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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국 (쌍력 420)
기원전 이월국록 제 백서른두장을 살펴보자면
두 개의 달이 뜨는 밤. 온 나라가 환하게 빛나며 새로운 시대가 올것이니.
그것을 축복이라 여기는 자, 연명할 것이오. 망조라 여기는 자, 두 눈을 감으리라.
그 중심에 하얗고 아직 만개하지 못한 꽃이 서있으니 이 꽃을 잘 보살피라.
새로 오른 왕의 보살핌은 신하들의 선택과 백성들의 믿음에 달려있을지어다.
두 개의 달이 뜨는 밤 (Two moons)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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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소복.
누가 그랬어.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면 모든 것을 가진 듯 하다가고. 근데 쉽지가 않아. 눈을 언제 밟아야하나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잠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야. 눈꼬리를 휘게 웃으며 앞에 앉은 소년이 흰 눈 위를 뛰어다니며 하는 말에 작은
손을 펼쳤다. 그런데 네옆에 있으니 이렇게 금세 밟을 수 있게 됐어. 여전히 눈꼬리를 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민다. 잡으라
는 걸까..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내 손을 피해가는 듯한 기분에 기분이 좋지 않다. 멀뚱히 내밀어진 손과 눈송이 그 어느것도
잡아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나에게 노력이란건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소년이 기어코 내손을 덥썩 잡는다.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 손을 감싸쥐지도 않았다. 그저 네가 잡은 것일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시위하는 듯이. 소년도 그것을 아는지 더이상 왈가불가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발자국을 내며 사뿐
히 걷는다. 그 위로 겨울새 한마리가 지나간다. 저 새도 혼자이구나. 하지만 나보다는 훨씬 자유로워 보인다. 가만히 멈춰 고
개를 들어 날아가는 새를 보고 있으니 곧 소년도 멈춰 고개를 들어 새를 본다. 다시 재잘재잘 얘기하던 소년이 어느새 입을 꾹
다문채 한동안 새만 바라본다. 또 시작이다. 항상 새만 보면 몇분간 말없이 저러고 있는다. 오늘은 좀 다르게 소년은 새를 보
다가 입을 열었다.
"ㅇㅇㅇ."
"?"
"나는 새가 될거야."
"새?"
"응, 새. 새는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까."
"어디에 가고 싶은데?"
"지금은 없어. 네 옆에 있으니까"
소년의 말에 피식 웃었다. 변백현. 참으로 부러운 아이다. 말도 안되는 꿈을 가지고서도 저렇게 예쁘게 웃으니까. 그에비해 난
... 그저 할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만하는 한낱 종이인형에 불과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더욱 차게 느껴진다.
그래. 난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해...
"나 가야겠다."
"벌써?"
"할아버님이 찾으실꺼야."
"내가 잡아도 넌 가야겠지...?"
"백현아."
"아니야, 얼른 가자."
조심스레 묻더니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먼저 앞서 걷는 변백현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그래, 넌 이상하겠지. 할아버지라
면 벌벌 떠는 내 모습이. 솔직히 나도 언제부터 이랬는지 모른다. 어쩌면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이렇게 살아야할 운명이었을지
도... 작게 한숨을 쉬고 변백현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걸음을 맞춰 내 옆에 선 변백현이 머뭇거리다가 다시 손을 잡아온다.
비슷한 가문에서 같은 해에 태어나 모든 것을 함께해왔던 변백현과 나는 오늘도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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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
"어, 어르신!"
"백현이, 넌 어서 돌아가거라."
"하지만..."
"어허."
"... 안녕히계십시오."
문을 들어서자마자 날아온 따귀에 볼이 뜨겁다. 변백현이 놀라 소리쳤지만 할아버지가 단호히 변백현에게 물러가라 이른다.
결국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변백현이 볼을 감싸고 있던 나를 본다. 보지마.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나에겐 당연한 일이니까 제
발 그렇게 안타깝게 보지마. 입술을 질끈 깨물어 입에 피가 주륵 흐른다. 대문이 닫히고 할아버지가 또다시 팔을 들어 내 뺨을
내리친다. 눈이 핑 도는 것이 아까보다 훨씬 화끈거린다.
"뭐하다 이제 온게냐."
"..."
"대답하지 않고 뭣하느냐."
"..."
"이런 답답한 것 같으니라고. 내 白家 장자와 가까이 하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어찌 매일같이 붙어다니는게냐."
"... 오랜 벗입니다.."
"그 입 다물라!"
......... 어쩌라는건지. 입 다물고 있으면 대답하라 성화이고, 대답하면 또 입다물라 다그치면 저는 어찌해야합니까. 답답함
에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애써 꾹꾹 눌러 삼킨다. 결국 망부석처럼 서있으면서 한시간가량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조금이라
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꼬투리를 잡으니 손가락 하나 꿈쩍 못하고 있다가 다리를 절며 방으로 들어와 경대를 바라보니 양쪽 볼
이 퉁퉁 부어 욱씬거린다. 겨우 가라앉혀놨더니 하루를 못가 다시 부어오르는구나...
"... 아버지..."
항상 건너편 방에서 들려오던 서책을 읽는 소리가 더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벌써 2년이 지났구나... 그 후로 더 거세진 할아버
지의 호통도 이제 익숙해져만 간다. 하지만 밤마다 찾아오는 정적은 아직도 어색하다. 창문을 열어 보이는 궁을 멍하니 바라보
니 그 때의 기억이 더욱 생생해져만 간다. 우욱- 하루종일 먹은 것도 없는데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헛구역질이 나오기 시작해
더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창문을 굳게 닫았다.
2년전...
"아버지~!"
"오냐, 우리 ㅇㅇ."
그때만해도 큰소리도 잘 냈지. 밝게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가 안겼다. 아버지도 환하게 반겨주시며 번쩍 안아들어주셨다. 옆에
서 다 큰 처녀를 남사스럽게 안아든다며 어머니께서 나무라셨지만 아버지는 내 딸 내가 안겠다는데 누가 뭐라하는가?며 허허,
호쾌하게 웃으셨다. 그럼 나도 꺄르르 웃으며 아버지가 최고라며 좋아라했지. 나는 우리집 앞에 있던 평상을 좋아했다. 아버지
, 어머니와 옹기종기 앉아 봄이면 가득 피는 벚꽃을 구경하고, 여름이면 시원하게 우는 매미소리를 경청하고, 가을이면 낙엽을
주워다 아버지 책자의 끼우면서 놀았다. 그러다가 놀러온 변백현까지 끼면 정신없이 웃느라 하루가 지나가고 했다.
하지만 그 날은 그 평상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항상 그 위에서 웃고 계셨는데... 그 날엔 피를 잔뜩 흘리시며 축 쓰러져계
시던 모습과 삽시간에 평상 위로 퍼지는 피의 얼룩에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앉아 덜덜 떨기만 했다. 아버지를 붙잡고 울지도 부
르지도 못하고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아버지를 무참히 벤 그 문장. 나도 알고있는 문장이었다. 왕가의 호위무사를 대
대로 배출시켜낸 그림자가문의 표식... 저들은 철저하게 왕가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가문이라 알고있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
은 왕가의 뜻... 누구라도 막지 못했을 죽음이었다.
하필이면 왜 내앞에서였을까... 차라리 그때 그 장면만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감정이 메말라버리진 않았을텐데... 이렇
게까지 왕가를 증오하지 않았을텐데... 그런 장면을 봐도 눈 하나 꿈뻑하지 않을 할아버지 앞이었으면 나는 이렇게 되지 않았
을텐데... 어느새 이런 못된 생각까지 미친다.
"아가씨~!!"
"..?"
"아가씨~ 안에 계셔요?"
"무슨일이야?"
"대감어른께서 찾으셔요!!"
".. 할아버지께서...?"
"예에~ 얼른 가보셔요!"
"..."
이제 하다하다 종까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나를 보며 웃는 웃음이 내가 이번엔 또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깨지려나 궁금해하는
것 같아. 입에서 느껴지는 쓴맛에 인상을 찡그리다 앞에서 재촉하는 바람에 그마저도 제대로 못하고 할아버지 방으로 달려갔다
. 정말 들어가기 싫은 곳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도 꿋꿋하게 저 방을 지키고 있었던 할아버지다. 저기에 신줏단지라도
모셔놓은 걸까. 어찌 아들이 세상을 떠나는데 얼굴 한번 안내비출수 있는지... 할아버지가 과연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간다.
"할아버님. ㅇㅇ입니다."
"들거라."
"..."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아 칼을 닦는 모습에 헛바람이 나올뻔했다. 칼을 자식이라도 되는 마냥 애지중지 닦는 모습이 우습기만하
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높낮이도 없는 어조로 물으니 똑같은 어조로 대답이 돌아온다. 기다리거라. 하... 가만히 앉아서
칼 닦는 모습을 보라고 부르셨습니까. 어처구니가 도무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속에서만 맴돌 뿐 잠자코 앉
아 기다릴뿐이다. 스르릉, 혹시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조심 칼집에 껴넣은 할아버지가 그제야 나에게 시선을 준다. 하지만 전혀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시선이다. 차라리 동네 개가 나를 보는 눈빛이 더 친근하겠어.
"네 나이가 이제 몇이더냐."
"... 열일곱이옵니다."
"이제 시집을 가도 충분한 나이지."
"..."
"마침 전하께서 너를 궁금해하시더구나."
"...!"
"내일 오시(午時)에 궁에 입궐하여라."
"..."
"왜 대답이 없는게냐."
"... 꼭 가야만 합니까."
"가기 싫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 맞습니다."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앞에서 내 뜻을 표출한 것은. 할아버지의 눈썹이 일렁거린다.
"뭐라?"
"..."
"못들은 것으로 하겠다. 내일 시간 맞춰 입궐하거라."
"... 네, 알겠습니다."
결국 또 할아버지의 뜻대로다. 시집얘기를 하면서 어째서 궁에 입궐하라는건지. 설마... 한가지 생각이 문득 떠오르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그곳으로 보낼리가 없다.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나를 평생 궁에 들여놓을리 없지. 그렇고말고.
소식을 전해들은 종들은 한껏 들떠 나를 어떻게 꾸밀지 얘기하느라 벌써부터 시끄럽다. 머리가 지끈거려... 내가 살면서 궁에
들어갈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다시 속이 미식거리며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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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난 눈을 뜨지도 않았는데 종들이 방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닌다. 이제 방을 출입하는데 내 허락은 필요도 없나보다.
부시시한채 일어나니 종들이 얼른 일어나지 않고 뭐하냐며 오히려 타박을 한다. 기가 막히다. 나를 탕에 밀어넣고 구석구석 닦
더니 이젠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다. 아가씨는 워낙 고와서 많이 안바르셔도 되겠어요. 말은 이러면서 벌써 몇겹이냐... 흩날리
는 분가루에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기똥차게 알아차려 코를 막아버리는 계집에 죽을 맛이다.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하는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일사분란했던 손이 멈추고 경대를 비춘다. 화장 덕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붙은 얼굴이 보인다. 가만히
거울만 내려보고 있으니 계집이 한숨을 푹 내쉰다. 모처럼 실력발휘했는데 좀 더 좋아해보라는 말에도 멀뚱히 바라보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대체 뭘 원한거야...
"시간 다 됐으니 이제 가마에 올라타셔요."
"..."
말없이 가마에 올라탔다. 이제 종들 사이에는 내가 종들을 무시하여 말도 섞지 않는다는 헛소문까지 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연유는 아니지만 바로 잡을 생각은 없다. 그로인해 그들과 말을 해야하는 것이 싫었다. 가마가 덜컹거리더니 움직이기 시작한
다. 정말 가고싶지 않은 궁으로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가마가 내려가는 느낌에 옆 창을 여니 높은 궐
문이 보인다. 이제는 내 두발로 직접 걸어야만 한다. 다리 힘이 풀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유모의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서 내
리기가 무섭게 유모가 주의사항을 전달한다. 하나같이 딱딱한 말들이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전언이겠지. 말하는 유모의 표정도
할아버지의 판박이다. 종 교육 하나는 제대로 시켰다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따라나서지 못하니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
역시나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여전히 불안하다는 표정이지만 지가 어쩌겠어. 그대로 유모에게 등을 돌려 궐문을 지나쳤다.
달의 가문의 여식이라는 호패 하나로 너무도 쉽게 문을 열어준다. 달의 가문이라서일까 그 가문의 수장이 좌의정이기 때문일까
. 궁금하지도 않은 궁금증이 일었으나 인사하는 문지기들을 쌩하니 지나쳤다. 궐문이 닫히고 가만히 문앞에 서서 궁 안을 둘러
보았다. 문 하나 사이로 너무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 시장통에 비해 이 안은 너무도 평화롭다. 가
장 낮은 계급조차 볼록 튀어나온 배를 쓸어내리며 웃는 모습이 너무도 이질적이다. 근데... 여긴 어디지...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 걷다보니 이상한 곳으로 온 모양이다. 눈앞에는 숲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들어가도 되려나...? 이미 길을 잃어버린거 어
디론가 걷다보면 다시 길이 나오겠지. 간단하게 생각하며 숲안으로 발을 들였다.
정말 울창한 숲이다. 사락사락 흔들리는 나뭇잎소리가 귓속을 가득 매꾼다. 그때 유독 한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들려온다. 뭐지? 옆에 고개를 돌려보니 잎사이로 얼굴하나가 불쑥 튀어나온다. ...!!!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굳어서 얼굴을 빤
히 바라보고 있으니 얼굴의 주인이 몸을 쑥 일으켜 옷에 붙은 잎들을 툭툭 털어낸다. 너무도 태연하게...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던거지... 옷을 보니 어디 귀한 양반자제같은데 궁궐에서 이렇게 돌아다닐 정도면 꽤나 높은 집의 자제인가보다. 사내가 뚱
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도 아마 그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꼬리가 아무 표정없이
나를 보고 있는데 오히려 차분해지는 느낌. 역시 저런 표정에는 익숙해진 모양이다.
"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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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는 가져왔는데 2화는 언제올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평가하기에 글이 적다고 판단해서 1화를 가지고 왔어요.
미개한 글에 댓글이 5개나 달리다니... 사랑해요♥
확실히 글은 댓글 달리는 재미로 씁니다. (구걸)
개인적으로 사극물을 좋아해 자급자족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열심히 쓰다가 많이 다듬어지면 또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