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안에서
w. Harvey
탁탁탁, 곁을 스쳐가는 소년의 발소리에서 다급함이 묻어난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니 7시 28분. 어차피 지각인데 왜 뛰어 가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이상한 나라다. 왜 학생들은 정규 수업 시간도 아닌 꼭두새벽에 등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학교를 향해 천천히 걸으며 잠시 쓸데없는 고민도 해 보았다.
눈이 뻑뻑하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다. 어제 밤엔 아버지가 회식이라는 말에 긴장이 풀어져 문도 안 잠그고 일렉 기타 연습을 하다가 제대로 걸려서 좀 맞았다. 나라만 이상한 게 아니라 어른들도 이상하다. 왜 꿈보다 공부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점점 교문이 가까워졌다. 벌써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선도부 학생들은 지각생들의 학생수첩을 걷고 있다. 밥 먹듯이 지각을 하는 탓에 늘 보는 익숙한 장면.
김종현이 집 앞에서 전화로 깨워주긴 했는데,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어서 그냥 먼저 가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다가 더 맞고 열 받아서 방에 틀어박혀 울었더니, 아침부터 몸이 뻐근한 것이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생수첩 주세요, 선배님."
내가 교문을 들어서자 2학년으로 보이는 선도부원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멀뚱히 소년을 바라보며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됐어, 내가 할게."
왔다, 나의 기사……. 나는 소년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이내 종현이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제야 주머니를 뒤적여, 지저분한 글씨로 '이진기'가 적힌 남색 학생수첩을 꺼내 종현에게 내밀었다. 종현이 수첩을 받아들며 흘깃 나를 응시했다. 검고 크고 정직한 눈동자. 눈이 마주쳐 싱긋 웃어 보였다.
김종현, 이 녀석은 선도부원에 학급실장, 학생회장까지 감투가 화려하기도 하다. 내게는 전부 관심 없는 성가신 것들. 귀찮게 그런 거 왜 하냐는 내 질문에 종현은 ‘너를 건사하려면 별 수 없다’는 기묘한 대답을 했다.
"입술 왜 그래?"
"맞았어."
"너희 아버지?"
나는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현의 시선이 다시 수첩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정직한 검은 펜은 아무 것도 적지 않는다. 나만의 특권……. 슬며시 웃음이 난다.
"눈 부었어."
"알아."
"울었냐?"
"조금."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간단명료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에.
"자."
"고마워."
종현이 내민 수첩을 받아드는데 좀 전에 수첩을 달라던 2학년 후배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녀석에게 또 씨익 웃어 주고는 몸을 돌렸다. 교사를 향해 걸으며 수첩을 뒤적여보았다. 지각을 안 하는 날이 드물 정도지만 벌점은 0점, 수첩은 깨끗하다. 잘난 김종현을 친구로 둔 덕분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괜스레 웃음이 새어나온다. 나는 고개를 들고 신선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6월. 아직 이르다면 이른 시간이지만 벌써 햇살이 따갑다. 쏴아아- 싱그러운 바람이 머리를 흩날리고 지나갔다. 대기 중에 짙은 풀냄새가 가득하다.
어느새 부쩍 여름이 다가와 있다.
+
텅텅, 공이 튀기는 소리. 내딛는 걸음을 따라 건조한 흙바닥에서 모래먼지가 인다. 재빨리 한 녀석의 마크를 젖히고 골대 밑으로 파고들려는 순간, 기다란 그림자에 앞을 가로막혔다. 하필, 나보다 키가 큰 김종현이다. 나는 우리 팀 녀석들의 위치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패스할까? 아니면 내가?
잠시 고민에 잠긴 내 앞에서, 잔뜩 몸을 낮춘 채 공과 내 눈동자를 번갈아 보는 종현의 긴장된 시선이 느껴졌다. 역광을 받은 종현의 선명한 검은 동공 안에 하얗게 여름 햇살이 부서진다. 나는 종현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씨익 웃었다. 내게 유난히 약한 종현을 이용할 생각이다.
“비켜.”
“싫어.”
종현은 한쪽 입 꼬리만 올려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분명 공격적이고 섹시한 미소인데,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짙까만 머리카락은 묘하게 순진하다. 어느 것이 너의 진짜 모습일까? 나는 잠시 농구와 관련 없는 고민에 빠지고 만다.
쏴아아- 나뭇가지들이 웅성대더니, 금세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종현과 나 사이를 빠져나갔다. 텅텅텅텅, 규칙적인 공 소리. 종현의 볼을 타고 흐르는 작은 땀방울에 햇빛이 난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그리고 넥타이를 헐렁하게 풀어헤친 사이로 보이는 덜 여문 하얀 목덜미와, 단단한 어깨……. 나는 종현에게서 빈틈을 찾으면서도 그를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다.
“앗……!”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종현은 순식간에 내 손에서 공을 채갔다. 서둘러 뒤를 돌아보자, 빠르게 반대편 골대를 향해 달리는 종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날렵하게 점프하여 골대에 공을 던져 넣는 김종현의 마른 등허리…….
종현에게 시선을 빼앗긴 나는 금세 공격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와!”
환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스크림 내기 농구는 좀 전에 종현이 넣은 골로, 우리가 졌다. 종현은 손등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며 나를 돌아보고 웃었다. 김종현이 짓는 승리의 미소는, 거만하지만 밉지 않은 여름의 태양을 닮았다.
“이진기, 빨리 아이스크림 사 와.”
“비키라니까 비켜주지도 않고.”
나는 괜스레 종현의 어깨에 내 어깨를 툭 부딪치며 짜증을 냈다.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는 종현의 행동에는 또 이유 없이 웃음이 난다.
눈이 부시다. 너, 그리고 우리의 여름은…….
+
땀범벅이 되어 수돗가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넘쳐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야 하는 남학생들의 점심시간은 늘 이렇게 아수라장이다.
이상기온. 6월인데도 벌써 한여름인 양 햇살이 따갑다. 정수리가 동그랗게 데워져 움직일 때마다 화끈댄다. 볼을 따라 땀방울이 또르륵 굴러 내려오기에 어깨로 슥 닦아냈다. 까슬까슬한 옷감이 닿자 햇빛에 탄 얼굴이 따끔거린다.
“진기야.”
나지막한 종현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종현이 비어 있는 수도꼭지 앞에서 손짓한다. 자기 차례를 나에게 양보할 생각인 거다. 그는 내가 더워서 끈적이면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선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종현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니, 그의 앞에 자리가 났다는 것을 내가 먼저 알았다면, 내가 나서서 종현의 자리를 빼앗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관계는 이렇다. 나에게 한없이 약한 김종현과 그런 그의 마음을 영악하게 이용하는 이진기.
나는 호위병처럼 종현을 곁에 세워둔 채, 세게 틀어진 수도꼭지아래 팔꿈치까지 넣고 얼굴과 목덜미에 물을 끼얹었다. 셔츠가 젖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지만 시원하니 기분이 좋다.
“김종현, 너 어제 왜 접속 안 했어?”
“과외 늦게 끝나서.”
거짓말. 어제 김종현은 나와 함께 심야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었다.
“공부도 못하는 게 존나 튕겨.”
“서든은 너보다 잘 하거든?”
종현의 말에 주위에서 맞아, 맞아, 라며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나도 키득대며 따라 웃었다.
진수가 말한 ‘공부도 못하는 게’는 전교 1등을 의미한다. 김종현은 머리가 좋다. 신기하게도 아이들과 새벽까지 게임을 하는 것 같은데 언제 공부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턱을 셔츠 앞자락으로 대충 닦으며 주위 녀석들과 말장난을 하고 있는 종현을 흘깃 훔쳐봤다. 땀에 젖은 얼굴에는 아직 솜털이 보송하다. 열아홉……. 소년이라기엔 시기를 조금 넘긴, 남자라기엔 아직 덜 자란 우리.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불안정한 시기. 마치 초여름처럼 애매한 우리의 관계…….
“…….”
문득 고개를 드는 심술은 분명 날씨 탓이다.
“야.”
대상도 없는 애매한 감탄사지만 종현은 어떻게 알고 나를 돌아본다. 왜냐고 묻는 그의 눈빛에 나는 대답 없이 수도꼭지를 반쯤 틀어막았다. 촤아악- 요란하게 물줄기가 뿜어져나갔다.
“야, 뭐야! 이진기!”
종현은 순식간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홀딱 물을 뒤집어쓰고는 서둘러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나는 으항항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종현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나는 그것을 눈치 채고 서둘러 교사 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씨발, 거기 안 서?!”
뒤에서 무섭게 쫓아오는 종현의 목소리에는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신다. 큰일났다, 진짜 화났나 보다.
+
오늘도 어김없이 지각이다. 터덜터덜 교실로 들어와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보니, 김종현의 책상 위에 곱게 포장된 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나는 가만히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드르륵 의자를 빼내 앉았다.
“야.”
앞자리 형섭의 의자를 툭툭 발로 찼다. 잠에 취한 얼굴로 형섭이 돌아본다. 나는 상자를 가리키며 누가 놓아 둔거냐고 물었다. 형섭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다시 몸을 돌려 책상 위에 엎드려 버렸다. 씨발, 누구야……. 싸늘히 교실 안의 반을 차지한 여학생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누가 놓아둔 것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덥석 상자를 집어 들고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험악하게 종이를 찢어내는 소리에 여자아이들 몇 명이 내 쪽을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잘 봐둬, 이 계집애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김종현에게 갖다 바쳐도 소용없으니까. 나는 피식 비웃음까지 흘렸다.
과자가 예쁘게 담긴 상자와 편지. 가만히 상자를 내려다보다가는 ‘누군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편지는 그대로 종현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서 과자를 집어 입에 밀어 넣었다. 아삭아삭, 과자가 부스러지는 소리에 돌아본 몇 명에게 좀 나누어주기도 했다.
나는 안다, 이 정도로는 김종현이 내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걸.
수업 종이 치기 직전에 종현이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들어오자마자 나를 찾는 종현과 눈이 마주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김종현은 늘 이렇게 나와 눈도장을 찍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녀석들과 인사를 하며 자리로 온다.
종현이 자리에 앉자 나는 편지를 슥 밀어주었다.
“뭐야?”
“이거, 과자랑 같이 들어 있던데.”
“읽어 봤어?”
“응.”
“뭐래?”
“그냥 너 좋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종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편지를 책상 속에 쑤셔 넣어 버렸다. 나는 속으로 키득대며 웃었다. 봤냐? 김종현은 이진기 외에는 관심이 없다고. 즐거워서 미치겠다. 결국 소리를 내서 크게 웃으며 과자를 한 주먹 집어 입에 밀어 넣었다. 와삭와삭, 과자가 입 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너무 통쾌하다.
주섬주섬 책을 꺼내며 수업을 준비하는 종현의 옆모습을 보다가, 상자 안에 남은 쿠크다스를 집어 포장을 벗겼다. 한쪽 끝을 물고 불쑥 종현에게 내밀었더니, 종현도 손이 아닌 입으로 반대쪽 끝을 물어온다.
허공에서 짧게 시선이 마주쳤다. 종현의 검은 눈동자에 담긴 내 모습, 키스라도 하듯 가까운 우리의 거리.
열린 창문으로 초여름의 싱그러운 바람이 밀려들어 커튼을 휘날렸다. 종현의 눈동자 안에도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이 흐른다. 달콤한 과자 향기와 더 달콤한 종현의 시선…….
톡, 하고 쿠크다스가 부러졌다.
나는 서둘러 눈을 피하며 쿠크다스를 입 안에 쏙 밀어 넣었다. 무심한 종현의 표정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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