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열] 아지랑이 w.블리스엘 *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뙤약볕에 선 명수는 땀을 한바탕 흘렸다. 후, 더워 죽겠네. 손을 들어 부채질을 해보았지만 소용없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 멀리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네!"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답한 명수는 걸음을 재촉했다. - "모히또 한 잔 주세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 얼굴이 생기가 돋아 보였다. 누군 더워죽겠는데. 투덜투덜. 속으로만 생각하며 모히또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자친구가 기다리는지 연신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힐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니, 귀엽다. 남자치고 큰 눈에 오목조목 작은 얼굴. 어떻게 저기에 눈, 코, 입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뜨고 감상하다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모히또를 들이밀었다. "여기요." "얼마에요?" "삼천 원이요." 그러자 생글생글 웃으며 지폐를 꺼낸다. 아까부터 뭐가 그리 좋은지 아주 안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신 나 보여서 부럽네요. "안녕히 가세요." * 해운대 근처 작은 바에서 일한 지도 어언 3년째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해운대 근처에 위치한 우리 바는 여자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 조금 그렇지만, 아무래도 내 외모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재수 없게 느껴질지는 몰라도 정말이다. 아, 짜증 내지 마요. 우리 사장님이 직접 말해줬으니까. 아무튼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여자 손님들 중 내 스타일은 찾아볼 수 없다. 왜냐? 난 게이니까. 고등학생 땐 그럭저럭 여자친구도 사귀어 봤다. 하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 깨달았다. 내 성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엔 믿기 힘들었으나 난 꽤나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뭐,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거지. 매사에 진지하지 못한 난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남자를 사귀어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를 만나 지도 않았다. 가끔 사장님이 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말했다. '명수야, 여자 안 만나?' '네. 관심 없어요.' 그때마다 사장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곤 했다. 그래, 뭐. 좋을 대로 해. 그러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날도 어김없이 더웠다. 한 여름에 일하기란 정말 고역이었다. 줄줄 흐르는 땀을 슥 닦다가 문득 창밖의 바다를 보았다. 파란 물결이 출렁거리고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바다는 아름다웠다. 잠깐 바람이라도 쐴까 하는 심보로 가게 밖으로 나갔다. 모래사장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고 있노라니 머리가 다 아파왔다. 흐음….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키가 멀대같이 큰 남자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꽤 먼 거리에서 보아도 그 남자는 키가 컸다. 나도 어딜 가서 꿀리는 키는 아닌데….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멍하니 바라보다 걸음을 재촉해 가게로 갔다. 흐르는 땀을 슥 닦아내고 카운터 앞에 섰다. 그러자 남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모히또를 주문했다. 동그랗지만 살짝 처진 눈을 한 남자는 귀여운 인상이었다. 주문을 마친 그는 연신 손목에 매단 시계를 쳐다보았다. 어디 급한가? "드시고 가실 건가요?" "아뇨." "여기요." "얼마에요?" "삼천 원이요." 살짝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갔다. 돈을 지불하고 모히또를 받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더운날에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는 그의 얼굴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그의 얼굴이 한번 더 보고싶었다. - 후하후하. 모히또잔을 든 성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 들켰겠지? 나 표정관리 잘 했겠지? 곧바로 차안으로 들어와 운전석에 앉은 성열은 컵 홀더에 모히또를 끼워넣었다. 땀이 베어난 손을 바지에 슥 닦았다. 어후, 심장떨려.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바라봤던 그의 모습이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성열은 버릇처럼 제 손목에 찬 시계를 쳐다봤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제 가슴을 쾅쾅 쳤다. 그리고는 빨대를 꽂은 모히또를 쭉 들이켰다. 시큼한 맛에 눈을 한번 찡그리고는 백미러를 통해 제 모습을 보았다. 살짝 달아오른 제 볼을 쭉 잡아당겼다. 남자가 이렇게 소심해서는, 응? 애꿎은 볼을 잡아당기며 자책하는 성열이였다. - 피곤한 하루였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옷을 휙휙 벗어 던지고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찬물로 세수를 하는데 아까 봤던 귀여운 얼굴을 한 그가 생각났다.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고는 샤워기를 틀어 머리를 적셨다. - 영화를 한편 본 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내일도 그를 볼 수 있길 바라며. 팔을 들어 이마에 내려놓았다. 모처럼 기분 좋게 잠에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어제 봤던 그가 서있었다. 이번엔 나도 반갑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쳐다봤다. 멋쩍게 웃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이번에도 모히또를 주문했다. 시큼한거 좋아하나보네. 식초 좋아하려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 나를 눈으로 쫓는 그가 보였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눈도 채 깜박이지 않고 쳐다본다. 그 모습이 귀여워 풉 하고 웃자 그가 눈을 깜박거린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다듬고 그에게 모히또를 건냈다. "삼천원 맞죠?" 그리고는 지갑에서 천원짜리 지폐 세장을 꺼내 건냈다. 지폐를 받으며 손가락 끝이 살짝 스쳤다. 스친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그가 나가고 난 손가락을 만져보았다. 받은 돈을 카운터에 집어넣는데 흰색 종이가 보였다. 의아해 하며 종이를 꺼내니 명함이였다. 정갈한 글씨체로 이름 석자가 쓰여있었다. '이성열.' 그의 이름이 이성열인가 보다. 그를 닮아 동글동글한 이름이다. 자세히 보니 이름 옆에 조그맣게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열한자리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들어 본능적으로 그 숫자들을 저장했다. - "…전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진 명수다. 초록색의 발신 아이콘 위로 몇번이나 손가락이 배회했다. 이내 벌떡 일어나 마음을 가다듬은 명수는 몇번이나 중얼거리다 용기내어 전화를 걸었다. 안 받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몇번이나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어, 받았다. "여보세요." '…….' "저 그 엘르 바…" '아, 네!' 약간 하이톤인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웃음이 다 났다. 명수는 주체할 수 없이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명함…주고 가셔서." '아, 그게 말이죠….' 당황한듯한 그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사실 그쪽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요. 다짜고짜 드리긴 뭐 해서, 그래서 그냥 돈이랑 같이 줬어요.' 사실대로 보고하는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정말요?" '네….' 힘 없이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답하는 명수의 목소리가 들떴다. "사실 나도 그래요." '…….' "나도 댁이랑 친해지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명수가 황급히 말했다. "내일도 와요, 올거죠?" '…….' "얼른 답해요. 안 그러면 전화 끊을거야." '알겠어, 알겠어요! 갈게요.' 명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입술을 깨문 명수의 눈이 반짝거렸다. 저 멀리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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