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문득 일을 하다가도 당신 생각을 한다. 내 상상 안에서는 당신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기도 한다. 현실의 당신은 그렇지 않다. 예쁘게 웃던 당신은 내 앞에 없다. 다만 당신은 저 멀리, 저 멀리 있을 뿐. 나를 제대로 부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당신에게 내 이름을 들어본 게 아득하다.
나는 몇 년간 당신의 옆에서 애인이라는 명목으로 자리를 굳게 채우고 있었다. 애인이라는 관계는 수없이 둔갑했고 우리는 꽤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던 듯 했다. 너는 몸을 뒤틀며 우리의 관계마저 뒤틀려했고 나는…나는….
나는 언제나 너를 더 좋아했다. 너에게 안달난 건 나였고 더 열렬히 더 애타게 당신을 갈망했다. 결국 감정의 산물은 녹슮이라는 것을 그보다 더 잘 알면서도. 너는 내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시선의 문을 꼭꼭 잠그는 당신에게 나는 네 앞에 수줍게 나를 드러냈다. 너는 맨살의 나를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비틀어진 시선아래 나는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
단지 욕심이 좀 더 많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너보다 욕심이 좀 더 많아 너를 좀 더 갖고 싶은 것 일 뿐이라고. 너는 다만 욕심이 덜한것 뿐이라고. 난 그것을 진리로 여겼다. 하지만 되돌아 보고 나니 그는 욕심이 덜한게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네 옆에 있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너도 그 사실을 알았고 그 사실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네 식의 감정표현이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네 옆에 내가 있는 건 당연하지 않다. 그리고 너도 내 옆에 있는 건 당연하지 않다. 다만 너와 내가 사랑할 때만 이루어지는 공식일 뿐. 물렁하게 녹아내렸던 감정이 다른 틀에 맞기 시작하면 더이상 이 공식은 쓸모없어진다.
나는 너에게 감정을 소모당한것 같았다. 나의 청춘을 끌고내렸던 진득한 감정이 전부 다 굳어버렸다. 쭉, 계속 지속될 것 만 같았던 감정싸움은 지루하게 휘슬을 분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너를 생각한다. 너는 모든 걸 부정했다.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고 사랑했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는 것에도 너는 그 사실 마저 부정한다. 너는 웃으며 내 손을 밀어냈고 노련한 네 앞에서 나는 다시 맨살을 까발린듯 했다. 얼굴이 붉어졌고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손이 덜덜 거렸고 나는 네 눈을 보지 못한다. 네 눈을 보는 순간 떨고있는 나를 직시할 수 있었고 나는 완벽하지 못한 내가 싫었다.
사랑을 하면, 사랑이 끝나면 어른이 된다던데 왜 나는 계속 어린아이인 걸까. 나는 늘 자신감이 없었으며 너를 제대로 안지 못했다. 네 앞에서 목소리를 낮춰야 했고 무릎 꿇어야 했다. 나는 언제나 약자였으며 강자일 수 없었다.
나는 빨간 줄이 그어진 성적표를 들고 울먹이고 있다. 내가 내민 어설픈 모든 것을 틀렸다며 거칠게 내치는 네 앞에서 나는 우등생일 수 없었다. 나를 점수를 매기고 날카롭게 내치고. 그 사이에서 내 어깨를 도닥이는 네 앞에서 나는 무기력했다. 혼란스러웠고 어떤 것이 진짜 너였나, 헷갈렸다. 너와 너 사이에서 나는 방황했고 너는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무슨 상관이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나는 당당한 네 되물음에 다시 움츠러들었다.
나는 널 좋아하면 모자란 내가 메워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찬란하고 아름답던 네가 관용을 베풀어 줄것만 같았다. 기대는 날 빗겨갔고 나는 또 울었다. 너는 내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다만 당신을 사랑해 주길 바랬을 뿐. 너는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았다. 내 애정은 너에게 필요치 않은 존재였다. 있으면 좋고 말면 말라지. 그는 나를 비틀어 보았다.
찬란히 빛나던 너의 두 뺨, 자신감에 차 있던 눈동자. 예쁘게 솟은 콧대까지 쌍쌍이 이루어져 완벽했던 네 얼굴. 대칭을 이루며 나를 마비시켜가던 네 얼굴.
난 네가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