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히치하이킹을 할 때는 망사스타킹과 빨간 하이힐이 정석 아닌가요.
"엇! 이게 누구신가! 우리 김병장님 아니야?"
거의 5시간 가까이를 이호원과 피시방에서 롤을 하다가 겨우 7시에 딱 맞춰서 칠성포차에 도착했다. 이미 대인원, 대충 50명 정도가 우글우글 모여있었다. 와 대박 많아. 들어오자마자 나를 발견한 진기가 손을 번쩍 들고는 손을 마구 흔든다. 너무 크게 말한 탓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아 시발 창피해…. 이야! 김성규 병장. 전역했냐? 한 학번 선배-사실은 동갑-가 벌떡 일어나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말이 어깨동무지…. 이정도면 거의 헤드락이다. 으억! 휘청이며 어깨에 걸쳐진 팔을 부여잡았다.
"아. 기껏 무사히 전역했더니 죽이려고 이래?"
"시꺼 임마. 너 오늘 죽었어. 니 소주 5병 미리 빼놨다."
이제 갓 왁스칠이 가능해진 길이의 머리를 마구 문질러 댄 상혁이 내가 앓는 소리를 내자 겨우 손을 뗀다. 얘는 내가 군대 가기 전이나 갔다온 후나 달라진게 없어…. 인상을 쓰고 헝클어진-물론 많이 헝클어지지는 않았지만-머리를 슥슥 정리했다. 박수를 탁탁 치며 이목을 집중시키곤 제 할말을 해대는 상혁의 뒷모습을 보다가 혀를 쯧 찼다. 개과 중에서도 개 혼현을 가진 반류는 이래서 싫어. 지나치게 발발거리고 지나치게 이리저리 나다닌단 말이야…. 상혁의 뒷모습에서 강아지 꼬리가 살랑이는 환상을 보다가 밍기적밍기적 호원과 걸어가 진기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진기가 반갑게 인사를 해오자 고개만 끄덕여 주고는 물을 마셨다. 뭐야 아직 안주도 셋팅 안 한거야?
"야 뭐야. 7시 지난지가 언젠데 아직 아무것도 안나와있어?"
"뭘 지난지가 언제야…. 이제 막 7시 넘었구만…."
내 투덜거리는 말에 진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뭐…. 말이 그렇지 뜻이 그렇냐. 민망한듯 인중을 긁적이다가 괜히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히치하이킹 동아리-이름은 야,타.-인 이 동아리에 왜 이렇게 대인원이 가입한건지…. 이해가 안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동아리 부장인 상혁이 형이 만든 동아리 홍보지-왠 쌔끈한 망사스타킹에 빨간 하이힐을 신은 여자사진과 '히치하이킹, 해보지 않겠는가.'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 외에도 굳이 나열하자면 대학생의 로망 우연한 만남에서 발전하는 인연 따위의 문구가 있다.-를 보면 한 번 쯤 혹할 수는 있다. 나도 그 중 하나였으니까…. 아마 저 신난 새내기들도 학기말이나 학년말이 되면 다 사라지고 없겠지…. 아련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폭 쉬었다. 지금 내 학번도 한…두 명 남았나? 나…. 아 맞다 이진기랑 이호원은 나 보다 한 학번 위구나…. 멍청한 생각을 하다가 테이블에 올라와있는 소주병 하나를 들어 휙휙 흔들었다. 오랜만이구나 소주야.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병을 휘익 돌렸다. 이 아름다운 소용돌이! 김성규 안죽었구만!
"…어? 성규 형?"
아름다운 소용돌이를 보며 혼자 감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이 냄새는…. 타고난, 혹은 후천적인 예민한 감각덕에 한번 맡은 반류의 페로몬 향은 왠만해서는 잘 잊지 않는 덕에 코를 간질이는 냄새가 굉장히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 향은 꽤 취향과 맞기도 했고…. 코를 살짝 씰룩이다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이름이 뭐였더라. 남… 남….
"남씨…?"
"…? 남씨가 맞긴 한데…. 남우현이요. 형 그새 까먹은거예요?"
"아 맞다. 남우현."
동글동글한 얼굴 생김새랑 닮은 동글동글한 발음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던게 떠오르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맞다 남우현…. 내 앞에서 반갑다는 듯 싱글싱글 웃는 우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째 아까 봤을 때 보다 더 기분이 좋아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여전히 파악이 힘든 혼현 탓에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생김새는 완전히 개과인데 풍기는 분위기는 약간 곰…과 같기도 하고. 귀엽고 서글서글한 생김새랑 다르게 풍기는 묘하게 위협적인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중종인건가? 중종…개과면 늑대나 여우? 흐음…. 여전히 앞에서 싱글벙글 웃어대는 우현의 머리를 툭 누르듯 쓰다듬었다. 내 행동에 적잖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우현이 보였지만 난 그저 어느새 채워진 내 앞의 술잔을 들었다. 아 나도 모르겠다…. 뭐든 나한테 민폐만 안 끼치면 되는거지 뭐….
"뭐야 아는사람이야?"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툭 튀어나와 귀에 꽂혔다. 무심한 눈길로 슥 바라보자 나에게 한껏 경계의 페로몬을 뿜어내는 눈이 큰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 위협적인 페로몬…. 나도 모르게 본연의 혼현을 드러낼 뻔 했다…. 그 정도로 위협적인 페로몬을 뿜어내는 사내를 약간 불만스런 표정으로 바라봤다. 남우현 뭐 보호자라도 되나? 하지만 내가 느낀 남우현의 혼현은 보호자가 필요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사내의 페로몬을 못 느낀건지 알고도 그냥 모르는 척 하는건지 여전히 웃는 낯의 남우현이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생활과 건강 같이 듣는 형이야. 2학년인데 복학해서 두 학번 위. 아 참, 재수했다고 했으니까 나이로는 3살 차이겠다."
"…아 그래?"
우현의 부가적인 설명을 듣자 그제서야 위협적인 페로몬을 거두고는 복학해서 내가 몰랐구나 …. 중얼거리다 웃으며 이성열입니다. 하고 손을 내밀어 온다. 여전히 머뜩찮은 표정으로 손을 따라 내밀었다. 김성귭니다. 손을 잡자마자 빼버리고는 남우현을 보며 다른 얘기를 하며 대화의 화제를 돌려버리는 이성열의 옆모습을 가만히 봤다. 치타. 중종이라서 그런가 여과없이 자신의 혼현을 드러내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아직 어리네…. 이렇게 쉽게 자신의 혼현을 드러내는 경우도 참 오랜만이라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어쨋든 별로 엮이고 싶은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귀찮아지고 피곤해 질 것 같달까….
"자자! 오늘은 역사적인 히치하이킹 동아리 '야,타!'의 개강파티 날입니다."
어이없을 정도로 전형적인 멘트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상혁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봤다. 저딴걸 동아리장이라고 놓고 있으니 꼴이 이 모양이지…. 불만스럽게 투덜대는 내 목소리를 들은건지 호원도 같은 생각이라며 끄덕인다. 하긴 이딴 동아리 나가지도 않고 아직 눌러앉아 있는 너랑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다만…. 경종의 개 혼현을 갖고있는 반류의 특성 탓인지 상혁은 유독 목소리를 크게하고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다. 겁이 많은 강아지가 오히려 성격이 더럽고 더 지랄맞은 것과 같은 이치랄까…. 상대방을 무서워하니까 오히려 제 목소리를 크게해서 상대방을 위협하는 본능과도 같은 것…. 이렇게 생각하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상혁이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희 동아리 야,타! 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팔을 과장스레 벌리며 손에 마이크대신 쥔 숟가락을 휘둘러대는 상혁의 모습에 질린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 진짜 저 새끼 쪽팔려 죽겠네….
"자, 일단 히치하이킹이란 무엇인가! 지나가는 차에 편승하면서 하는 도보 여행! 우연에서 피어나는 격정적인 사랑! 그것이 바로 히치하이킹!! 그리고 히치하이킹의 정석! 빨간 하이힐과 망사 스타킹!"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물론 우리 동아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연애는 말 하기 입 아플 정도로 많으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실제 예로 여기는 안 계시지만 저보다 두 학번 위이신 어떤 여선배는. 우리 동아리를 통해 벤츠를 끌고 다니는 멋있는 남성분을 만나 현재 결혼을 하셨습니다!"
…뭔 헛소리야 저게. 그 누나는 히치하이킹으로 만난게 아니라 소개팅으로 만난거잖아….
"그러니 여기 계신 여학우 여러분! 여러분도 벤츠를 끌고 다니는 멋있는 남자를 만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리고 남학우 여러분! 여러분은 김태희같은 여자! 전지현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다 이겁니다!"
저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헛소리들의 향연에 쯔쯔 혀를 찼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이 이야기를 들은 모든 새내기들의 표정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커플이 되는 자신의 모습들을 그리는 건지 눈에서 하트까지 뿅뿅 나올기세인 새내기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근데 남우현 넌 표정이 왜그런데… 너 새내기 아니잖아…. 푸핫. 새내기보다 더 빛나는 눈을 하고서 우왕. 오옹. 따위의 리액션을 해대는 남우현의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아 진짜….
"약간의 참가비, 아 동아리회비는 별도입니다. 하여튼 약간의 참가비만 내신다면 팀을 짜서 학교에서 출발해 목적지까지 약간의 돈만을 지급받아 목적지로 히치하이킹을 해서 오시면 됩니다!"
끅끅 웃어대다가 고개를 슬쩍 돌리자 도도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심드렁한 반응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혼자서 웃고있던게 민망해서 큼큼 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눈을 돌렸음에도 그 남자가 계속 바라보는 것이 느껴지자 괜히 입안이 썼다. 뭐야 왜저렇게 쳐다봐…. 그럼 이제 한 테이블에 함께 앉은 사람들과 간단히 이름을 알아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죠! 건배! 상혁이 신이난듯 제 잔을 들고 크게 외치자 모두 따라 잔을 높이 들며 건배를 외친다. 아 물론 나와 이호원은 시큰둥하게 앉아있었지만.
"안녕하세요. 기계공학 14학번 이성종 이예요."
아까 그 도도한 남자가 여전히 도도한 표정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아 뭐야…. 새내기였나. 커다란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성종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10학번 이호원. 건축학과."
"11학번 김성규. 같은 건축학과."
"13학번 김명수. 산업디자인과요."
"…13학번. 이성열. 연극영화."
"13학번 남우현! 컴퓨터공학과입니다."
차례차례 이름을 얘기하는데 유독 남우현 혼자 방방대는 목소리로 말한다. 샐샐 웃어대는 모양새를 보고있으려니 따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가장 뚱한 목소리로 말하던 이성열은 우현이 웃는 모습을 보더니 안면이 붕괴되는 수준으로 활짝 웃어댄다. 그 둘을 유심히 바라보는 성종의 표정 또한 썩 좋지는 않고.
"그나저나. 13학번은 우리 모르겠구나. 너네 들어왔을때 우린 군대가있어서."
성열과 우현을 향해 말하던 호원이 나를 가리키며 고갤 약간 갸웃한다. 아 하긴. 쟤네가 처음 들어왔을 때면… 작년일테니까 나랑 이호원이 군대에서 달력에 빨간 줄 긋고 있을 때 구나…. 새삼스럽게 나이차이가 느껴진다.
"아 전 13학번이긴 한데 동아리 처음 들어왔습니다."
"어 정말?"
처음이라는 우현의 말에 호원이 놀란 표정이 된다. 얘는 1학년 때 동아리 안하고 뭐했대. 나 역시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우현을 바라봤다.
"너 근데 군대는 안가냐? 군대 가기 전에 1학년때 일반교양도 많이 좀 듣고 동아리도 열심히 하고 그러지."
"아, 전 군대 면제입니다. 개인 사정때문에…."
으흐흐 웃으며 말끝을 흐리는 모습을 보다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한참을 이리저리 발발대던 상혁이 우리 테이블에 와서도 잘 하고 있다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 사라진다. 테이블에 간단한 안주들이 셋팅이 되기 시작하고 가장 먼저 나온 마른안주에서 오징어 다리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성열이 너는. 너도 군대 면제냐?"
"아 저는 면제는 아니고. 이번학기나 다음학기까지는 다니고 군대 가려고요."
"군대…. 일찍 다녀오는게 좋을건데?"
오징어를 씹으며 무심하게 말하자 성열이 이쪽을 보며 눈을 깜빡인다. 자기도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시선을 돌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오뎅탕을 한 숟가락 떠 먹는다. 왜 묘하게 나를 경계하는 느낌이 드는거지….
"근데 다들 왜 굳이 이 동아리…."
"아하하하!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네요!"
질겅대던 오징어를 삼키며 하는 내 말을 끊어내며 엄청나게 큰 소리로 웃으며 들어오는 사람이 우리 테이블에 빈 의자를 끌어오더니 자리를 잡고 앉는다. 고개를 돌려 누군가 봤더니….
"장동우냐. 왜이렇게 늦었어 너."
"어, 동우 형. 왔어?"
"미안미안. 실습이 좀 늦어져서…."
아는 척 해오는 명수의 어깨를 살짝 누르고는 부루퉁 한 목소리로 말하는 호원의 어깨를 쓰다듬듯 껴안은 동우가 지나가던 직원에게 제 몫의 잔을 부탁한다. 호원이 건네는 젓가락을 보다가 닭강정을 가리키자 어이없어하던 호원이 묵묵히 닭강정을 젓가락으로 집에 입 앞까지 대령한다. 이 새끼들이….
"내가 내 앞에서 연애하는 꼴 보이지 말라고 했을텐데. 이호원 장동우."
"에이. 형 부러워서 그래요? 부러우면 형도 애인을 만들면 되지요…."
"…말을 말자 내가."
반성의 기미라고는 보이질 않는 연애버러지를 노려보다가 소주 뚜껑을 열어 잔을 채우려 했다. 에이에이 내 맞은 편에 앉아있던 남우현이 잽싸게 저지하며 소주병을 빼앗아 간다. 자작하면 그 앞사람이 3년 재수없다는데, 저 재수없기 싫습니다. 비죽 웃으며 말하는 우현의 얼굴을 멀거니 보다가 끄덕이며 따라보라는 듯 잔을 내밀었다. 꼴꼴꼴 잔에 술을 채우며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따위의 노래를 흥얼거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표면장벽! 기어코 술잔에 찰랑이게 술을 담은 우현이 병을 탁 내려놓는다.
"저도 한잔 주십쇼."
"오냐. 그래."
교양수업 때는 말을 놓으라고 하긴 했었지만 동아리에서 만난 마당에 남들은 존댓말 쓰는데 혼자 반말을 쓰는것도 이상하다고 생각 한 건지 깍듯하게 존대를 해오는게 썩 맘에 든다. 내려놓았던 병을 들고 우현의 잔도 채워주고는 병을 내려놓자 다른 사람들도 명을 들도 제 맞은편의 잔을 채워준다. 모두의 잔이 채워지고 일단 한 번 건배하자며 잔을 들었다.
"건배!"
모두가 큰 소리로 외치고는 잔을 한 번에 다 비웠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모두 안주를 하나씩 입에 문다. 여전히 질겅질겅 오징어를 씹어대며 남우현 옆에서 계속 살랑대는 성열을 가만히 봤다. 그리고 눈을 살짝 돌리자 우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성종의 모습이 보였다. 오징어를 씹던 입이 점점 느려지다가 우뚝 멈췄다. 이성종. 자신의 혼현을 적당히 감춘 채 이성열과 남우현을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에 문득 소름이 돋았다. 20살이면 아직 어린 나이인데 자신의 혼현을 잘 조절할 줄 도 알고 제법 눈빛도 살아있다. 좀… 조심해야겠는데 쟤는….
"참, 그거 들었어요? 왜 개과 여우 가문에서 우리 또래에 구미호 혼현 가진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 우리 학교 학생이라고 하던데?"
남우현을 뚫을 기세로 노려보던 성종이 갑자기 새로운 화제를 꺼내며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 소문이 도는건가. 구미호? 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성종을 보자 다시 말을 이어나간다.
"근데 소문에 그 구미호가 남자라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너는 신입생이면서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듣는거야?"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명수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은 말이 궁금하다는 표정이지 조금 언짢아 보이기도 했다. 굳이 따지면 자기 종족에 관한 얘기인데 너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맘에 안 드는 눈치이기도 하고. 정작 그 소문에 어느정도 관련된 나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이 떠들든 말든….
"…제가 고양이과라서. 개과 쪽 소문은 알음알음 알고 있어요. 뭐…. 개과랑 고양이과가 사이가 안좋은 탓도 있겠지만요. 별로 그렇게 안좋은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되요."
은연중에 위협적인 페로몬을 뿜어내던 명수가 성종의 말에 페로몬을 거둬낸다. 중종에 가까운 명수가 내뿜는 위협에도 저렇게 눈도 깜짝 안 할 정도다 이거지…. 생각보다 위험한 인물 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덧 빈 병이 쌓여만 가고 술이 약한 편인건지 남우현은 하느작대며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았다. 어엇! 옆에서 휴대폰을 만지작대던 성열이 우현이 쿵 소리를내며 쓰러지자 황급히 우현을 일으켰다. 아 진짜, 야 남우현! 맥을 못추고 계속 하느작대는 우현을 추스른 성열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저는 얘 좀 데려가야되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그럴래? 야 얘 많이 취했나 본데."
"형도 많이 취하신거 같은데."
우현의 상태를 보더니 걱정스레 말한 건 호원이었고 성열의 상태를 보고 은근히 비꼬듯 말한건 성종이었다. 확실히 성열의 상태도 누군가를 챙길 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굳이 내가 나서서 챙겨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가만히 술잔만 붙잡고 눈을 깜빡였다. 성종의 말에 잠깐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성열은 다시 흘러내리려는 우현을 한번 튕겨 제대로 어깨에 팔을 걸치게 하고는 말했다. 데려다 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꾸벅 인사를 한 번 하고는 우현을 데리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봤다. 근데 쟤 남우현 집은 알고 데려다 주는 건가? …아 몰라 알아서 하겠지.
"야 임마! 정신 좀 차려봐."
너는 요즘 먹는 것도 없나. 왜 더 가벼워진거 같냐. 등에 업은 우현을 고쳐업으며 투덜거렸다. 흐음… 으응… 음냐…. 혼자 웅얼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우현의 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 니가 뭘 알겠냐…. 에효!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타박타박 걸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12시가 넘은 시간이라 공기가 좀 차긴 했지만 하늘은 꽤 맑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추운지 내 등을 자꾸 파고들려고 하는 남우현도 썩 마음에 들고….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걸음을 조금 재촉했다. 품을 파고들려는 남우현은 환영이지만 찬 공기에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야 열쇠 어디에있어? 가방에 있어 아니면 주머니야."
거의 다 와가는 남우현의 자취방에 고개를 살짝 돌려 우현에게 물었다. 잠이 든건 지 쌕쌕 대는 소리만 들렸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큰 소리로 믈었다. 역시 돌아오는 건 묵묵부답일 뿐이었지만. 그러니까 내가 비밀번호로 바꾸라니까…. 매번 술 먹고 나한테 업혀오는 주제에 꼭 열쇠를 고집한다. 그러다가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입으로는 쉴새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이 익숙하고 친근한 상황이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자취방 앞에 도착해 우현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으며 볼을 톡 쳤다. 하여튼…. 남우현 넌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살짝 속삭이듯 말하자 흥흥 하는 소리를 내며 우현이 고개를 툭 떨군다. 눈 앞에서 말간 얼굴이 사라지고 까만 정수리만 보이자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우현의 가방과 외투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에 있을텐데…….
"아! 찾았다!"
한참을 뒤적인 끝에 외투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내고는 우현의 자취방 문을 열었다. 익숙한 체향이 확 끼쳐오자 코를 잠시 킁킁거렸다. 흐흠. 오로지 우현의 체향만이 느껴지자 만족스럽게 웃고는 우현을 다시 업었다. 나 없는 사이에 다른 사람을 들이지는 않았나 보네. 우현을 업은 채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우선 우현을 침대에 눕힌 후에 신발을 벗기고는 신발장에 신발을 툭 툭 던졌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우현이 모로 눕자마자 혼현 컨트롤이 잠깐 풀린 건지 귀와 꼬리가 솟아났다. 잠깐 눈을 돌린 사이 생겨난 귀에다가 꼬리에 푸하하 웃음이 터졌다.
"야야. 남팬더. 귀나왔다 귀."
키득키득 웃으며 귀를 툭툭 건드리자 쫑긋거리는 모양새가 웃겨서 다시 한번 뒤로 넘어갈듯 웃었다. 몸을 동글게 웅크리고는 귀를 쫑긋 거리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팬더라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아 하여튼 진짜 귀엽다니까…. 술에 취하면 이렇게 혼현을 드러내버리는 우현을 잘 알기에 우현이 가는 술자리에는 항상 따라가야 했다. 우현의 혼현 자체가 희귀종인 이유도 있었고, 남들에게 이 귀여운 모습을 보이기 싫은 이유도 있었다. 우현의 몸이 서서히 작아지더니 혼현이 완전히 드러나 버렸다. 으흐흐. 나도 모르게 변태같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자 입을 손으로 가리고는 숨이 넘어갈듯 웃어댔다. 아 미치겠다….
"아 왜이렇게 귀엽냐 진짜…."
곤히 잠든 우현을 안아 올리며 실실 웃었다. 품에 쏙 안긴 우현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워 팔에 우현의 고개를 기대게 했다. 큐응…. 입을 살짝 벌리며 신기한 소리를 내는 우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입이 벌어진 사이로 보이는 작은 이빨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자 다시 깊은 잠에 빠진 듯 뒤척이지도 않고 숨을 색색 내쉰다. 술에 약간 잠긴 뇌가 조금 깨어난 기분이 들고 잠든 우현의 머리에 쪽 뽀뽀를 했다. 자장 자장.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부르다가 서서히 목소리가 작아지다가 노래가 뚝 끊겼다.
+1화 감상평 달아주신 네롱님 호이호이님 레이튼님 그외 익명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성실히 달리겠습니다 ㅎㅎ
+암호닉 신청 언제든 환영입니다. 드루와 드루와
+남팬더라고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남렛서팬더입니다. 이성열 너 틀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