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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열! 나 체육복 좀!"
"내꺼 너한테 크지 않냐?"
"아니거든."
교실의 뒷문이 벌컥 열리며 소리쳐오는 것은 백현이었다. 딱 봐도 드러나는 신체사이즈에도 꿋꿋이 자기에게 맞는 사이즈라며 찬열의 체육복을 빌렸다. 큰 푸대자루라도 걸친 것 같은 우스운 꼴이 떠올라 속으로만 낄낄댔다. 바로 그저께만 해도 자신의 집에서 제 옷을 빌려 입은 모습을 봤기에 웃음이 나왔다.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은 채 교실 뒤 쪽의 사물함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기 꺼내가.
입으라는 허락에 얼른 체육복을 꺼내들어 교복 상의 위에 허겁지겁 겹쳐 입고는 하의만 손에 든 채 뛰쳐나갔다. 야- 같이 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샤프를 들었다. 한참 전부터 고집스레 안 풀리던 수학 문제가 단번에 풀렸다.
나이가 꽤드신 선생님의 따분한 목소리는 절로 하품이 나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게 했다. 벌써 제 책상에 엎어진 녀석들이 몇 보였고 요즘 반에서 유행한다는 게임을 해대는 녀석들도 있었다. 아직도 쨍쨍 내리쬐는 태양에 창밖의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이놈 저놈 체육복을 대충 걸쳐 입고 죽어라 달려 축구를 하고 있는 사내놈들 사이에 하얗게 백구같이 생긴 놈 하나가 제 몸보다 훨씬 큰 체육복을 겨우 걸쳐 입고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패스를 하라는 건지 이리저리 손을 흔들기도 하고 상대방이 골을 넣자 애꿎은 흙을 발로 차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던 녀석이 어느 순간 재빨리 움직여 패스를 받더니 요리조리 잘도 피하며 결국엔 골대 앞까지 공을 끌고 왔다. 그리고는 공을 차려던 순간에 큰 덩치하나가 자그만한 그 녀석에게 태클을 걸더니 녀석은 그대로 저기까지나 굴러 나가떨어졌다. 덜컹.
"뭐야, 거기."
"아, 그러니까...그게, 저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되요?"
저 멀리까지 굴러가버린 백현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수업 시간이었고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선생님은 물론 아이들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귓바퀴가 발개지는게 느껴졌지만 엄살이 심한 탓에 이리저리 구르고 있을 모습이 떠올라 다급해졌다. 긴 다리를 허우적대며 서두르는 모습이 퍽 웃겼지만 표정만큼은 고속도로에서 대형트럭과 교통사고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예상대로 운동장으로 나가자 백현은 소리를 이래저래 질러대며 제 앞에서 우물쭈물해대는 덩치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네놈 때문에 골을 못 넣었다니 무릎아파서 이제 축구도 영원히 못하겠다니 아직도 흙바닥에 누워서 뒹구는 것을 팔 밑으로 손을 넣어서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으악-!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찬열이었다.
"박찬열? 너 여기서 뭐해?"
"어?"
그래, 내가 그때 왜 그랬지 싶다. 그 날이 지나고 여자 반 사이에서는 백현과 찬열의 소문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안 그래도 매일 붙어 다니는 둘의 모습에 있는 망상 없는 망상 다 끌어다 헛소문이 파다했는데 거기다가 백현이 다쳤다는 것에 당장 달려 나갔다는 일은 여자 반 층에서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었다고 한다. 급식실에서도 힐끔대며 겨우 쳐다보던 것들이 이제는 대담하게 둘을 보며 히죽거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몰래 사진을 찍어대기도 했으며 찬열이 백현의 식판에 김치라도 하나 올려주면 그대로 자지러졌다.
"너랑 내가 사귄다는게 말이 되냐?"
굳이 집에 놀러가겠다며 제 집과 정반대인 길을 쫓아오더니 큭큭댔다. 뭐가? 아니- 여자애들. 우리가 사귄다나 뭐라나. 살짝 긴 머리에 붉어진 귓바퀴가 가려졌다. 소문인데, 뭘.
"넌 아무렇지도 않아?"
이래도? 백현이 갑작스레 팔짱을 껴오는 탓에 주위를 둘러보고는 서둘러 밀어내버렸다. 장난 하냐? 애초에 말이 안되잖아. 니랑 나랑이. 말의 뜻은 냉정했지만 시원하게 웃어 보이며 백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하긴, 말이 안되지... 백현은 이내 제 머리위의 큰 손을 끌어내렸다.
"나 옷 좀."
집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듯 옷장을 뒤지더니 흰색 면 티 한 장을 꺼내들었다. 평소대로라면 훌렁훌렁 벗어던지던 것이 주섬주섬 옷을 챙기더니 화장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야, 내외 하냐? 그런 거 아니거든! 게임기를 꺼내놓고 이리저리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옆에 앉아 바쁘게 움직이는 손을 쫓고 있었다. 기다려봐, 이 판만 깨고 너도 껴.
"나 안해."
오늘 하루 종일 상태가 이상하더니 기어이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네가 게임을 안 해? 찬열은 일시정지를 해놓는 것도 잊은 채 재빠르게 일어나 백현의 양 볼을 부여잡았다. 그래, 이렇게 보니까 살짝 볼이 빨간 것이 어디 아픈게 분명했다.
"어디 아프냐?"
"게임 한 번 안한다는데 뭘 그렇게 유난을 떨어."
이야- 우리 현이가 게임을 마다할 때도 있네. 현이라고 하지말라고! 이제는 목덜미까지 벌게진 채 소리쳤다. 그럼에도 찬열은 능글맞게 웃으며 소파 위로 올라갔다. 그래, 좋아. 이 형님이 놀아줄게. 잘 거거든! 백현이 쿠션에 얼굴을 묻은 채 있는 힘껏 밀어버린 탓에 찬열은 소파 밑으로 나가 떨어져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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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열씨, 오늘이 몇 일이지?"
"13일이요. 어? 마감이 얼마 안 남으셨네요?"
"말도 마, 이 작가님이 꽤 속을 썩인단 말이지. 오늘 찾아가 봐야 해."
찬열의 직장 선배인 민주는 늘 그렇듯 달력에 빨간 색 동그라미를 그려대며 의자에 기댔다. 젖혀지는 의자가 빙그르 돌아가며 끼익 소리를 냈지만 다들 할 일이 바쁜지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 듯 했다. 한참 전에 뽑아온 커피가 차갑게 식어버려 한 번에 털어넣고는 꾸깃하게 접었다. 아직도 달력 체크에 열중하고 있는 민주의 책상을 톡톡치며 말을 걸었다.
"근데 그 작가님 신인 작가치고 스토리가 탄탄하던데요?"
"그치, 속을 썩이긴 하지만 작가로써는 최고라니깐."
"여성분이시라 그런 가 문체도 예쁘고..."
"응? 무슨 소리야?"
"네? 문체가 예쁘다고..."
그 작가님 남자 분이셔, 필명 쓰셔서 네가 착각한거야. 민주는 빈 종이컵을 입에 물고 킥킥대며 말했다. 남자분이시라고요? 안 그래도 커다래 쏟아질 듯한 눈이 더 커다랗게 뜨였다. 사실 처음에 글을 읽고 나서 문체에 반했다고 말할 정도의 아름다운 문체였다. 자신이 고등학교 때 이후 이렇게 아름다운 문체를 본 적이 없다 생각했는데 남자라고 하니 더욱 놀라웠다. 열아, 필명 예쁘네.
"열아가 필명이면 그 작가님 본명은요?"
"그건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웬만하면 집 밖으로도 안 나가시는 분이라 그런 가 본명은 말 안 했으면 좋겠다, 하시더라고."
민주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았다. 찬열은 무언가 떠오르지 않는 듯 한참을 미간을 찌푸리다 박수를 쳐대며 말했다.
"아아! 그 저번에 연말 파티에 끝까지 참석 못하겠다고 하신... 그 분 맞죠?"
"어 그래- 그 때 내가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결국 안 오셨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오실 것 같더라."
"정말요?"
"내가 몇 주 전부터 꼬셨어! 아마 이번에는 오실거야, 그럼 너도 소개해주고 그래야지."
곧 있을 연말파티 때 제 담당 작가 소개시켜드리는 것 외엔 딱히 할 일도 없던 찬열이었다. 그 작가님이랑 얘기나 나누면 되겠다 싶어 민주에게 웃어보였다. 원고를 받아 확인하고 팩스를 보내고 복사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민주는 작가님을 뵈러 간다며 이미 퇴근한 후였다. 퇴근 시간이 한 시간이나 훌쩍 넘어버린 것을 보고 가방을 챙겨들었다. 나가면서 사무실 한 쪽 책장에 꽂혀있던 책 한권을 뽑아들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블라썸」 -열아.
***
"넌 어디 과 갈 거야?"
"몰라, 생각 안 해봤는데. 넌?"
"난 문창과. 작가할거거든."
하긴, 넌 글 잘쓰니까.