정수연은 다시 한 번 내게 말해왔다. 제발 도와달라고.
" 미영이 있어. 나중에 와 "
미영이라는 말에 수연이의 몸이 움찔 거렸다.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미영이를 만나고 싶어서 정수연을 이용했던 건 내 잘못이다. 정수연을 거짓으로 유혹 한 것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 감정 없는 채로 이야기했던 것도, 정수연이 나를 좋아하게 만든 것도, 그런 정수연과 사귀는 도중에 미영이와 잠을 잔 것도 내 잘못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 유리한테 가 "
" 태연.. "
수연이의 말을 채 듣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우니 욕실에서 미영이가 젖은 머리를 털며 걸어나왔다.
" 밖에 누구야? "
화장대에 앉아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거울을 통해 나를 쳐다보았다.
" 모르는 사람이야 "
" 근데 이 시간에 찾아와? "
내 쪽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미영이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손에 담긴 로션을 얼굴에 바르며 ' 수연이지? ' 하고 미영이가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 거리자 그럴 줄 알았단다.
" 수연이한테 살갑게 좀 대해줘. 그래도 너 좋다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
" 난 정수연이 아니라 널 좋아하는 거야, 미영아 "
" 그 아이를 좋아하라고 하는게 아니고 친근하게... "
" 싫어 "
미영이의 한숨 소리가 커졌다. ' 진짜 말 안 들어, 김태연.. '이라고 미영이가 말했다. 정수연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나쁜 짓은 이제 그만해야 된다. 황미영을 얻기 위해 정수연을 상처 입히고 이용하는 질 나쁜 행동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했다.
" 더 이상 수연이한테 상처 주기 싫어서 그래 "
로션을 바르던 미영이의 손이 멈칫한다.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진다.
" 알긴 아는 구나. 너 못된 거 "
" 그러니까 계속 밀어낼거야. 이래야 나한테 정 떨어지겠지 "
" 넌 진짜 바보야, 김태연 "
화장대 앞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온다. 머리가 살짝 젖은게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저 물방울이 너무 아찔하게만 느껴진다.
" 수연이한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야 "
" 정수연 얘기는 그만하자 "
" 가서 사과해. 수연이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거 너도 알잖아 "
" 그만하자고 "
" 잘못한 거 알잖아. 미안한 것도 알고 다른 것도 다 알겠지 "
" 그만하라고 했어, 황미영 "
" 피하려고 하지 마. 너 수연이 좋아하는 거 네가 제일 잘 알면서 왜 그래, 자꾸 "
" 그만하라고! "
결국 소리를 내질렀다. 씩씩 거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미영이를 쳐다보았다. 숨을 크게 내쉬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 소리 질러서 미안해. 근데 나 정수연 안 좋아해. 몰아가지마 "
" 몰아가는게 아니라 사실이잖아. 왜 피하려고 하는거야, 도대체? "
" 난 정수연이 아니라 황미영 널 좋아한다고. 피하려고 하는 건 오히려 니 쪽 아니야? "
" 아니. 너 지금 나한테 숨었잖아. 정수연 안 좋아하려고 나 붙잡고 있잖아, 지금. 내 말이 틀려?"
머리가 지끈지끈 거리는 게 깨질 듯이 아파진다. 초점이 흔들리고 어질어질해서 당장 쉬고 싶었지만 격하게 뛰던 심장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숨을 내쉬어 진정을 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는 게 문 앞에서 떨고 있을 정수연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아 주기적으로 생각을 강제로 꺼내고 있었다.
" 태연아 "
머리를 감싸고 있던 내 팔을 잡아 몸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 수연이 더 아파하기 전에 붙잡아. 더 이상 상처주는 거 싫다며.. "
" .... "
" 왜 이렇게 자꾸 어린애 같이 굴어, 바보야 "
약하게 덜덜 떨리는 내 몸을 꼭 안은 채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미영이의 괜찮아 라는 말이 미친듯이 뛰어대던 심장을 진정시켜주었다. 몸을 때내어 눈을 마주하고서 짧은 입맞춤을 했다.
" 어서 가봐. 늦기전에 "
" 나.. 미안해서 어쩌지.. 진짜 못된 놈인가보다 "
" 그런 생각은 수연이 만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
" 고마워, 미영아. 그리고 미안해.. 너 좋아했던 건 진심이였어 "
" 나도. 잘 가 태연아 "
옷걸이에 걸려있는 외투를 집어 들고 신발도 구겨신은 채로 급하게 집을 나섰다. 혹시나 했지만 다급히 문을 열었을 때 수연이는 이미 없었다. 주위도 어둡고 비도 추적추적 내린다. 목 아프게 주위를 두리번 거려 봤지만 수연이의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산 하나를 챙겨 무작정 수연이의 집 쪽으로 달렸다.
처음엔 수연이를 이용해서 미영이와 사귀게 되는 것이 목표였다. 황미영과 친했던 정수연이었기에 나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인물이었다. 정수연과 사귀면서 미영이에게 다가가 결국엔 미영이와 사귀게 되었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었던 수연이에게 어느 순간 나도 수연이를 진심으로 대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나는 부정하려고 했었다.
" 정수연! "
처절한 모습으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쏟아지는 족족 다 맞고있던 인영 하나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숨이 차서 제대로 호흡을 못할 정도 였지만 힘을 짜내서 달렸다.
" 비 오는데 우산도 안쓰고 이걸 다 맞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감기라도 걸리고 싶어? "
숨을 빠르게 내쉬며 우산을 씌워주었다. 몸을 움찔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수연이는 나를 보며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라리 뺨이라도 시원하게 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바보같이 착한 정수연은 때리기는커녕 떨리는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 미영이는 어쩌고 왔어.. 미영이 있다며 집에 "
" 황미영이 그러더라. 지금 나한테는 자기보다 정수연이 더 소중할거라고 "
" ..... "
" 나도 그걸 알 거래. 근데 바보같이 부정하고 있다면서 더 늦기전에 가라고 했어 "
좋아해, 수연아. 늦어서 미안해.
수연이의 고개가 푹 숙여지고 몸이 작게 떨리는 게 보였다. 내가 이 어깨를 안고 다독여 주어도 될까, 속으로 고민했다. 차마 안아주지는 못하고 작기만 한 그 등을 손으로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엉엉 울던 수연이는 그날 내 품에 안겨 지칠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3년 뒤, 수연이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내가 했던 못된 짓과 같은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