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시작에 들어선 날씨는 날이 갈수록 더워지고 있었지만 나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려버렸다. 언젠가 나에게 개같은년이라며 지나가듯 말한 이재환의 목소리가 선명해지는것같아 헛웃음이 났다. 틀린말은 아니네. 열이 심하게 났다. 온몸이 뜨거웠다. 도저히 학교에 앉아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나는 조퇴증을 끊고 집으로 와버렸다. 휴대폰이 몇번이나 울렸지만 받지않았다. 아픈것 정도는 내 자유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겨우 몸을 누일 수 있을만큼 작은방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제일 아늑했고, 편안했다. 약기운 때문인가. 자꾸만 눈이 감겼다. - "일어나." 목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기어코 집까지 찾아온걸까. 나는 억지로 눈을 더 꼭 감았다. 그런 나를 알아챈건지 이재환은 내 손목을 잡고 거칠게 나를 일으켰다. 덕분에 머리가 깨질듯이 어지러웠고 눈을 똑바로 뜨기 어려웠다. "누가 동생 아니랄까봐. 감기 걸리는 타이밍도 똑같네." "그만 가. 괴롭히려면 내일 괴롭혀." "돈봉투들이 그대로네. 현금으로 받는거 싫어? 카드로 줄까?" "하.. 제발. 나 지금 머리 깨질거같아." "아니면 모아뒀다가 도망이라도 가려고? 하긴, 피는 못 속이지." "....달라. 난 김윤주가 아니니까." "너 발악하는거 알아. 아는데 넌 김윤주 대신밖에 안돼. 니가 아무리 김여주여도, 니 언니랑 다르다 해도 결국 다른척밖에 안되는거야, 지랄맞은년아." "척? 그건 이재환 니가 하는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내가 김윤주가 아니라는거. 그냥 그렇게 믿고싶은거겠지. 널 버리고 떠난 우리언니가 아직도 그리워서 나한테서 언니모습 찾는거잖아." "내가 정말 김윤주가 그리웠다면 진작 김윤주 뒤를 따라갔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지마.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넌 결국 아무것도 몰라. 니가 아는게 전부 사실은 아니니까." 내일은 학교 나와라. 내앞으로 하얀색 돈봉투를 던진 이재환은 언제나 그렇듯이 냉정하게 나가버렸다. 그제야 꽉 막혀 답답할것만 같던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내가 아는 전부가 사실이 아니라는 이재환의 말이 자꾸 귀에서 멤돌았다. 그래봤자 우리언니가 죽은것과 그 죽음에 이재환이 연관되어있는것은 변함없을테지만. 문득 악몽속에서 봤던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의심이 들었다. 꿈속에서 내 발목을 붙잡던 언니의 얼굴이 웃는것이 아닌 사실은 울고있는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 - 아직 완전히 다 나은것은 아니지만 약먹고 꼬박 하루를 잤더니 열은 많이 가라앉아있었다. 이재환이 학교에 오라고 했으니까 나는 학교를 가야한다. 그게 내 주제인걸 어떡해. 오늘도 학교앞에서 멈춰선 차에서 내렸지만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다른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왠일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않으니 참 오랜만에 고요한 아침이었다. 그러나 늘 고요뒤에 찾아오는 폭풍이 더 무서운법이다. "자자, 다들 조용하고. 아침에 들어서 알고있겠지만 오늘 전학생이 왔다. 들어와." 담임의 말과 동시에 앞문에서 나타난건 빨간머리를 한 남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빨간머리의 등장에 반이 시끄러워진것은 한순간이었다. 나를 괴롭히던것보다 더한 반응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요란한 등장을 하는건데. "한상혁이야. 잘 지내보자." "빈자리가.. 어, 여기 앞에 김여주 옆자리 비었네. 여기 앉고, 이상 조회 끝." 사실 그게 누구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내옆자리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개의치않고 그대로 엎드려 눈을 감았다. 반 분위기는 도저히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않았고 오히려 더 소란스러웠다. 나는 내 두손으로 귀를 꼭 막았다. "야." 그런 나를 툭툭 건드는 손길이 맘에 들지않아 고개를 들고 옆을 쳐다보니 빨간머리 전학생이 해사하게 웃으며 내팔을 계속 찌른다. 이건 또 무슨경우인거야. "안녕. 나는 한상혁. 너는?" "이 손가락 좀 치워줄래." "아, 미안." 또 웃는다. 전학생이 내 팔을 툭툭 건들던 손가락을 치우며 또 웃는다. 나는 다시 엎드렸다. 여전히 주변은 소란스러웠고, 또 다시 전학생은 날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나는 엎드렸던 고개를 다시 들어야했다. 액정 위로 이재환이라는 이름이 보였고 나는 흘끗 뒤를 돌아봤다. 이재환이 날 쳐다보고있었다. '나대지말고 가만있어'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또 한번 이재환을 돌아봤다. 이재환의 시선은 내가 아닌 내옆자리를 보고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나도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전학생이 나를 보며 웃고있다. 그제야 나는 휴대폰을 책상 깊숙이 밀어넣고는 전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김여주." 이재환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옮겨온것을 느꼈다. 나는 전학생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전학생 아니 한상혁은 그런 내 손을 맞잡으며 또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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