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안에서 下
w. Harvey
꾸벅꾸벅 졸다 깨어 보니, 어느새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앞에 펼쳐진 책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내 책인데 김종현의 글씨가 빽빽하다.
사각사각, 옆에서 열심히 필기를 하는 종현의 커다랗고 마른 손이 보인다.
한참이나 종현의 손을 보고 있다가는 조심스레 종현을 훔쳐보았다. 단정하고 반듯한 옆선. 새카만 속눈썹이 곱기도 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입모양으로 앞에 봐, 라고 속삭인다. 응? 나는 못 알아들은 척 능청스레 되묻고, 종현은 손수 내 턱을 잡아 칠판 쪽으로 돌려준다. 턱에 와 닿는 종현의 서늘한 체온……. 후훗, 또 이상한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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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오후, 햇살 조각이 비쳐드는 점심시간. 더위, 혹은 수면 부족에 지친 아이들은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대신, 대개 잠을 청한다. 나 또한 엎드려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사각사각, 종현이 수학 문제를 푸는 소리……. 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잠들지 않고 나를 지키는 기사다. 김종현이 옆에 있어서 나는 늘 평온하고, 안락하다.
“이진기!”
누군가가 나를 불러 오기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진기 자. 왜?”
“국어책 빌리게.”
“거기 사물함. 내 꺼 가져가.”
종현은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책을 빌리러 온 녀석에게 서둘러 자신의 것을 내준다. 책을 빌리러 온 녀석이 교실을 나가자 또 다시 나른한 고요가 찾아든다. 그리고 들려오는 종현의 사각거리는 소리.
하지만 잠이 깨어버려 점점 더 정신이 또렷해 온다. 잔뜩 신경이 곤두서서는 종현이 움직일 때마다 보이지도 않는 그의 행동을 상상한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좀 더 무방비하게 잠든 척을 하고 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숙제를 마쳤는지 종현은 책을 정리해 넣는다. 그리고 내 것을 대신 해 주기 위해 책을 꺼내려는 듯, 종현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까워진 김종현과의 거리. 내 몸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는지, 벌써 몸이 뻣뻣하게 굳어온다. 등 위에 와 닿는 종현의 손길에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
“진기야, 수학 문제집 어디 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잠든 척이다. 진기야, 수학 문제집. 어깨를 끌어안고 나지막이 묻는 그의 목소리와, 등에 와 닿는 종현의 몸. 잔뜩 긴장한 내 어깨 위로 종현의 팔이 호흡을 따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이 그에게 들킬까 봐 두렵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한 줄기 불어 들어 와서는 교실을 온통 헤집어 놓는다. 팔락팔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저 바람은 아무래도 나가는 길을 모르는 것 같다.
+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김종현에게 여자 친구가 생길 것 같다. 잠이 오지 않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이다. 또 몸을 뒤척였다. 늘 늦잠을 자는 내게 김종현이 선물한 미키마우스 알람시계가 까맣게 빛난다. 꼭 저 같은 걸 주고 있어.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다.
새벽 2시 29분. 갑자기 짜증이 난다. 나는 잠을 설치고 있는데, 김종현은 잘도 자고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는데 얌전히 있으면 이진기가 아니다. 나는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집어 들고 1번을 꾹 눌렀다.
[하늘은 우릴 항해 열려 있어, 그리고 내 곁에는 네가 있어, 환한 미소와 함께 서 있는, 그래 너는 푸른 바다야~♪]
병신, 너는 하늘이야. 김종현이잖아. 괜히 들려오는 노래에 태클도 걸어본다. 심술이 나면 주위 모든 것이 짜증스러워 지는 것이 이진기다.
- …어.
잔뜩 잠에 취한 김종현의 목소리. 나는 이 새벽에 김종현이 전화를 한다면 배터리를 빼버렸을 테지만.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 …….
말을 잃은 듯 종현은 한참이나 조용하다. 색색 들려오는 숨소리. 마른세수를 하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 …몇 신데?
“2시 반.”
- …….
종현은 또 말이 없다.
어이없어도 좀 해주라. 나 안심 좀 시켜 줘, 종현아. 나는 전해지지도 않을 마음으로 멍하니 미키마우스 시계가 째깍째깍 가는 것만 보고 있다.
- …씨발, 이진기.
“개새끼, 왜 대뜸 욕이야.”
- 욕 안 하게 생겼어? 생일날 새벽에 전화 와서,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해주려는 줄 알았더니 아이스크림 심부름이나 시키고.
아차, 싶다. 그제야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종현의 생일이 있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아이스크림 심부름이 생일 선물이야. 받기 싫으면 말던가.”
전화기 너머로 하, 하고 종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나도 킥킥 웃었다. 벌써 눈치 챘다. 김종현이 올 거라는 걸.
- 목욕재개하고 기다려라. 선물 받으러 간다.
“5분 안에 안 오면 게임 오버야.”
- 너나 5분 후에 한 대 맞을 각오해.
툭, 하고 전화가 끊겼다. 깜빡이는 액정을 보고 있으니 또 웃음이 난다.
+
“왜? 도착했어?”
- 아니, 아이스크림 뭐 먹을 건데?
“설레임.”
- 알았어.
+
김종현은 설레임을 사들고 정확히 4분 49초 만에 우리 집 앞에 도착했다.
+
“맛있냐?”
“좀 줄까?”
“됐어.”
후후 웃으며 하늘로 눈을 돌렸다. 까만 하늘에 총총이 별이 박혀 반짝인다. 나는 지금 집 앞 공원 벤치에 앉아 종현이 사온 밀크쉐이크 맛 설레임을 물고 있다. 그리고 김종현은 연신 하품을 해대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쏴아아- 밤바람이 지나갔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 새벽은 춥다. 심지어 나는 아이스크림까지 물고 있으니.
“춥지?”
“응. 옷 벗어 주게?”
“아니 부채질 해주게.”
“씨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종현을 노려보았다. 종현은 피식 비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차갑게 식은 손으로 종현의 턱을 잡아 내 쪽으로 돌렸다.
“너 서연주랑 사귀냐?”
“아니.”
종현은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잡아 내리며 내 손에 호-하고 따뜻한 숨결을 불어주었다. 그 사소한 행동에 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나는 꼼지락거려 종현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는 다 먹은 설레임에 뚜껑을 덮고 돌려 닫았다.
“서연주는 갑자기 왜?”
“…….”
“서연주는 왜?”
입을 다물자 종현은 집요하게 되물어온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멀리 보이는 쓰레기통에 설레임 껍질을 조준해서 휙 던져 넣었다.
“아니, 그냥. 서연주가 너랑 사귈 것 같다고 해서.”
종현은 내 대답에 또 피식 웃었다. 뭔가 내 기분을 들킨 것 같아 괜히 민망하다. 차마 종현을 돌아보지 못하고 멍하니 하늘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다 먹었냐?”
“응.”
“선물 줘.”
“줬잖아. 아이스크림 심부름.”
“죽을래?”
“살래.”
말장난 같은 대화가 토닥토닥 이어진다. 이진기에게 약한 김종현, 그런 김종현을 이용하는 이진기…지만, 어쩌면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빨리 선물 내놔.”
“씨발, 줬잖아.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굴어. 생일이 무슨 벼슬이냐?”
“내가 받아간다?”
“니 마음대로 하시던가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저렇게 조르는 걸 보니 내일은 생일 선물을 사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
갑자기 목을 덥석 잡아 끌어당기는 종현의 행동에 몸이 굳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술이 맞닿아 있는 종현을 멍하니 응시했다.
“…….”
“…….”
쏴아아- 바람이 스쳐간다. 나풀나풀 내 이마에 와 닿는 김종현의 머리카락…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떠도는 설레임의 달콤한 향기…….
두근, 두근,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청량한 김종현의 여름 안에서 내 심장은 길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