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내가 산 나이만큼.20년 만이라고 했다.밀과 보리가 익어가던 마을의 너른 들판은 하늘에서 번득였던 오렌지빛 불길에 의해 한순간에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촌장님의 명에 따라 마을회관의 곳간에 있는 술독들의 술지게미를 거르러 가던 나는 그 한 순간을 눈 앞에서 생생히 목격했지만 목격자가 될 수 없었다.마을회관의 상석에 모여앉은 침통한 표정의 장로님들 앞에서 나는 눈 깜짝할 순간보다 빨랐던 그 순간을 소상히 설명하기엔 배운 지식이 너무 짧은 노예 소년일 뿐이었다.하지만 이런 날 앞에 두고 침통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세 명의 장로들은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8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지금 마을을 덮친 일은 감히 인간의 알량한 언어로 설명해 낼 것이 아니라는 것을.마을에서 가장 장수하셨다는 향년 100세의 수리 장로님은 묵직한 떡갈나무 지팡이로 제단의 바닥을 치며 묵은 목소리로 결론을 내셨다.
"이건 경고이외다."
"............"
가장 오래된 머리에서 나온 현답에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다만 체리나무집 모리 아주머니의 서글픈 울음소리만이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반주마냥 수리장로님의 묵은 목소리에 침울하게 깔려있을 뿐이었다.아무도 그녀에게 울음을 그치라고 하지 않았다.하지만 아무도 위로해 주지도 않았다.모리 아저씨는 사건이 일어난 초저녁부터 이미 들고있던 곡괭이를 흙바닥에 떨군 채 시내의 선술집으로 비틀비틀 걸어나간 뒤였다.모리네는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성년식을 치루지 않은 열입곱 어린 딸들이 세 명 딸린 집이었다.
"하지만 이십년 전에 처녀를 제물로 바치치 않았습니까.삼십년이면 그들에게는 삼일보다 못한 시간일터인데.."
"그 처녀에게는 젊음이 달아나고도 충분한 시간이었을 걸세."
".................허나."
"분명 새로운 제물을 원하고 있는 것일게야."
"..............."
수리장로님은 말 마디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셨지만 흔들리지 않으셨다.그만큼 확신하고 있단 뜻이었다.수리 장로의 대답에 결국 그의 왼편에 초조하게 서 계시던 촌장님은 입을 다물었고 모리 아주머니는 이제 통곡하시기 시작했다.아주머니의 어린 세 딸을 제외하고는 마을의 여성들은 모두 스무살이 넘은 성인들 뿐이었다.더욱 침울해진 공기 속에서 나는 어설픈 목격자란 이유로 어울리지도 않게 사람들의 중심에 홀로 서 있었다.물론 내 증언은 지금 상황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지만 한낱 노예소년인 나로서는 이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함부로 구석으로 피신할 수도 없었다.나는 수리 장로의 오른편에서 가만히 지팡이를 짚고 앉아있는 마갈장로님을 곁눈질했다.지팡이를 짚고 선 마갈장로의 검버섯 가득한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나는 문득 조금 불안해 졌다.분명 그는 아무 말 없이 회관의 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백내장에 걸려 흐릿해진 그의 오른쪽 눈은 어쩐지 나를 노려보고만 있는 것 같았다.그러고 보니 마갈 장로의 아들은 모리 아저씨였다.모리 아주머니의 남편.마을 유일한 처녀들의 아버지.곧 마갈 장로는 처녀들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어쩌면 마갈 장로는 지금 이 상황이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나는 두려움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마갈장로의 지팡이가 촌장님과 수리 장로님의 침묵 사이로 끼어드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정말로 불안해 졌다.
**
"그 분을 뵙거든 일단 무조건 엎드려라."
"네..."
"............가엾은 놈."
"........................."
수레의 기둥에 내 발목을 단단히 사슬로 묶으시던 촌장님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오후의 들판은 아직 그 날의 상처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검게 죽어있었다.수리 장로님은 아마 오년은 지나야 들판에서 새순이 돋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하셨다.그리고 아마 나는 그 오년 후의 새순을 보지 못할 운명일 것이다.
"촌장님."
"그래.백현아."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갈 장로의 탁해진 눈이 나를 노려본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결국 제물로 선택받은 것은 나였다.갓 스무살이 된 소년.처녀가 아님에도 내가 선택받은 이유는 마갈 장로의 설득력 있는 한 마디 때문이었다.'그 분'의 모습을 보았음에도 나는 살았다는 것.'그 분'의 불꽃이 들판만을 태우고 멍청히 바라보고 서 있던 나를 태우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선택받은 제물이라는 마갈 장로의 단호한 한 마디에 모든 마을 사람들은 선동되었다.물론 나는 날 '그 분'이 거처하신다는 마을 너머 붉은 산으로 데려갈 수레에 올라타는 순간 들려온 마을사람들의 축제 소리에 깨달았다.마을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장로의 손녀딸 세명의 목숨과 부모도 없고 출신도 모르는 고아 노예소년의 목숨.사람들은 당연한 선택을 한 것일 뿐이다.반항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고개숙여 끌려가는 날 끝까지 따라와 준 것은 날 거두어 길러주신 촌장님 한 분 뿐이셨다.아무도 없는 휑한 벌판,말 두마리가 끄는 수레에 묶인 날 차마 보지 못하는 촌장님께 고개숙여 인사했다.내 인사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시던 촌장님은 잠시 코를 훌쩍이시더니 말의 엉덩이를 한 번 때리시고는 빠르게 뒤돌아가셨다.날 실은 채 붉은 산으로 향하는 수레 위에서,나는 점점 작아지는 촌장님의 등과 마을의 음악소리에 몸을 뉘였다.검게 죽은 벌판에서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검은 냄새를 맡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오년 뒤의 새순 냄새가 너무도 궁금해졌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나는 잠을 청했다.
꿈을 꾸었다.어떻게 꿈인지를 알았냐면,얼음이 불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온통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음들은 불이 붙은 루비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며 타오르고 있었다.그리고 나는 그 한 가운데에 쓰러져 있었다.하지만 뜨겁지 않았다.너무도 따뜻했다.타오르는 얼음들이 마치 나를 보호하듯 감싸안고 있는 느낌이었다.그러나 나는 어째서인지 슬퍼하고 있었다.너무도 그리웠다.보고싶어 미칠 것 같았다.안기고 싶었다.나를 안아주길 바라고 있었다.그가 나타나 나를 지켜줬으면 했다.타오르는 얼음 속에서 나는 그리움과 슬픔에 몸을 웅크리며 눈물을 흘렸다.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고 싶었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떠오르지 않는 그를 바라며 웅크리고 우는 내 귓가에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냉혹하고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내가 널 죽일 걸 예상하고 불을 옮겨놨군.」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얼음이 있다면 저렇게 시릴까.찌르는 듯한 서늘한 목소리에 나는 더욱 몸을 웅크렸다.순간 얼음을 태우던 불길들이 더욱 크게 타올랐다.그 기세에 나도 모르게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매끄러운 하얀 실크가 내 소매 위로 덮여있었다.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처음보는 하얀 실크가 내 몸에 입혀져 있었다.그런데 어쩐지 익숙했다.노예로 자라온 내가 이런 옷을 입어봤을 리도,본 적도 없는데도 굉장히 익숙했다.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그'가 선물한 옷이라는 막연한 확신을 하는 순간,다시한번 얼음같은 목소리가 날 공격해왔다.
「배 속의 아이가 저 녀석을 지켜주고 있잖아!」
아이?절규에 가까운 고함에 나는 본능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내 배가,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헉....!"
눈을 떴다.차가운 바닥이 내 볼에 닿아왔다.선명했던 꿈의 여운에 헐떡이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온 몸이 땀으로 흥건했다.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려 본능적으로 소매를 당기니 뻣뻣한 마의 감촉이 느껴졌다.하얀 실크옷은 꿈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묘한 공허함에 머리가 띵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어느새 밤이 되어있었다.나를 실고 왔던 마차는 온데간데 없었다.나는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 내 발목을 살짝 움직여 보았다.사슬이 느껴지지 않았다.하지만 불현듯 발등으로 닿아오는 매끄럽고 서늘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다리를 끌어모았다.놀랍게도 내가 누워있던 곳은 매끄럽고 딱딱한 검은 바닥이었다.재질을 알 수 없는 매끄러운 검은 바닥은 어둠 속에서 선명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어쩐지 익숙한 광채.나는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그 광채 위에 올려놓았다.손이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이 검은 바닥은 분명 본 적이 있었다.꿈 속에서.나를 지켜주던..그 불타오르던..
"흑룡의 다이아몬드다."
낮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나는 휙 몸을 돌려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어둠 속,처음 보는 커다란 실루엣이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내가 누워있는 검은 바닥보다 훨씬 높게 솟은 바닥에 올라서 있는 그의 얼굴은 칠흙같은 어둠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보이지 않지만 나는 어쩐지 다 보이고 있었다.꿈이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했다.날 내려다보고 있는 저 남자.그.당신은 분명 키가 크고 품이 따듯하며,큰 눈으로 나를 바라볼 것 같아.다정하게 웃어주겠지..
"내가 널 선택했어.백현."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순간,그가 내 눈 앞에 와 있었다.붉은 용이 눈 앞에서 겹쳐졌다 사라졌다.꿈결처럼 내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품에 안겨들어 평온히 눈을 감았다.나는 내가 제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단지 내게 다가올 운명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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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랜만이에요'ㅅ' |
용과 사랑에 빠지는 ㅇ인간 배큥입니다.배큥이가 꾼 꿈에 주목해주세요.
너무 갑자기 써서....다음편 언제 나올지;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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