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찬디/찬백] 장미에 가시가 있는 이유
written by. 돼지저금통
5. 나 바람났어?
카페 안에 남아 있던 찬열은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이었다. 아까 카페를 나가던 경수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백현은 자신의 앞에서 조잘거리고 있는데, 아까만큼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 지지 않고 있었다. 뭔가 실수라도 한건가? 경수가 왜 화가 난거지. 별로 안친한데 합석을 해서 그런가, 아니면……. 여전히 눈치라고는 밥을 말아 먹은 찬열은 자신의 잘못만 쏙 비켜가서는 엉뚱한데서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선배. 왜그래요?”
“…어? 어?”
“뭘 그렇게 생각해요? 내 말 들었어요?”
“아…. 미안. 경수 걱정돼서….”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와 동시에 살짝 들떠 있었던 백현의 기분도 쳐졌다. 아까 도경수는 쳐다도 안보고 저랑만 얘기 하길래, 좀 넘어온건가 싶었는데 여전히 그대로인가보다. 생각보다 찬열이 경수를 많이 좋아 하는 것 같았다. 이럼 안되는데. 계획이 뒤틀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여태까지의 계산이 한번도 틀린적이 없었던 백현은 괜히 숫가락으로 남은 빙수를 뒤적거렸다.
“경수가 왜 화가 났을까?”
“화난 것 같진 않던데요. 그냥 좀 피곤했나보죠.”
으이구 병신아 너때문인데요. 백현은 여전히 문제의 중점에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는 찬열이 조금 한심해지려고 했다. 아무리 잘생기고, 착하고, 성격 좋고, 내가 꼬시려고 혈안이 되있다지만 정말 너무 눈치 없는 거 아니냐. 잠깐 이 계획을 엎고 모르는 사이로 지내버릴까 생각까지 하게 됐다. 사귀게 되면 속이 터질 것 같다. 물론 그 생각은 오래 가지는 않았다. 백현의 말에 찬열의 얼굴이 좀 펴졌다. 그런가. 혼자 중얼거리다가는 결국 못이기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백현의 기분은 자꾸만 바닥을 뚫고 있었다. 찬열은 백현의 마음을 모르니 당연한거겠지만, 자신의 앞에서 경수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찬열을 보는 것은 백현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걔가 그렇게 좋아요, 선배?”
“응? 경수?”
“네. 우리 학교에도 소문이 자자해요. 첨엔 좀 놀랬는데…, 실제로 게이 보는 건 처음이라서.”
는 무슨 개소리! 백현은 사고를 할 수 있을 때 부터 성정체성을 깨달은 자였다. 그러니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백현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녀도, 남자만 만나 온 것이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찬열은 제법 진지하게 백현의 말을 들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쟨 좀 멍청한 것 같아……. 이제야 백현은 찬열이 눈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멍청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수 예쁘잖아. 눈도 동글동글하고. 일단 웃을때가 너무 좋아. 첫눈에 반했어.”
“아…….”
“나도 원래 평범하게 여자 좋아했었는데 경수 만나고 나서 바뀌었어. 근데 그렇다고 경수 말고는 누가 눈에 들어오는 건 아니고.”
“…….”
그 말에 백현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우물쭈물대며 빙수의 남은 얼음을 와그작 씹었다.
“근데 그러고 보니 넌 그런데에 편견 없나보네. 고맙다.”
그러면서 씩 웃는데 뭐 어떻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찬열에게 편견을 가지고 대할 간 큰 놈은 아마 이 지구상에는 한명도 없을테지만, 찬열의 앞에서 이미지 좋은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인 백현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네- 하고 대답 할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찬열은 이제 그만 나가자며 몸을 일으켰다. 집에 갈때 경수 집에 들렸다가 가야겠다 말하는 찬열에게 백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종인이 지금 이 기회를 잡아 얼른 경수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기를 간절히 기도만 했다.
***
경수는 카페에서 합석을 했던 그 날 이후로 일주일이 흘렀지만 여전히 찬열과 서먹한 상태였다. 물론 그 날 밤 종인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나서 종인의 보호 아래 집에 도착하고 난 뒤, 씻고 나오니 찬열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긴 했다. 어쩔 수 없이 나가서는 찬열과 화해를 하긴 했으나 경수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일단은 그동안 쌓인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찬열은 자기 잘못이 뭔지도 확실히 모르고, 엉뚱한 것을 미안하다고 난리를 피워댔다. 서운한 걸 조잘조잘 말하면 너무 치사해 보일까봐 말도 못하고 경수는 대충 사과를 받아주고 찬열을 돌려 보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덜풀린 기분에 찬열에게 틱틱댈 수 밖에 없었고, 찬열은 한번도 그런 적 없던 경수가 자신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것에 뭐라고 말은 못해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을 아마 누군가에게 상담을 한다면, 그 누군가는 권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요즘 경수의 기분은 매우 안좋았으므로 종인은 함부로 날 선 경수를 건들일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경수가 좋아하는 서울 초코우유에 초코쿠키까지 다섯개를 사다 올려 놨는데 하나도 손을 안댔다. 물론 전처럼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가방에 넣어 두고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곤 그 상태로 점심시간까지 쭉 자더니 결국은 점심 밥도 걸렀던 것이다. 종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찬열과 서먹하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봉산탈춤이 절로 날 정도로 신났으나 저렇게나 마르고 여린 우리 장미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사랑스런 장미가 시들어버릴까봐 종인은 전전긍긍했다.
종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찬열과의 문제가 먼저인 경수는 느린 자신의 카톡에 더 느리게 답장을 하는 찬열에게 또 다시 서운함을 목록에 하나 추가하며 풀이 죽어 있다. 그런 경수의 옆에서 종인보다 더 고생을 하는 것은, 물론 같은 반에 하루종일 함께 있을 수 밖에 없는 종대였다.
“왜 다 죽어가냐 도경수.”
“나 어떡하지, 종대야….”
경수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며 종대의 손을 부둥켜 잡았다. 종대는 경수가 안하던 짓을 하는 것에 깜짝 놀라 손을 뿌리칠… 뻔 했으나 겨우 참아내고 경수의 손을 맞잡았다. 자세히 보니 경수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다. 아놔 박찬열 이 개새끼가. 종대의 이마에 빠직마크가 세개 정도 생겨 난다.
“오늘도 형이 먼저가래…….”
가방까지 다 챙겨 놓고, 그래도 오늘은 찬열이 데려다 주겠지 싶어서 좀 화를 누그러뜨려 볼까 생각했던 경수였다. 그런데 찬열에게서 돌아오는 카톡은. 「경수야 오늘 야자못뺄거같다ㅠㅠ미안해♥집에 조심히가♥」 하트고 나발이고……. 이제 의무적인 하트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저 서럽기만 했다. 기분도 몰라주고, 화 좀 낸다고 지가 먼저 피해버리고. 옛날에 그렇게 쫓아다니던 박찬열은 어디에 있는지 경수는 정말 울고만 싶었다.
“사랑이 식은걸까? 응?”
“에, 에이. 아니야. 고3 이니까 바빠서 그런거겠지.”
“그렇지……?”
그래도 제법 공부하는 ‘척’ 은 해왔던 찬열이기에 맞는 말이긴 했다. 고3 이니까. 대한민국 최고 벼슬인 고3 이니까 이해를 해줘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보고싶고 서운하긴 한 걸 어떡해.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연락도 잘 안하고, 거기다가 저번엔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허여멀건한 개새끼랑…! 다시 백현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경수는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종인에 이어 찬열까지! 전생에 분명 원수였을거야. 경수는 막연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백현에 대한 중오심을 불태웠다.
“그래도 옛날에는 야자도 째고 일주일에 적어도 세번은 같이 가줬는데…….”
휴, 아냐. 생각하지 말자. 억지로 머릿속을 점령하려 드는 과거의 기억들을 미뤄두고 경수는 집으로 가기 위해 가방을 맸다. 종대도 가방을 매고 따라 일어서려는데, 예상치도 못한 복병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경수야! 같이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모든일의 원흉, 김종인! 경수는 눈을 세모낳게 뜨며 평소보다 더 앙칼진 목소리로, 「즐!」 하고 교실이 떠나가라 외쳤다. 야자가 끝나자 마자 득달같이 경수의 반 앞으로 달려온 김종인은 첫마디부터 욕을 쳐먹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쪼개면서 경수와 종대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 모습을 멀찍히서 똥 씹은 표정으로 쳐다보며 병신이라고 중얼거리는 세훈만이 모든 수만고 2학년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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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왜 자꾸 졸졸 따라와.”
종대는 집이 가까워서 먼저 들어 간지 오래고 혼자 남아 걷고 있던 경수는 자꾸 뒤에 졸졸 따라오는 종인이 거슬렸다. 옆에 와서 걷는 것도 아니고 무슨 스토킹 하는 것 마냥 뒤에서 살금살금. 결국 참다 못해 그 자리에 딱 멈춰서선 뒤를 돌아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니까 그제서야 어둠속에서 종인이 모습을 들어낸다. 싱글싱글 웃는게 그렇게 얄미울수가 없다. 누구땜에 이렇게 기분이 안좋은데. 물론 그 날 카페에서 경수를 구해 준 것도 종인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일로 용서하기엔 이미 종인이 저지른 죄가 너무나도 크다.
“너 밤중에 위험하잖아.”
“나도 남자거든-!”
“그래도 위험해.”
제법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고 말하는데 그 모습이 장난끼만 가득하던 평소와는 달라 경수가 흠칫 놀랐다. 아 맞다. 원래 김종인은 양아치였지. 하도 자신을 따라다니고 귀찮게 굴어서 그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너 내가 그렇게 좋냐?”
“엉. 당연.”
집이 곧 다가오는데 둘은 길거리에 멈춰서서 그렇게 영양가 없는 대화만 주고 받고 있다. 어차피 찬열에게서는 답장도 없고. 이렇게 된 김에 김종인이랑 진심 담은 이야기나 좀 해보자, 이런 마음이었다.
“왜 좋은데, 내가?”
너는 집도 잘 살고, 얼굴도 잘생겨서 인기도 많고, 공부도 꽤 괜찮게 하고, 싸움도 잘해서 따라다니는 애들도 많은데. 그런 니가 뭐가 부족하다고 날 좋아하는 걸까. 경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찬열이야 저도 좋아하니까 그렇다쳐도 이렇게까지 싸가지 없게 대하고 밀어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진하는 종인이 신기했다. 귀찮고 질리고 싫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좀 고맙고 미안한 맘이 남아 있었다. 도경수가 아예 못된 애는 아닌 것이다.
“그냥.”
“…그게 뭐야.”
“너는 장미같아. 뾰족하게 가시 세우는게… 섹시해.”
그리고 귀여워. 죽겠다 진짜.
풀린 눈으로 말하는 종인이 마치 변태처럼 보였다. 경수는 얼굴이 확 붉어져서 야이 미친놈아! 하고 소리를 빽 지르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다짜고짜 던졌다. 너무 당황해버린 탓이다.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폰을 여유롭게 받아 낸 종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경수를 향해 한걸음 다가섰다. 저새끼 뭐야……. 경수는 겁에 질려서 질색팔색을 하며 팔을 휘젓기 시작한다.
“ㅇ, 야! 오지마! 지, 진정해!”
“왜그래 경수야. 폰 줄게.”
장난 좀 치고 싶은 마음도 있고. 경수가 너무 귀여워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겁을 주면서 다가간 종인은 어느덧 경수와 한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가까이 서있다. 경수의 섬유유연제 향 같기도 하고, 로션 향 같기도 한 것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어째서 당신은 흔한 사내놈들의 땀냄새도 나지 않는 건가요……. 종인은 진심으로 경수를 찬양했다. 경수는 세상에 태어난 인간중에 가장 완벽하고 고귀한 인간임이 분명했다. 종인은 경수에게 취해 좀 더 얼굴을 들이 밀었다. 이제 경수와는,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야 이 미친 변태새끼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경수가 귀까지 빨개져선 종인의 얼굴을 퍽- 하고 밀어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간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종인은 손에 쥐고 있던 경수의 폰을 놓치고 말았고,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폰을 쥐고 경수는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 씨…. 뛰는 것도 쪽팔렸다. 얼굴이 가까이 올 때 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도 쪽팔렸다. 미친거다. 미친거야. 그냥 박찬열이랑 사이가 안좋아서 잠깐 미친거야……. 잠시나마 가슴이 설렐랑 말랑 했던 자신을 부정하며, 경수는 눈을 질끈 감고 미친듯이 달리기만 했다.
한편, 얼굴을 맞고 혼자 덩그러니 골목에 남겨진 김종인은 스스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자해를 했다. 아, 분위기 잘 풀리고 있었는데. 오래간만에 경수가 먼저 말도 걸어 줬는데…… 이런 굴러 들어온 금쪽같은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버려 멋지게 골까지 넣어 버린 스스로가 그렇게 증오스러울수가 없는 종인이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어찌 하겠는가. 종인은 자신의 앞에서 파르르 떨리던 경수의 긴 속눈썹을 생각하며 속으로 눈물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
찬열은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백현과 만나 놀았다. 딱히 약속을 잡고 그런 건 아니었고, 찬열이 10시에 야자를 마치고 나오는데 찬열의 학교 근처에 사는 백현과 마침 딱 마주친 것이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그 이후로도 백현과 자주 마주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자연스레 만나고 있더라. 딱히 별다른 걸 하고 노는건 아니었다. 찬열의 아지트인 동네 공원에서 놀거나 아님 가끔 찬열이 술마시러 가는데 백현이 따라와 앞에 있어 주기도 하고 그랬다. 요새들어 경수와의 사이가 멀어진 것 같은데다 그 이유에서인지 공부도 잘 안돼서 찬열의 속은 말이 아니었고, 백현은 그 옆에서 묵묵히 찬열의 신세한탄을 들어줬다. 찬열은 진심으로 백현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찬열은 경수와의 카톡 대화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반대편에는 백현이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고 다리를 달랑거리며 앉아 있다. 왜그래요, 형? 어느새 호칭이 편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찬열은 지금 전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확실히 카페에서 그렇게 경수가 나가고 난 뒤로, 사이가 서먹해져 있었다. 그 날 바로 집 앞으로 찾아가 너 어색한데 거기에 합석을 했다고 내가 죽일놈이라고 빌고 빌어서 어째저째 사과를 하기는 했다만 경수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건지 아직도 화를 풀지 않고 있었다. 첨엔 찬열도 잘해보려고 애교도 부리고 별 수를 다해봤는데, 경수는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고 가뜩이나 그런데 또 잘 만날수도 없으니까, 찬열은 이제 점점 화가 난 경수가 어려워지고 피하고 싶어지게 된 것이다.
오늘의 카톡도 오십개를 못넘었다. 일어나서 잘잤어? 학교 잘갔어? 수업 지루하다, 점심 먹었어? 저녁 먹었어? 그리고는…… 오늘도 야자 못 뺄 것 같아. 그 말에 답장도 오지 않는 경수가 신경 쓰여서 찬열은 제대로 야자도 못했다.
“아직도 그래요?”
“어? 어….”
입맛을 쩝 다시며 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지금쯤이면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여태 답장이 없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만 먼저 연락을 하긴 또 무서웠다. 또 어떤 까칠한 답장이 날아올까. 그것이 요새 찬열이 경수에게 한시간에 60개씩 하던 카톡을 한두개씩 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뭐가 그렇게 화난거지?”
“그러지 말고 그냥 시원하게 물어보죠. 뭐가 그렇게 화났냐고.”
백현은 심드렁한 말투로 충고하며 남은 아이스크림을 모두 입에 털어넣었다. 아 흘렸어. 턱에 빵꾸가 난건지 목까지 진득하게 타고 내려오는 아이스크림이 백현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집어 던지며 백현이 툴툴댄다. 생긴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꼼꼼한 성격을 가진 찬열이 혀를 쯧쯧 차며 가방에서 물티슈를 찾아 백현에게 건냈다.
“조심 좀 하지.”
“흐허허….”
백현은 털털하게 웃으며 물티슈를 받아 들어 목을 닦았다. 여전히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아까보단 나았다. 아까의 쓰레기에 이어 물티슈 마저도 죄책감 없이 바닥에다 내던지며 백현은 골똘히 수를 생각했다. 분명히 이때가 기회기는 했다. 찬열은 경수를 어려워하고, 경수는 화가 안풀려서 찬열에게 틱틱대고. 누가 보기에도 권태기인 상황에, (자의가 아니라 김종인과 변백현의 타의이기는 했지만) 가뜩이나 찬열은 지금 자신에게 의지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저쪽 상황도 보나마나. 도경수 마음 심란한데에 김종인 알아서 불 잘 지피고 있을테니 분명 지금이 기회는 확실한데. 대체 결정타를 날려 줄만한 것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쐐기를 박을 수 있을까? 백현은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에휴. 그래도 너랑 있음 맘이 좀 편하다, 백현아. 이런거 들어줘서 항상 고마워.”
“…고마워요?”
그 때였다. 고맙다는 말에 백현의 머리에 기막힌 수가 번뜩 스쳐지나간 것이다. 백현은 무릎을 치면서 유레카! 하려다가 맞은편에는 시무룩한 찬열이 앉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억지로 참았다. 아싸! 조금만 기다려요 형. 내 옆에서 맨날 웃게 해줄게.
“그럼 낼 밥 사주면 안돼요?”
“…엉?”
“낼 야자 째고 밥 사줘요.”
형 야자 잘짼다면서요. 백현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랬다. 찬열은 얘가 갑자기 뭐라는거지, 어벙벙 하면서도 일단은 고맙다 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고마운 것도 맞았기 때문에 뭐라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경수가 찝찝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야자 하루 빼고 노는 건데 싶어서, 그냥 시원하게 알겠다고 해버렸다. 백현은 밥 한끼 얻어 먹는 건데도 뭐가 그렇게 기쁜지 길길이 날뛰고 난리가 났다. 찬열은 신난 백현을 향해 웃어주면서도 주머니에 들어있는 폰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기분이 매우 이상하고 찝찝한 밤이었으나 눈치는 개나 줘버린 박찬열은 뒷 일은 생각도 못한 채 백현의 장단에 맞추어 결국은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읽어 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해요♡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덕에 힘내서 글쓰네용♡ 감사합니당 ㅎㅎ 카디 찬백한 하루되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